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도 콘텐츠 사업 글로벌 인재 더 많이 키워야 합니다…김수룡 전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

    입력 : 2013.08.09 17: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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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가 훤칠했다. 꼿꼿한 자세로 성큼 걸어 들어오는 품이 세월을 거스른 듯 20여년은 젊어 보였다. 장마철 폭우에 차도 없이 걸어왔다며 감색 우산을 접더니 덥석 내밀어 악수를 나눈 손은 두툼하고 컸다. “아이들이 미국에 있는데 이젠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회사를 나섰어요. 딸이 셋인데 벌써 20~30대예요. 지금이 아니면 함께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근무한다고 했을 때 3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이렇게나 시간이 흘러갔네요.”

    김수룡(62)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 겸 한국대표가 지난 6월 30일 은퇴했다. 2005년 선임된 후 9년 만이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진출한 한국인 1세대인 그는 국내 금융계 인사들에게 ‘월가 사부’로 알려진 글로벌 금융인이다. 급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시간을 내보겠다고 수일을 보낸 김 회장은 “지금도 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고 있다”며 귀한 시간을 허락했다.

    마침 만남이 있던 날엔 서울파이낸셜포럼의 지인들이 마련한 송별회가 열렸다. 김기환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병원 은행협회장, 최운열 서울IB포럼회장 등 10여명의 경제인사가 함께 한 이날, 김 회장은 오랜만에 와인 잔을 들었다. 참석한 지인들이 건넨 “한국 경제를 위해 고생했다”는 위로에 그간의 세월이 한순간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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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희일비는 금물, 호흡은 길게 “은퇴하고 가장 먼저 애들 엄마하고 남해안으로 떠났어요. 그곳 섬의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조개도 줍고, 남해 망운산에 올라 개복숭아를 한 20㎏ 땄습니다. 항아리 8개에 흑설탕으로 재워놨지요. 아마도 3~4년 뒤에는 효소가 될 겁니다.”

    오랜만에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다는 김 회장은 담담했다. 은퇴소회를 묻자 “40여년간 금융산업에 종사하며 대과없이 명예은퇴하게 돼 감사하다”고 별다른 수식 없이 이야기했다. 지난 세월 동안 뉴욕과 홍콩 등 국제 금융계에서 ‘SR 킴’이라 불리며 PF와 M&A 전문가로 일한 그는 국제 금융계의 거목이었다.

    전설의 시작은 한국외환은행. 글로벌 은행과 연을 맺은 건 1978년의 일이다. 당시 미국 4대 은행 중 하나였던 매뉴팩츄러즈하노바은행(현 JP모건체이스 은행)이 한국지점 개설을 앞두고 임직원을 뽑았다. 미국 은행으로의 이직을 결심한 김 회장은 2000쪽이나 되는 ‘American Banker’s Handbook’을 달달 외우며 한 달 전부터 인터뷰를 준비했다고 한다. 면접 당일, 무려 5시간이나 진행된 인터뷰에서 당시 에버렛 영 한국지점장이 그를 다시 본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임직원과의 3:1 인터뷰에서 김 회장이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지점장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부지점장 자리를 달라는 게 그의 조건이었다. 한 단계 낮은 직급에 전 직장에서 받는 연봉보다 15배를 더 주겠다고 했지만 김 회장은 딱 잘라 거절했다. “돈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다. 부지점장을 맡겨 주면 기대 이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 달 뒤, 에버렛 영 지점장은 김 회장에게 부지점장을 제안한다. 글로벌 은행 한국지점 중 28세 최연소 임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영어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겠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땐 영어 잘하려고 40여 편 영화의 대사를 배우별로 성대모사해서 외우고 다녔거든요. 군대도 한미연합1군단 할링스워드 장군의 통역사로 복무했습니다. 덕분에 매뉴팩츄러즈하노바은행 입행시험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입사했지요.”

    입행 당시 자신했던 것처럼 개점 1년 만에 30여개 외국은행 중 자산규모 1위, 순이익 3위를 기록했다. 탁월한 업무능력과 영업실적에 뉴욕 본사 경영진이 주목한 건 당연한 일. 입행 1년 만에 뉴욕 본사로 스카우트된 그는 이후 20여년간 뉴욕과 홍콩 등지에서 인프라스트럭처 파이낸스, 대체투자, M&A 등 분야에서 화려한 이력을 쌓게 된다.

    마지막 경기에 나선 김수룡 회장에게 동료들이 선물한 감사패
    마지막 경기에 나선 김수룡 회장에게 동료들이 선물한 감사패
    어린 시절부터 집중한 야구와 영어, 월가 성공의 원동력 사실 김수룡 회장의 월가 입성에는 탄탄한 체력과 그간 갈고 닦은 영어실력이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당시 K-1 미공군기지(현 김해국제공항)와 불과 30m에 떨어진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전쟁이 나자 부모님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어요. 아버지는 훗날 토건회사를 운영하셨는데, 제가 어릴 땐 K-1 기지에 영화필름을 배달하는 트럭 기사셨지요. 아버지가 근무하신 2년간 미군조종사들에게 야구를 배웠는데, 5살도 안된 제게 글러브와 배트를 사주고 8살 때부터 시합에 뛰게 해주더군요. 얼마나 좋던지, 그땐 배트로 공을 때려서 20m 정도 떨어진 물체 맞히기를 매일 연습했다니까요.(웃음)”

    중고등학생 시절, 키가 훤칠하고 탄탄한 그를 그냥 둘리 만무한 일.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으로 부산상고에 진학한 김 회장은 2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투수로 성장했다. 김응룡, 유백만, 강병철 등 한국야구의 기라성 같은 스타를 배출한 부산상고 야구부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아이러니 하지만 전국영어웅변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뛰어난 영어실력이 그의 야구인생에 짐이 됐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먼저 영어 발음기호를 철저히 외웠습니다. 원어민 수준으로 혀와 입술을 사용하려고 두 달 동안이나 공을 들였어요. 맹렬히 반복했지요. 1학년 때는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의 공부법은 남달랐다. 우선 모든 과목의 교과서나 참고서를 볼 때 처음엔 눈으로만 읽었다. 그리곤 답을 쓸 때 연필로 쓴 후 다시 보기 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답을 달았다. 이런 과정을 반복한 후 오롯이 내 것이 됐다는 확신이 설 때만 볼펜으로 답을 써내려갔다.

    주말이면 카스테라와 사이다를 사들고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한 편의 영화를 3~4번 연속으로 보며 처음엔 자막을, 두 번째부터 자막은 보지 않고 영화대사에만 집중했다.

    “한 영화를 9번 내지 10번씩 보니 영화대사가 거의 다 외워지더군요. 그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대사를 암기하면서 성대모사도 했는데 46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 부분이 기억납니다.(웃음) 잠은 너 댓 시간 밖에 못 잤는데,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피곤할 줄 모르던 때죠.”

    그의 영어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 중 하나. 2006년 3월, 금융감독원과 한국산업은행이 공동주최한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자선의 밤 행사에서 김 회장은 전혀 의외의 장기를 선보였다. 이날 그는 어린 시절 암기하며 성대모사했던 맥아더 장군, 케네디 대통령,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히긴스 교수 등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초청인사 중 유일하게 앙코르를 이끌었다. 야구에 대한 열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2005년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 겸 한국대표로 부임하며 사내 야구팀을 만들었는데, 2008년 11월 KBO가 주최한 전국사회인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팀의 4번 타자로 출전한 김 회장은 준결승과 결승에서 8타수 8안타 7타점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2009년엔 ‘야구를 통해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 활성화에 기여했다’며 독일 본사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다.

    “야구는 수많은 변수를 읽어내 찰나의 순간에 스위트 스팟(Sweet spot; 공이 맞았을 때 가장 멀리 날아가는 부분)을 정확히 때려냅니다. 투구할 땐 타자와의 심리전, 타석에 설 땐 투수와의 심리전에 속고 속이는 묘미가 있어요. 상황파악을 빨리해야 다음 플레이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거든요. 유비무환이죠. 경영과 닮은 구석이 많지 않습니까.(웃음)”

    도이치은행그룹 소속으로 마지막 경기를 치른 지난 6월 22일, 리그에 소속된 250여개 팀 선수 중 유일한 60대였던 김 회장은 마운드에선 2이닝 3실점, 3번 타자로 나선 타석에선 3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팀이 19:11로 승리한 이날, 김 회장은 선수들에게 감사패를 받았다. 부하직원이자 경기장에선 서로 동료로 통하는 선수단은 감사패에 이런 문구를 담았다.

    “귀하께서는 도이치은행그룹 코리아의 회장직을 역임하는 동안 야구 사랑을 통해 직장 내 임직원 간의 화합과 단결을 솔선수범하여 모범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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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근무만으론 글로벌화 안 된다 1979년 매뉴팩츄러즈하노바은행의 뉴욕 본사에서 근무하게 된 김 회장은 한국과 대만 심사부장으로 근무하며 MBA 학위에 도전하게 된다. 당시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은행 측이 사내 최초로 MBA 장학생 발령을 냈다. 수업료와 제반 경비뿐 아니라 월급도 정상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펜실베니아대 와튼경영대학에 합격한 김 회장은 이후 IB 전문가로 활약하며 1990년 49억달러 규모의 아르헨티나 엔텔통신 민영화 프로젝트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그때가 결혼한 지 3년, 큰애가 한살 때였어요. 씨티은행의 김종석 선배, 체이스은행의 프랭크 한 선배까지, 뉴욕 월가에 한국인이 서너 명 밖엔 없었죠. 와튼스쿨 MBA를 취득할 때 아내 고생이 정말 심했습니다. 그 점은 늘 고맙지요. 학위를 취득하곤 은행 회장실의 대체투자요원으로 선발됐습니다. 1980년대 중반 ‘배째라’식으로 외채지급동결을 선언한 중남미, 동구권, 필리핀에 묶여 있던 은행의 대출을 그 나라의 기업과 금융기관의 주식으로 인수하는 ‘대출금출자전환’ 업무를 6년간 수행했는데, 제가 주말 없이 하루 평균 16시간 이상 일했으니…. 그때도 아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정말 내조를 잘해줬습니다. 그 당시 경험으로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이헌재 초대 금감위원장의 특별보좌관으로 위촉 받기도 했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금융맨으로 살아온 그가 어쩔 수 없이 외도하며 선택한 길이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특별보좌관이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그는 한국으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는 미국 최대은행의 한국 책임자였기에 곤혹스러움이 더했다. 그 즈음 1980년대 중남미와 동유럽 국가들의 IMF 위기상황을 체험한 그에게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이런 그의 마음은 후배 사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해외 은행에서 일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계 직원들을 소개하고 발굴했다. 김도진 골드만삭스 코리아 전무와 그의 동생 김도우 전 메릴린치 본사 사장, 미쉘 방(김미경), 박장호, 김태형, 심규원 씨 등 금융인이 김 회장이 1980년대 채용해 훈련시켰던 후배들이다.

    “든든한 후배들이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려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더라도 되도록 건강은 상하지 않았으면 하고 늘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금융계에 대한 김수룡 회장의 생각은 어떠할까. 한국 금융의 글로벌화에 대해 그는 “대한민국 내에서 근무한 임직원들만으론 불가능하다”며 “외국인을 포함해 뉴욕, 런던, 홍콩 등의 글로벌 시장에서 다년간 근무한 프로페셔널을 영입하고 CEO도 그중에서 선임해야 진정한 글로벌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 출범 이후 화두로 떠오른 창조경제에 대해선 미국과 독일식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미국이나 독일식 창업 활성화 생태계와 콘텐츠 사업화에 주력하는 창조경제가 옳은 방향입니다. 현재의 제조업만으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어렵습니다. 금융산업도 콘텐츠 사업 아닙니까.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더 큰 규제 완화가 필요합니다.”

    김 회장은 진정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선행돼야 할 조건에 대해선 “금융, 관광, 의료, 물류 서비스 산업의 글로벌화를 통해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많이 창출해야 한다”며 “국민의식이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선진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후 김수룡 회장은 7월 30일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당분간 가족과 함께 지낼 예정이다.

    한국 경제를 위해 매진한 월가 1세대 1998년 금감위원장 특별보좌관이 된 그는 국내 은행의 기업 워크아웃 방안을 수립하며 60대 그룹 구조조정 자문사 선정, 대출금출자전화업무편람 작성, 선도은행 육성 방안과 육성 실행계획 수립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1998년 8월, 주가지수가 280까지 대폭락했을 땐 정부 3개 부처가 합동으로 작업한 ‘한국경제 구조조정에 대한 중간보고 및 향후 실천방향’에 대한 국가 IR 설명자료 작업을 주도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하반기 김 회장은 3주간 세계 12대 금융시장에서 금감위를 대표해 월스트리트 방식의 국가홍보 로드쇼를 진행한다. 그 기간 중 주가와 외평채 가산금리가 극적으로 호전됐고, 주가는 서너 달 후 1100으로 치솟았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 대통령자문 외국인투자유치위원장(장관급)이 된 그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전략적 외국인 투자유치에 전력을 다했다. 2008년 초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한국 경제의 보석 같은 존재로 활약했다.

    김수룡 전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 겸 한국대표 1951년 경남 김해에서 출생했다. 부산상고를 거쳐 동아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외환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1978년 매뉴팩츄러즈하노바은행 뉴욕본사 한국·대만 심사부장, 1986년 매뉴팩츄러즈하노바은행 회장실 대체투자부장, 1992년 미국 케미칼은행그룹 케미칼증권아시아(홍콩) IB본부장, 1995년 체이스맨해튼은행 한국본부장 겸 PF 한국대표,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자문관, 1999년 메리디엔파트너즈 회장 겸 한국 컨설팅협회 회장, 2003년 재정경제부 경제자유구역 심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미그앨리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2005년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 겸 한국대표에 선임된 후 지난 6월 말 은퇴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5호(2013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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