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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영화 웃음 뒤 스크린 독점 그늘
입력 : 2013.10.15 14: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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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 수는 무려 1190개다. 국내의 전체 스크린 수는 2200개다. 전국의 극장 50% 이상에서 오로지 이 <관상> 한 편만을 걸고 있다는 얘기다. 다른 영화는 아예 극장에 나오지 못하거나 나오더라도 사람들의 눈에 띄기 어려울 만큼 극히 적은 수의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흥행영화니까 많은 극장들이 해당 영화를 상영하는 건지, 아니면 많은 극장들이 특정 영화만을 상영하니까 사람들이 결국 좋아하게 돼 흥행하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물론 <관상>은 전자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후자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꼭 일도양단 식으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이 영화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관상>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비교적 건전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관상>처럼 지난 8월 한달 동안 한국영화만으로 무려 2000만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설국열차>와 <숨바꼭질> <더 테러 라이브>도 그만한 가치부여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설국열차>는 900만명을 훌쩍 넘겼다. 나머지 두 작품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각각 550만명을 전후한 기록을 세웠다. 세 작품 역시 모두 스크린 독점 논란으로 크게 비판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 세 작품도 한창 상영될 당시에는 사실상 전국 스크린을 거의 다 차지하다시피 했다. 작품이 좋으니까 당연히 사람들이 몰린다는 점에 있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설국열차>의 경우 반(反)자본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이었다. 지구에 새로운 빙하기가 찾아오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고 세상을 순회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설국열차는 각각의 칸이 철저한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맨 앞은 황금 칸, 맨 뒤는 꼬리 칸이다. 영화는 꼬리 칸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한 칸 한 칸 앞으로 전진하며 열차를 점령하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명백한, 극히 원칙론적인 계급혁명의 이야기다. 어쩌면 매우 전형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 이야기가 10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이끈 것은 그만큼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는 감독의 통찰력이 워낙 탁월했기 때문이다. <숨바꼭질>도 <더 테러 라이브>도 마찬가지다.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중산층의 극단적 불안감, 그 정치·사회적 위기의식에 대해 관객들이 크게 공감하고 동조하지 않았던들 영화가 그처럼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독한 영화를 순하게 만드는 방법 하지만 체제 저항적 성격을 띤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건 일종의 패러독스다. 아이러니한 역설이다. 어쩌면 이들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순수한 저항성을 극장 안에 가두게 되는 결과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극장 안에서만 혁명을 꿈꾼다. 극장 안에서라면 가진 자들에게 핏빛 복수를 하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체제순응적이고 순화된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장 불온한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들은 자본주의의 독점적 시장구조를 통과하면서 ‘돈은 벌고 정신은 사라지는’, 매판의 영화로 전락하는 형국 속으로 자신들을 끌고 들어간다.
자본이 스크린 독점을 통해 노리는 궁극적인 지점은 바로 여기서 찾아진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의 본질은 영화문화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드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정신의 쇠퇴가 진행된다는 데에 있다.
반면에 영화가 갖고 있는 정치적 성향이 극장 밖으로까지 이어질 법한 영화는 가혹할 만큼 차단된다. 다시 말해 스크린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이 제작하고 백승우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멀티 플렉스 계열 상영관에서 철저하게 분리됐다. 따라서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제 문화적 혹은 산업적 관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정치·철학적 시선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 다양성은 결국 계층과 계급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산업의 안전판이 마련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층위의 사회적 구성원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산업은 일순간에 붕괴할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서너 편의 영화가 막대한 스크린 수의 위용을 자랑하며 대다수의 관객을 끌어 모으는 현 상황을 즐기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많은 편수의 영화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관객을 만날 수 있도록 기존의 시스템을 바꿔 낼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제 어느 한 쪽 방향에 서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7호(2013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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