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 보람 있는 도전 하나씩 할 겁니다…석지영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입력 : 2013.08.09 17: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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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버드대 로스쿨 강의실에 유명한 재즈 색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44)이 등장했다. 즉흥연주(Improvisation)의 대가인 그는 미국 재즈가 모던재즈로 회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학생들도 환호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조슈아는 재즈의 자유로움이 십분 발휘되는 연주를 즉석에서 시연했다. 학생들은 면전에서 본인의 리듬과 스타일을 맘껏 뽐내는 그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법적 이슈를 추출하는 듯 했다.

    각종 연주 일정으로 빡빡한 그는 당연히 섭외가 쉽지 않은 당대 최고 재즈 뮤지션이다. 그러나 석지영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40)는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해 그를 초빙했다. 석 교수는 “학생들이 즉흥연주곡의 지식재산권 이슈를 다뤄야 하는데 조슈아처럼 적격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법이 다루는 다양한 분야에서 법의 권위자들은 아니더라도 생생하게 각자 경험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전했다.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지식재산권 분쟁이 잦아지는 추세라 학생들에게 이 주제를 제대로 환기시켜주고 싶었다고 한다.

    수업을 위해서라면 재즈뮤지션도 부른다 ‘하버드대 로스쿨 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 이제 마흔을 넘긴 석지영 교수 뒤에 항상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6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발레리나를 꿈꾸며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다니다가 예일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고 영국 정부가 주는 마셜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한 그는 2006년 한국계 최초로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에 임용됐고 4년 만에 종신교수가 되면서 주목받았다.

    ‘엄친딸’의 대명사로 통할 만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본인이 태어나 잠시 살았던 모국에서 이렇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다소 어리둥절한 듯했다.

    지난 6월 제7회 포니정혁신상 수상을 위해 잠시 방한한 그를 삼성동 하얏트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이 상에서도 최초의 여성이자 최연소 수상자 기록을 새겼다.

    이번 방문에서는 어릴 때 살던 잠실을 지척에 두고 머물렀지만 어릴 적 기억을 더듬을 시간적 여유는 없어 보였다. 부모님도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함께 고국을 찾았다. 그는 “어머니가 수상 통보 이메일을 번역해 주시려고 전화했을 때, 역대 수상자들이 이룬 엄청난 업적을 듣고 과분한 상을 받는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부모님은 한국식 교육법이 내 성정과 잘 맞지 않아서 한국에서 자랐다면 현재 위치까지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데 나도 동의한다”라며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똑같은 성취를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본인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가르치고 싶어 보스턴의 한국인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1979년 본인이 갔던 한인학교 모습과 똑같은 모습에 적잖이 충격 받았다. 똑같은 학교 교재(Work Book)는 물론이고 주입식 교육법마저. 석 교수는 “내 아이들도 뜻도 모르면서 암기하는 교육법을 못 견뎌 한인학교는 그만뒀다”고 말했다. 창조경제가 화두가 되면서 석 교수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융합형 인재 교육법에 관심이 많다.

    석지영 교수는 “한국에서는 특이하다고 보는 이력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가 속한 하버드대 로스쿨에서도 학생의 3분의 2 정도는 법과 전혀 상관없는 배경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세계를 여행했다거나 다른 대륙에서 일해본 사람,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했던 이들이야말로 좁은 시야를 벗어나 다양한 분야에서 벌어지는 법 문제를 풀어갈 ‘리더’감이기 때문이다.

    석 교수 본인도 대학 생활에서 본인의 정신세계(Mind)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에 열정을 쏟으며 보냈다. 모교인 예일대의 경우 순수과학(Hard Science), 언어(Language), 역사나 철학 등 인문학, 경제학 등 사회학(Social Science) 등 4개 분야에서 기초과목을 이수해야만 한다. 그는 순수하게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프랑스문학으로 박사까지 받고 법학대학원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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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동양소녀의 좌절… 완벽함을 포기하고 너 자신이 되라 한참 예민할 때 미국으로 이민 간 동양 소녀는 내성적이고도 예민한 성격 탓에 남들보다 더 큰 공포와 내면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뉴욕 플러싱에 개원했던 의사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이웃의 존경과 관심을 받았고, 큰딸(석 교수)이 의사가 될 것이라 확신했던 부모님 뜻을 저버렸을 때 큰 정체성 혼란이 왔다.

    “당시 난 방향타를 잃고 헤맸다. 모두가 그렇지 않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음에 뭘 해야 할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어떤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어떤 공식(Formula)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종종 ‘내 아이가 당신처럼 크면 좋겠다’고 말하는 교포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석 교수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우리 모두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각자 독자적인 존재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제 불혹(不惑)의 나이에 접어든 석 교수는 불안한 15세, 20대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어릴 적 호된 사춘기를 겪어서인지 이제는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해봐도 본인은 내적인 갈등(Internal Conflicts)을 덜 겪는 편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석 교수는 끊임없이 두려우면서도 불안한 시간들을 넘겨 볼 생각이다. “아침에 일어나 불편하면서도 두렵지만 또 실패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은 그런 무언가를 앞두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40년은 더 살아가야 하는데 매년 하나쯤 새로운 것을 혹은 내가 할 줄 아는 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연마하는 일을 시도해볼 예정이다.” 그는 아직 초기 구상 단계라고 운을 떼면서도 평소 관심이 많았던 영화에 도전하고픈 생각을 털어놓았다.

    “법학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질 만한, 법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 단순히 법학 논문을 쓰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글쓰기도 시도해 보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다.”

    실제 그는 1인칭 시점으로 본인 자서전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A light inside)>을 쓴 경험도 큰 두려움이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고 평했다. “복잡하지만 중요한 법 이슈를 풀어가는 것을 즐기니 (법학교수가) 천직인 것 같다”고 말하는 석 교수는 법학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한국은 미국 제도의 영향을 받아 로스쿨 제도를 출범했으나, 미국 로스쿨은 경제난으로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앞으로 한국의 법학교육과 관련된 비교 연구를 한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싶다”고 밝혔다.

    자녀교육 스스로 배움의 즐거움을 느껴야 1남 1녀를 둔 워킹맘이기도 한 석 교수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본인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쁜 직업을 가지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단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바로 내가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라며 “내 아이들이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항상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엄마로서 많은 시간 함께 하지 못하고 일하는 것을 자책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여러모로 <타이거맘>의 저자인 에이미 추아 예일대 법대 교수와 비교가 되지만, 그는 본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강요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자녀의 교육철학으로 ‘배움의 즐거움’을 제시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적지만 아이들에게 엄마가 공부하는 것을 즐기고 일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거나 박물관에 가서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다. 보스턴의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배우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펜싱’을 배우겠다고 했는데 재미있어하기에 계속 배우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업무 때문에 말하고 글 쓰는 것이 피곤할 때면 다른 종류의 표현법과 소통을 시도한다. 매주 하지는 못하지만 일요일 아침 한 시간가량 피아노를 치는 시간의 자유로움을 즐긴다는 석 교수. 아이들은 엄마가 치는 피아노 주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으며 여유로운 일상의 행복을 만끽한다.

    [이한나 매일경제 사회부 기자 사진 박상선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5호(2013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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