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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악몽 딛고 지극정성 준비…EU 식구가 된 크로아티아
입력 : 2013.08.09 17: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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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가입을 위한 지극정성 크로아티아는 동유럽 공산정부가 붕괴한 직후인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탈퇴하면서 4년간 세르비아 등과 내전을 치렀다. 이후 2001년 EU 가입 전 단계인 ‘안정제휴협정’을 체결하며 EU 가입 조건을 차곡차곡 이행했다. EU가 가입 전제조건으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와 협력할 것을 주문하자 크로아티아는 2005년 스페인 경찰과 협력해 안테 고토비나 장군을 체포해 ICTY에 인도했다.
이웃한 슬로베니아와 국경선을 확정했고, 이탈리아와 토지 소유권 문제도 완결해 EU가 제시한 전제 조건을 차근차근 이행했다.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을 계기로 국론 분열의 소지가 컸던 과거청산 문제도 말끔하게 매듭짓는 성과를 거뒀다.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을 앞두고 올해 초 농수산물과 식품 안전기준을 한층 강화했다. EU 회원국이 되면 더 엄격한 EU 낙농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등 주변국의 낙농업체들은 크로아티아 수출품의 높아진 안전기준을 맞추느라 곤욕을 치렀다. 또한 EU 회원국으로서 크로아티아는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을 ‘EU 기준’에 맞도록 구조를 개편했다. 일례로 양계 농가는 EU가 정한 닭 한 마리당 바닥 최소 면적(최소 750㎠)으로 조정하고 쓰레기 재활용 시설도 설치했다.
(위)EU 28번째 회원국이 된 크로아티아, (아래)크로아티아 대통령 이보 요시포비치(오른쪽)
크로아티아가 특히 기대하는 것은 EU가 회원국에 주는 기금이다. 크로아티아는 2020년까지 140억유로의 기금을 받을 수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2.5%에 해당한다.
실업률이 21%에 달하고 5년 연속 경기침체에 빠져 외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인 크로아티아로서는 EU 기금이 경제 회생의 한 가닥 희망인 셈이다. 2004년 EU에 가입한 폴란드와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은 EU 기금을 바탕으로 상당 기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EU에 가입한 7월 1일 발칸 반도의 안정을 이끌어나가는 국가가 되겠다고 밝혔다. 크로아티아를 포함해 옛 유고연방 7개국 정상들은 1일 자그레브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나 앞으로 이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주관한 이 회동에는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 옛 유고연방에 속했던 7개국 정상과 알바니아 대통령이 참석했다.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이웃 국가들이 속히 EU 회원국이 되길 바란다”며 “앞으로 계속 만나 협력 강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의 EU 회원 가입은 옛 유고연방 동료국가인 세르비아와 코소보, 보스니아 등의 EU 가입을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EU 역시 발칸반도까지 범위를 확대해 유럽 대륙에 평화와 안정을 뿌리내리고 경제 공동체로 번영을 구가하는 효과를 거둘 것을 바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EU로서는 수상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플라에 있는 관광리조트
타임은 “500만명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나라가 EU의 거대한 부채위기에 휘말릴 수도 있다”며 “EU는 이미 세계무대에서 병자로 전락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EU 회원국이 누리던 번영과 화합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는 이미 옛날 얘기라는 것이다.
파울 스투브 자그레브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유럽의 경제가 좋지 않은 시점에 크로아티아가 가입한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며 “물가는 오르고 경쟁은 더 심해질 수 있으며, 외국인 투자가 하루아침에 급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크로아티아 국민들도 EU 가입을 모두 기뻐하진 않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최근 실시한 크로아티아의 EU 회원국 가입 관련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9%만이 EU 가입을 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 크로아티아 시민은 EU 회원국 가입을 두고 “파티에 늦게 등장한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 인접국이자 EU 회원국인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곧 지옥에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고 농담을 던진다며 AFP통신이 보도하기도 했다. 가장 큰 불안요소는 실업률이다. 크로아티아 실업률은 20%에 육박하지만 EU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혹독한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4~2015년 크로아티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5.6%로 EU 기준인 3%를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EU 가입 후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크로아티아 기업들이 줄도산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도이체방크도 최근 보고서에서 크로아티아의 EU 가입이 중장기적으로는 크로아티아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쟁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2월 크로아티아 경제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크로아티아의 국가 신용등급을 기존 Baa3에서 Ba1으로 하향조정했다.
전문가들은 크로아티아의 이번 EU 가입이 향후 EU와 유럽 국가들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제분쟁 분석 전문 기관인 국제위기그룹(ICG)의 발칸 부문 국장 마르코 프렐렉은 “크로아티아가 앞으로 있을 회원국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만약 크로아티아가 EU의 문제아로 전락한다면 다음 회원국 확장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U의 다음 가입국은 크로아티아가 EU 회원국이 되면서 EU 가입을 타진하는 국가들의 향방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크로아티아에 이어 차기 회원국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터키와 아이슬란드, 세르비아가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지난 1987년 가입 신청을 한 터키는 독일이 반대해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독일 등 EU 주요 국가들은 터키의 1974년 키프로스 침공을 문제 삼고 있다. 게다가 최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터키 정부의 반정부 시위 강압진압을 문제 삼으며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업국가인 아이슬란드는 어획량 등을 둘러싼 어업협정 체결이 EU 가입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또 무엇보다 아이슬란드 국민이 EU 가입에 적극적이지 않다. 올해 초 집권한 중도우파 연립정부는 EU 가입 협상을 진행하기에 앞서 EU 가입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론을 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EU 가입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는 세르비아다. 세르비아는 EU 가입 협상을 내년부터 시작한다. EU 가입으로 국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고, 내전 탓에 아직도 위험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털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인종 청소’라는 참혹한 내전을 치른 코소보와 합의한 관계 정상화를 제대로 이행할지 여부다.
[김덕식 매일경제 국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5호(2013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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