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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권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돈 냄새 잘 맡는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
입력 : 2013.09.03 09: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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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델(왼쪽)과 아이칸
언론과 시장이 델 회장의 전격적인 상장폐지 도박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을 때 맨해튼 월가 사무실에서 델 회장의 상장폐지 계획을 지켜보던 헤지펀드 업계 거물 한 명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업사냥꾼이자 억만장자 헤지펀드 투자자인 칼 아이칸 아이칸캐피털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델컴퓨터 주식을 한 주도 갖고 있지 않았던 아이칸 회장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펀드매니저들에게 델컴퓨터 주식을 비밀리에 대거 사들이라고 지시했다. 델컴퓨터 상장폐지 발표를 듣고 뭔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아이칸 회장은 이후 델컴퓨터 주식 8.7%를 매집, 델컴퓨터 대주주 자격을 갖추게 됐다. 상당량의 델컴퓨터 지분을 확보한 뒤 아이칸 회장은 처음부터 구상했던 일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델 회장이 제시한 인수가격을 문제 삼았다. PC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PC 산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 델컴퓨터가 구조조정을 통해 새롭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인수가격이 너무 낮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주주들이 상장폐지안에 반대해야 한다고 세몰이에 나섰다. 동시에 델컴퓨터 매각 절차를 총괄하는 델컴퓨터 특별위원회에 델 회장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델컴퓨터를 인수하겠다며 선전포고를 했다.
아무런 문제없이 자신이 창업했던 델컴퓨터를 다시 개인회사로 만들어 보다 신속하게 턴어라운드 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델 회장 입장에서 기업사냥꾼 아이칸이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델 회장은 기업사냥꾼 아이칸이 델컴퓨터를 인수한 뒤 휴렛패커드(HP) PC사업부와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델컴퓨터를 인수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상장폐지안을 놓고 주주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이 과정에서 주가를 띄워 시세차익을 챙기려는 게 델컴퓨터 인수전에 뛰어든 본래 목적이라는 것. 그렇다고 아이칸을 그냥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상장폐지 반대세력들이 아이칸 진영으로 속속 이동해 세를 규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주표결을 통해 상장폐지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델 회장은 인수가격을 높이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델 회장은 주당 인수가격을 기존 13.65달러에서 10센트 올린 13.75달러로 높이는 한편 주당 13센트의 특별배당을 실시하기로 했다. 결국 주당 23센트를 추가로 더 부담하게 된 셈이다.
델컴퓨터 상장폐지안이 델 회장 생각대로 주총에서 통과되더라도 아이칸 회장은 그만큼 더 많은 시세차익을 낼 수 있게 된 셈.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이칸은 델컴퓨터와 이사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델컴퓨터 이사회가 주주표결 때 상장폐지안이 쉽게 통과될 수 있도록 주주 승인요건을 완화한 것을 무효화해달라고 델라웨어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지난 6개월간 질질 끌어온 델컴퓨터 상장폐지 절차가 더 지연될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졌다. 이처럼 칼 아이칸 회장은 기업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행동주의 투자 펀드를 운용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행동주의 투자는 일반적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거나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는 기업 지분을 대거 확보한 뒤 경영에 직접 개입하고 간섭해 주주이익을 최대로 키워내는 것을 말한다.
국내에서도 칼 아이칸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다. 지난 2006년 2월 KT&G에 대한 적대적 M&A에 나서면서 국내 금융시장을 발칵 뒤집어놨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거물 기업사냥꾼이 국내기업을 겨냥했다고 해서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한동안 국내 자본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아이칸 회장의 KT&G 인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KT&G가 경영권 방어차원에서 주식을 대거 사들이면서 주가가 급등, 투자한 지 10개월 만에 1500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긴 뒤 유유히 사라졌었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아이칸을 적대적 M&A를 무기로 천문학적인 시세차익만 가져간 탐욕의 화신 정도로 평가한다.
하지만 수익이 최고 덕목인 이곳 미국 월가에서 칼 아이칸은 단순히 기업사냥꾼에 그치지 않는다. 월가 주류시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큰손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과 월가의 초미의 관심사다. 그가 손을 대는 기업마다 주가가 수직 상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업사냥꾼이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아이칸 회장과 인터뷰 한번 하려는 언론이 줄을 서 있고 컨퍼런스나 포럼에 그를 초청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것도 아이칸 회장의 영향력과 위상을 보여준다. 기자는 지난 7월 17일 뉴욕 맨해튼 피에르 호텔에서 CNBC가 개최한 CNBC딜리버링알파(Delivering Alpha) 컨퍼런스에 참석했는데, 이날 컨퍼런스의 가장 중요한 세션은 아이칸 회장 차지였다. 300여명의 청중들은 아이칸 회장이 들려주는 투자 혜안과 통찰력 그리고 돈 되는 이야기(?)에 관심을 집중했다. 77세 고령인데다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아이칸 회장이지만 이날 컨퍼런스에 참석한 청중들에게 자신은 여전히 펀드 수익률을 매일 챙겨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돈을 잃는 날에는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다며 농담 섞인 이야기를 했다. 농담처럼 툭 던진 얘기지만 투자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도 수익, 둘째도 수익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델컴퓨터 외에도 최근 다단계 건강보조식품 판매회사 허벌라이프 투자로 대박을 터트리면서 아이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사실 허벌라이프도 델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아이칸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업이었지만 그가 허벌라이프 투자에 뛰어든 계기가 있었다. 아이칸 회장과 앙숙관계인 헤지펀드 퍼싱스퀘어캐피털매니지먼트를 창업한 빌 애크먼 때문이었다.
애크먼은 지난해 12월 18일 갑자기 30년 이상 비타민 등 건강보조식품과 다이어트 제품을 판매해온 허벌라이프를 ‘피라미드 사기회사’라는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한 뒤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쌓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미국 증권관리위원회(SEC)가 허벌라이프에 대한 조사에 나서 이들의 사기행각이 밝혀지면 허벌라이프 주가가 0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애크먼은 허벌라이프 전체 주식의 20%에 달하는 2000여만주(11억달러)를 공매도(숏셀링)했다. 애크먼의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벼르고 있던 아이칸 회장은 애크먼의 허벌라이프 공매도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곧바로 그는 허벌라이프 조사에 들어갔고 회사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뒤 올 1월부터 주식을 대거 매집하기 시작, 애크먼의 공매도 규모에 육박하는 1696만6485주(16.46%)의 허벌라이프 주식을 사들였다. 이후 애크먼이 공매도를 발표한 지난해 12월 18일 이후 8월 초 현재 허벌라이프 주가는 56% 이상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칸 회장은 5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또 아이칸은 지난 8월 13일 트위터를 통해 애플 지분을 대거 사들인 뒤 팀 쿡 최고경영자(CEO)에게 자사주 추가매입을 권유했다고 밝혔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날 애플 주가는 5% 가까이 급등했다. 냉혹한 기업사냥꾼이라는 좋지 않은 꼬리표가 여전히 따라다니지만 아이칸이 기가 막히게 돈 냄새를 잘 맡는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6호(2013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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