• 산악인의 대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 | 잘 나면 얼마나 잘 났나 세상만사 인간관계죠

    입력 : 2014.01.09 17: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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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연시에 그는 거의 쉴 틈이 없다. 와주기를 바라는 개인이며 단체가 널려 있어서다. 식사 약속만도 하루 세끼 다 뛰어도 부족할 정도다. 가는 곳마다 술 좋아하는 산악인들이 많다보니 피곤은 더하다. 오죽했으면 인터뷰 날 그는 터진 입술을 하고 기자를 맞았다. 대화 도중에도 전화벨은 쉬지 않고 울렸다. 한국 산악인의 대부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은 그렇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013년 10월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네팔 파키스탄 등 16개국이 회원으로 활약하는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으로 다시 선임돼 세 번째 연임을 하게 됐다. 앞서 대한산악연맹에서도 그를 다시 회장으로 뽑아 두 자리 모두 3연임을 하게 됐다. 산악인들이 이처럼 그를 밀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세상만사가 모두 인간관계야. 회장 이전에 인간적으로 가까워져야지. 산악연맹은 심부름 하는 자리지 군림하는 곳이 아니야. 결속해서 하라고 하니 할 수 없이 한다.” 이 회장은 “1박2일 회의에 2박3일 비행기 타고 올 만큼 산악인들은 끈끈한 게 있다”고 강조했다.

    “2005년 파키스탄 지진 때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엄청난 양의 옷을 내놨어. 그걸 현지에 전해주려고 각국에서 2만달러씩 운송비 내서 지원했을 정도로 산악인들의 관계는 돈독하다.”

    이 회장은 세계 산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대단하다고 소개했다.

    “벌써 (히말라야 14좌 완등이) 다섯 명이나 나왔다. 김자인은 스포츠클라이밍 세계 랭킹 1위야. 올해는 산악국가 네팔을 도와 이 나라가 처음으로 스포츠클라이밍대회를 열게 했다. 제1회 박영섭컵 대회지.”

    그렇지만 그는 매사를 인간관계로 풀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겠나. 뭐 하겠다는 집념을 가지면 안 돼.”

    그러면서 인간관계가 뛰어났던 산악인으로 2009년 낭가파르바트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고 고미영 씨를 회고했다.

    “어제도 책상 정리하다 미영이 사진을 보고 눈물이 맺혔다. 너무 아까운 인물이야. 그는 인간관계가 너무 좋아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아꼈지. 대한산악연맹이 경기단체가 아니란 이유로 홀대를 받다가 2013년에 처음 스포츠클라이밍으로 전국체전을 치렀는데 미영이가 시작해서 스포츠클라이밍이 체전종목 된 거야.”

    이 회장은 그러면서 2014년 완공 예정인 속초 국립산악박물관(대지 1만2000여 평) 건립 역시 고미영 씨 때문에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세계 산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기까지 사고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이 회장은 누구보다도 많이 장례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그는 그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겼다.

    “고상돈 고미영 김형일 박영석 … . 우리가 보낸 것은 아니지만 히말라야는 각오를 해야 해. 박영석이도 언제 갈지 모르는 친구였고, 마음이 아프지만 인생이 따로 있던 것 같아.”

    대신 그는 아까운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네팔엔 영석이 상징을 많이 만들었다. 포카라 세계산악박물관은 일본이 많이 투자해 세웠는데 거기에 대한민국 마운틴 코너를 2012년 10월 만들었고, 2013년 2월엔 박영석 코너도 만들었어. 카트만두에서 100km 떨어진 카카니 세계산악인기념공원엔 박영석 기념탑도 세웠다. 돈 있다고 기념탑 세울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히말라야를 초등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텐징 노르가이(인도), 네팔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 푸 도르지에 이어 네 번째야. 동상 만드는데도 많이 관여했어. 고상돈 지현옥 고미영의 동상을 세웠지.”

    모두가 인간관계로 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누구보다도 자주 히말라야를 가지만 산에서 잃은 많은 후배들 때문에 여행이 즐거울 수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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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 나누며 맺은 산과의 인연 그가 산악계의 대부가 된 데는 산에서 생사를 나눈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었다.

    인왕산 기슭 종로구 누상동이 고향이라 이 회장은 자연스레 산과 친해졌다. 산에 대한 그의 열정은 등산장비 마련하려고 월남전에 자원했을 정도로 뜨거웠다.

    “월남 간 친구들이 등산장비가 많다고 해서 나도 가겠다고 했지. 그런데 가보니 밤이 낮처럼 밝은 거야. 캐러비너며 로프 같은 게 엄청나게 많았지만 매일 조명탄 터지고 전시인데 정신이 있겠어. 그래도 남들 돈 되는 것 가져올 때 등산장비 가져와 70년대부터 외국 산 다녔다.”

    그는 한때 신문사 카메라맨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1969년 ‘등산’ 잡지(현 월간 ‘산’)를 만들어 잠시 기자로 활약도 했다.

    “모씨가 수표 갖고 와서 시작했지. 노산(이은상)이 간여했고. 2년 정도 잡지기자를 했는데 그 뒤 ‘산’으로 바뀌었어. 10여 년 후엔 월간 ‘사람과 산’도 만들었고.”

    그 때 운명적인 사건이 터졌다.

    “70년 한국산악회서 히말라야에 가려고 했다. 1969년에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훈련할 때였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나는 꼭대기(대청봉)에 있었는데 몇 시간 차이로 엄청난 사고를 면했어. 이은상 씨가 이후락 씨에게 전화해 헬기까지 뜨고 했으니 ….”

    당시 훈련하던 원정대원 18명 가운데 10명이 참사를 당했다.

    그러나 노산 이은상 덕에 이대 산악부 출신의 부인과 결혼까지 했으니 그는 산과는 떼려야 뗄 수조차 없는 관계다.

    “집사람도 산악인이야. 노산 선생님이 연결해줬지. 어렵게 살 때였어. 신세계에서 등산장비 아르바이트 할 때인데 집사람이 손님으로 왔어. 거칠게 대해 좋지 않게 봤을 것인데, 당시 노산 선생님이 한국산악회 회장이었거든. 어느 날 부르시더니 “네가 이대 산악부 좀 돌봐줘라”고 해서 이대 법정대 산악부를 맡았어.”

    인간관계는 믿음으로 이어가는 것 산과 인연을 맺고 많은 활동을 하지만 이 회장은 잘 나가는 중소기업의 오너이기도 하다. 누전차단기와 메모리반도체 모듈을 생산하는 ㈜태인은 28년 역사에 연 매출 400억원대 강소기업이다. 24시간 붙어서 일을 해도 힘들다는 중소기업을 그렇게 꾸려가는 비결 역시 그의 인간관계에 있다.

    “나는 이제까지 돈 꿔주고 영수증 받은 적 없어. 그만큼 사람을 믿지. 내가 워낙 바쁘니 회사는 아예 전문경영인에 맡기고 있어. 깨질 때 깨지더라도 우선은 믿는다. 지금 비서는 13년이나 데리고 있어. 내 성질 좋지 않은 것 알 터인데 믿고 따라줬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좋다. 돈은 나중 문제야.”

    자일 파트너에게 생명을 맡기는 산악인의 믿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 회장의 인간관계는 지금 산을 넘어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세 분을 아버지로 모셨다. 스키의 백남홍 선생님, 산악인 이기섭 박사님, 원로 마라토너 손기정 선생님 등이다. 백남홍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스키 도입의 원로이고 이기섭 박사님은 이대부속병원장까지 한 뒤 설악에 살면서 무료진료를 해 설악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분이자 산악계 원로다. 이 박사의 딸도 의사인데 아버지를 따라서 시골서 일하고 있다. 황영조를 양아들 삼아 손기정 선생님과 셋이 아버지 아들 손자로 어울렸다. 장미란이는 양딸이고 이은경이도 딸로 삼았다. 양희은은 여동생이 되어 자주 들리고….”

    이 회장은 2013년엔 아너스클럽 회원이 됐다. “얼마 전 우리 얘가 좋은 일 하자고 해서 1억원을 냈어. 그 돈으로 체육계 장애인을 위해 써 달라고 했지.” 지난 12월 19일 그의 성금은 저소득청소년 체육꿈나무 16명에게 희망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이다.

    산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 그래도 천성이 산악인인지라 이 회장은 지금도 바위에 매달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지난 11월엔 대산련 임원진과 함께 인수봉에 올랐다.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 후배들과 함께 매달릴 때가 가장 행복해.” 그런 산악인 후배들을 위해 그는 서울 역삼동에 산악박물관을 겸한 사무실까지 마련했다.

    “이 사무실 마련한 지 20년 됐다. 주변이 모두 호박밭이었을 때지. 그땐 여기 앉아서 북한산이 보였다. 산악인들 와서 쉬라고 마련한 거야.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가 보니 산이 놀이터였어. 거기 사람들에겐 생활의 일부였어.”

    한 때 한국등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그는 이제 국립등산학교가 들어서길 고대하고 있다. “한국등산학교가 있고 코오롱등산학교도 있지만 국립으로 등산학교가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되면 외국 산악인들이 와서 교육도 받을 수 있고 한국의 위상이 그만큼 강화될 수 있다. 게다가 사고예방 차원에서도 필요하고.”

    이 회장은 한국은 산악훈련 하기에 아주 좋은 나라라고 했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이 있는데 내한 훈련장은 최고다. 백두산이 히말라야보다도 더 춥다.” 몇 년 전 금강산에서 등산학교 강좌를 개설한 그는 북한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꿈을 꾸고 있다.“개인적으로 북한이 아시아 산악연맹에 들어와 일했으면 해. 남북 청소년이 교류하고 함께 에베레스트 오르고 …. 그들과 부둥켜안고 싶은 꿈을 꾸고 있어. 쉽지는 않지만 꼭 되리라 생각해.”

    이 회장은 “한국은 눈만 뜨면 산에 가서 잘 수 있으니 복 받은 나라”라고 했다. 그게 전 국민의 3분의 1이 산악인이고 아웃도어 시장이 미국 다음으로 커진 배경이라고 했다.

    다만 젊은이들이 산과 보다 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전엔 등산이 아니라 입산이라고 했지. 그만큼 심오한 뜻이 있어.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께도 젊은이들을 산으로 보내 자연을 느끼게 하자고 했어. 나라사랑 가족사랑 하는 걸 배울 거라고. 노조도 산에서 만나면 잘 풀리잖아. 산은 인생의 도장이자 인생의 스승이야. 대구에선 고교 산악부가 비교적 활성화돼 있는데 바람직한 일이지. 산에 많이 가야 해. 왜 아이들을 안에서만 키우려 하나. 동물원에 갇힌 건 호랑이가 아니야.”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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