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간 특별 인터뷰]21세기 미의 패러다임은 ‘아시안 뷰티’죠…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입력 : 2012.10.05 17: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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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동백기름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돕던 아버지는 화장품 제조와 사업 노하우를 밑천 삼아 회사를 세웠다. 부엌에서 기름을 짜던 할머니의 가내수공업은 그렇게 번듯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는 30대 중반에 아버지가 일군 회사(태평양·옛 아모레퍼시픽)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업계에선 이르다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강했다. 할머니의 부엌이 아버지의 기업으로 변신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면 아들은 기업을 맡은 지 12년 만에 아버지의 터전을 네 배나 늘렸다. 사실 서 대표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1997년은 “국산 브랜드는 이제 설 곳이 없다”는 말이 돌 만큼 어려운 시기였다. 그만큼 해외 유명 브랜드의 국내시장 공략이 매서웠다. 게다가 증권, 건설, 의류 부문까지 얽히고설킨 사업 다각화로 회사는 숨이 말랐다. 살을 깎는 구조조정을 거친 서 대표는 오로지 한 우물만 파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곤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내달렸다. 말랐던 숨에 핏기가 돌고 가쁘게 차오를 즈음, 서 대표는 국내 시장에서 해외로 눈을 돌린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프랑스에 진출했을 땐 실패를 인정하고 철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밀레니엄을 지나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서 대표가 이끄는 아모레퍼시픽은 국내 화장품 시장 점유율 40%를 넘나들며 꾸준히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최근 3년 간은 그룹 매출이 두 배나 뛰었다. 홍콩과 중국 등지의 해외 매출도 지난해 3272억원을 올리며 전년(2667억원) 대비 23%나 늘었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시장에서도 글로벌 대표브랜드 ‘아모레퍼시픽’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과연 그 내공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좀처럼 인터뷰에 응하지 않던 서경배 대표에게 <LUXMEN>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한 가지 질문에 여러 단어로 세심하게 답했다. 어떠한 질문에도 ‘아모레퍼시픽’이란 단어를 놓지 않았다. 지난 9월 5일 창립 67주년 기념식에서 “2020년까지 매출 11조원, 세계 7위 화장품 기업으로 도약하겠다”고 밝힌 ‘2020 Global Top 7 뷰티기업’ 비전을 이야기할 땐 확실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아모레퍼시픽의 성장세가 화두다. 경기불황에도 역대 최대 매출을 올린 원동력이 궁금하다. 불황은 난관이 되기도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경쟁의 틀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철저히 준비하면 새로운 틀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을 수 있다. 혁신의 DNA가 큰 역할을 했다. 아모레퍼시픽의 67년은 대한민국 장업계의 역사 아닌가. 리딩 기업으로 늘 최초와 최고를 추구했고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의 틀을 바꾸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러한 시도가 제품의 혁신, 기술의 혁신, 서비스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또 하나, 모든 문제의 답은 고객에게 있다는 믿음을 꼽을 수 있는데, 고객 중심적 사고에서 바라보려는 시각이 고객과 소통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물론 쉽지 않지.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990년대만 해도 여러 화장품 브랜드가 경쟁관계에 있었다. 불과 20여년 사이에 독보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성장 시기와 계기를 꼽는다면. 대다수 기업이 IMF 경제위기가 닥친 뒤에야 구조조정을 서둘렀던 반면, 우린 1990년대 초반에 단행했다. 고객 중심의 미와 건강을 추구하는 회사로 핵심 역량을 집중하고 체질을 강화했다. 그 덕에 어려웠던 시기가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됐다. 돌이켜보면 위기와 시련도 많은 시기였는데… 한발 앞선 준비가 국내 1위로 돌아왔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67년간 단 한 번도 국내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글로벌 명품 전략도 실현되고 있는데, 특히 해외사업부문이 회자되고 있다. 해외 진출 당시 어려움도 많았 을 텐데. 1960년대부터 해외 진출을 전개했는데, 직접 진출은 1991년 ‘순SOON(국내명 ‘순정’)’의 프랑스 진출이 처음이다. 현지 시장이나 고객에 대한 충분한 사전 조사 없이 프랑스 샤르트르지방에 매입해둔 공장에서 생산하고 약국에서 팔았다. 정말 막연히 접근했지.(웃음) 진출 첫해에 약국에 입점시켰는데 시간이 지나도 매출이 오르지 않더라고. 직접 현장에 가서 살펴보니 제품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거야.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화장품 강대국인 프랑스 시장에 나이브하게 진출했으니, 그러곤 제품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그때 느낀 게 ‘세상의 고객은 모두 다르다’는 것인데,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시장과 고객에 대해 알 수 없는 법 아닌가. 난 종종 ‘80%는 고객을 보고 15%는 경쟁자를 보고 5%는 지나온 과거를 보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 시기 이후 어떻게 하면 고객의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먼저 고민하고 있다.

    해외시장 공략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우리 기업의 소명이자 존재 이유인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Asian Beauty Creator)’에서 키워드를 찾을 수 있다. 우린 ‘아시안 뷰티’야말로 21세기 전 세계 미의 패러다임을 선도할 ‘새로운 뷰티’라고 확신한다. 아시아인의 눈과 마음으로 아시아가 지닌 아름다움의 가치를 창조하고, 아시안 뷰티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미를 제공하는 기업이 되고자 한다.

    2020년 아시아 1위, 세계 7대 화장품 회사가 우리의 목표다 내년에 상하이 생산·연구기지가 완공될 예정이다. 중국 사업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국 사업은 2007년에 흑자로 전환됐다. 매년 35% 이상 성장하면서 이미 아시아의 핵심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가 중국 사업의 ‘태동기’였다면 상하이법인으로 이전해 ‘라네즈’ ‘마몽드’를 론칭하고 수익구조가 안정된 지난 10년은 정착기였다. 2011년을 기점으로 앞으로의 10년은 고속 성장기가 되지 않을까. 지난해 ‘설화수’를 중국에 론칭했는데 현재 주요 도시 최고급 백화점에서만 10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올 5월에는 ‘이니스프리’가 상하이 난징시루(南京西路)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고, 백화점 2곳에 추가 입점했다. 아직 우리가 갖고 있는 20여개 브랜드 중 중국에 론칭한 게 4~5개에 불과하다. 성장 기회는 무궁무진하다.

    중국 공략의 비결이 궁금하다. 비밀인데.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우선 시장에 최적화된 브랜드 마케팅이 필요하다. 중국 시장에는 우리 말고도 3000여개의 화장품 브랜드가 있거든. 매일 수많은 브랜드가 태어나고 잊어진다. 고객의 마음에 자리 잡으려면 브랜드를 구축하는 게 최우선이다. 두 번째는 연구개발(R&D)이다. 아모레퍼시픽 상하이 현지법인이 상하이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베이징대, 푸단대, 쓰촨대 병원 피부과와 공동연구를 진행해 중국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인재 발굴과 육성, 유지다. 중국 시장의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인력이 절실하거든. 한국 본사 인력 외에 대부분은 현지에서 발굴해 육성하고 사업비전을 실현해 갈 계획이다.

    중국 외에 아시아 각국 소비자가 선호하는 브랜드가 다를 법하다. 각국 소비자에게 특화된 마케팅 전략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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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사업은 아시아가 중심이 된 성장시장과 미국, 유럽 등지의 선진시장으로 구분해 전개하고 있다. 성장시장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중국은 수익성 확보를 위해 ‘설화수’ ‘리리코스’ 등 럭셔리 브랜드와 ‘라네즈’ ‘마몽드’ ‘이니스프리’ 등 프리미엄 브랜드로 멀티 브랜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성장시장과 선진시장의 전략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선진시장에선 수익성 기반 안정과 학습을 통한 노하우를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주 시장은 글로벌 대표브랜드 ‘아모레퍼시픽’을 중심으로 사업이 전개되고 있고 ‘설화수’를 뉴욕 최고급 백화점이라 불리는 버그도프굿맨에 입점시켰다. 유럽본부에서 현지화 전략으로 탄생한 향수 브랜드 ‘롤리타 렘피카(Lolita Lempicka)’는 향취와 용기 디자인이 인기를 끌면서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110여개 국가에서 판매됐다. 현재는 성장시장과 선진시장 외에 남미와 중동처럼 ‘포스트 성장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 대한 비중이 그 어느 해보다 높다. 아모레퍼시픽은 ‘2020 Global Top 7 뷰티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앞으로 연 매출 5000억원이 넘는 글로벌 뷰티 브랜드 10개를 육성하고 (2011년 기준)3조9000억원인 아모레퍼시픽그룹 매출을 2020년까지 11조원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글로벌 시장점유율 3.8%의 세계 7대 화장품 회사, 아시아 1위 화장품 회사가 우리의 목표다.

    직원이 행복해야 최고의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 해외사업에 비해 국내사업은 소폭 성장했다. 방판 등 유통부분에 대한 강화가 예상되는데 어떤가.
    美 소호 아모레퍼시픽 뷰티갤러리 앤 스파
    美 소호 아모레퍼시픽 뷰티갤러리 앤 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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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화수 베이징 신광천지 백화점 매장
    설화수 베이징 신광천지 백화점 매장
    올해는 여느 해보다 구매에서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에뛰드’ ‘이니스프리’ 등의 브랜드숍이나 ‘려(呂)’ ‘해피바스’ 등 매스코스메틱 브랜드는 두 자릿수 성장을 했는데, 상대적으로 정체된 브랜드나 유통 경로가 있는 게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이러한 현상을 파악하고 고민하고 있다. 올가을에 출시될 신제품에 변화 요소들을 반영하기도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소비자들의 구매 행태를 캐치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너뷰티 시장을 두고 화장품업계와 식품업계의 기 싸움이 팽팽하다. 향후 이 시장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아모레퍼시픽의 대응은.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이건 아모레퍼시픽 임직원들이 항상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바르는 화장품만 화장품인가. 그건 획일적인 생각이고, 다양한 형태의 화장품을 개발하려고 노력 중이다. ‘영양 밸런스를 통한 건강함’이야말로 피부 건강과 직결되는 아름다움의 기본 아닌가. 아모레퍼시픽은 ‘비비프로그램(V=B Program)’으로 대표되는 이너뷰티 제품으로 국내시장에 ‘먹는 화장품’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1979년부터 이미 제주 설록다원에서 직접 녹차를 재배해 효능을 연구했고, 뷰티푸드연구소를 설립해 이너뷰티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했다. 건강기능식품 사업은 매년 10~20%씩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 향수브랜드 ‘아닉구딸(Annick Goutal)’을 인수했다. 새로운 M&A가 기대되는데. 우린 늘 M&A에 대해 열려있다. M&A가 ‘2020년 Global Top 7 뷰티기업’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단순한 외형 확대보다 중요한 건 기존 브랜드와의 시너지와 회사 성장에 유기적인 기여다. ‘아닉구딸’은 프랑스 니치(Niche) 향수의 대명사라 불리는데 럭셔리 향수의 수요 증가와 우리 포트폴리오와의 시너지 등을 고려해 M&A가 진행됐다.

    지난 5월에는 경기도 오산에 ‘아모레퍼시픽 뷰티사업장’을 준공했다. 축구장 30배 면적 에 세계 최고 수준인데,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하고 있나. 총 3400억원이 투자됐다. 이곳은 가장 좋은 원료로 최상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세계의 부엌’이다. 원료의 입고부터 제품 출하까지 최상의 품질을 유지하기 때문에 빠르게 변화하는 고객의 요구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최첨단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물류센터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 제품을 공급하는 글로벌 허브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 하나, 아모레원료식물원과 그린갤러리를 설치해 고객에게 개방할 계획이다.

    사업장 내부가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던데. 사업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과 스위스다. 다녀 보니 미술관 같은 사업장이 많더라고. 두 나라 모두 1인당 GDP가 4만 달러 이상인데,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을 중점 육성한 게 비결이다.

    직원들을 중시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사업공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도 애쓰고 있었다. 우리도 임직원이 행복해야 최고의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건물 내부 어디에나 자연 채광을 느낄 수 있게 했고 사계절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내부에 정원을 만들었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뷰티사업장 로비에 백남준 씨의 ‘거북선’이 전시됐는데,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개설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전 세계에 알리고 동시에 동양과 서양, 과학과 미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세계와 소통하려는 열린 사고가 투영됐지. 우리도 고유한 아름다움, 아시아의 미를 세계에 알리고 최고의 제품으로 전 세계 고객들과 소통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최근 LG생활건강과 브랜드와 사업범위가 비교되곤 한다. 어떤가. 서로의 장단점을 꼽는다면. 중요한 건 고객의 마음이지 특정기업과의 비교는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아모레퍼시픽은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전 세계 고객들을 기쁘게 해 보자’라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사업 다각화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회사마다 방향성이 있겠지만 우린 주력 사업과 관련된 연구개발, 브랜드 관리,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앞으로도 일관된 방향이다.

    상품을 넘어 예술이 돼야 명품이다 최근 트렌드 중 하나가 한류다. 아모레퍼시픽의 사업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美 소호 아모레퍼시픽 뷰티갤러리
    美 소호 아모레퍼시픽 뷰티갤러리
    한류는 해외 출장에 나설 때마다 종종 실감한다. 해외에서 TV를 보면 어찌나 한국드라마가 많이 방영되던지. 등장인물의 뷰티나 패션을 따라하는 현지인들도 많더라고. 패션과 뷰티는 언뜻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화장품은 감성상품이기 때문에 제품의 용기 디자인부터 마케팅활동까지 패션분야와 교류하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거든. 가령 우리 헤어브랜드 ‘려’의 용기 디자인은 패션디자이너 정구호 씨와 협업했다.

    흔히 말하는 명품의 기준을 꼽는다면. 상품을 넘어 예술이 돼야 명품이다. 그렇게 되려면 명장(名匠)의 기술을 기반으로 최고의 가치와 최초를 지향하는 브랜드의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인정받고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진정한 명품 브랜드가 탄생한다.

    한국판 명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범위를 좁혀 한국판 명품 화장품의 기준은 무엇인가. 아까도 말했지만 아시안 뷰티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많은 중심에서 밀려났던 아시아가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우리 ‘설화수’가 뉴요커들에게 사랑받는 걸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아시안 뷰티가 전 세계의 패러다임을 선도할 거라고 확신한다.

    기업은 축구공 위에 서 있는 선수다 개인사가 궁금하다. 할머니 윤독정 여사와 아버지 서성환 회장과의 특별한 추억이 있을 텐데. 개인사라… 우리 가문은 황해도에서 수백년간 살다가 개성에 정착했다. 1932년에 할머니께서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셨고.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이신 아버지(서성환 회장)께선 어려서부터 할머니를 도와 자연스럽게 화장품 제조와 사업 노하우를 배우셨지. 그 가르침으로 1945년에 회사를 창립하셨다. 아버님께 전해 듣기론 할머니께서 동백기름을 정제하고 동백꽃잎을 이용해 매염제를 생산할 만큼 기술이 좋으셨다더라고. 아버지도 우리 식물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지. 1970년대부터 여러 식물 원료를 직접 재배하셨는데, 특히 녹차는 그 당시 황무지를 개간해 재배했다. 그때 임원들도 그랬고 나 또한 녹차사업을 그만두시라고 말씀드렸는데… 30년간 고생은 하겠지만 가치 있고 유익한 것이 될 거라고 손에서 놓지 않으시더라고. 지금 아모레퍼시픽 화장품의 가장 핵심 원료가 녹차다. 녹차를 화장품 원료로 사용한 세계 최초 기업이 아모레퍼시픽이다.

    선대 회장께 물려받은 경영철학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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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성환 회장님은 신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셨다. 고객과의 약속, 거래처와의 약속, 직원과의 약속… 늘 ‘남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차별화된 경쟁력을 강조하셨다. ‘서경배의 리더십’ 또한 경영학도들의 화두 중 하나다. 스스로 어떤 스타일의 경영자라고 생각하나. 난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내서 현장과 거래처, 파트너를 찾아간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경영자 상은… 구성원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하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늘 고민한다.(웃음)

    한 달에 3분의 1은 해외, 3분의 1은 현장으로 출근한다던데. 현장경영을 중시하는 특별한 이유라면. 상하이, 뉴욕, 파리, 도쿄, 홍콩을 비롯해 아모레퍼시픽이 진출한 글로벌 거점은 물론이고 국내 지역사업부도 자주 방문한다. 현장은 고객과 직접 만나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자 기회다. 해외출장의 경우 가능한 한 많은 매장을 방문하거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고객과 브랜드가 만나는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시장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땐 어떤가. 홀로 고민하는 스타일인가. 내 의사결정의 원칙은 참여형이다. 누구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나 역시 충분히 듣고 판단한다. 사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채널 ‘AP人’ 등을 통해 임직원들과 생각을 주고받기도 하고 개선안에 대한 토론 과정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대학생과 직장인들의 멘토로 늘 이름이 오르내린다. 어떤가. 스스로 멘토가 있을 텐데. 아버지. 나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서 사업을 시작하셨거든. 그래서 힘든 순간이면 ‘회장님은 어떻게 했을까’ 자문해 본다. 내 애장품 1호는 아버지의 여권인데, 30대 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생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문제의 해답이 나오곤 한다. 여권을 보면 1960년대 프랑스에 가려고 프로펠러 비행기로 6개국을 거친 흔적이 남아있다. 어휴.

    트렌드에 민감한 경영자인데, 주로 어떤 방식으로 접하고 있나. 기업이란 축구공 위에 서 있는 선수와 같다. 축구선수가 공의 움직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거든. 기업도 고객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만다. 그래서 마케팅부문 산하에 국내외 시장과 고객 트렌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담당부서들을 운영 중이다. 개인적으론 독서와 여행, 간단한 것 같지만 내겐 세계 화장품산업의 조류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활동이다. 책에서 얻은 지혜를 경영에 반영하고 여행 중에 세계 각국의 매장에 들러 글로벌 트렌드를 살피곤 하니까.

    바쁜 와중에 책 읽는 짬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경영자가 되기 위한 리더는 평생 배우는 것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서 출장 중 이동할 때 짬짬이 책을 집어 든다. 좋은 책의 내용은 직원들과 나누려고 반드시 기록하는데,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밖에 없다.

    직장인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라면. 에이드리언 슬라이워츠키(Adrian J Slywotzky)의 <디맨드(Demand)>. 이 책은 혁신적으로 수요를 창출해온 기업의 사례를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위대한 기업들은 불황 속에서도 기업이 예측하는 고객의 니즈와 실제 니즈 간에 간극을 좁혀 늘 새로운 수요를 창조해왔거든. 최근의 불황도 결국 디맨드를 창출한다면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아모레퍼시픽은 10년 전부터 사내에 ‘~님’이란 호칭을 도입했다. 직원들이 어떻게 호칭하고 있나. 2002년부터 모든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물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지. 신입사원도 ‘사장님’이 아니라 ‘서경배 님’ 한다. 즐겁고 창의력 넘치는 일터에 가장 큰 걸림돌이 권위주의 아닌가. 호칭은 평등한 조직문화 마련에 첫걸음이다.

    성공? 삶을 돌아보기엔 아직 젊지 않나? 여름 지나 가을로 접어든 시점인데, 여름휴가는. 휴가? 해외 출장이 많아서 아직. 우린 연중휴가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날이 선선해지면 가족과 떠날 생각이다.

    직장일로 바쁜 남편, 아빠는 정작 집에서 인기 없는 가장이라던데, 어떤가. 항상 바쁘다 보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 아쉽지. 그래도 함께 있을 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인생 조언도 해주는 편한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딸이 둘인데, 늘 스스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라고 얘기한다. 또 남과 잘 지내는 것, 세상의 기준을 잘 지키는 것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책도 많이 읽고 형식에 매달리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라고도 하고. 특별한 건 없네, 평범하다.

    두 딸에게 바라는 것도 있을 텐데. 행복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고 넓은 시야를 가진 인물로 성장하길 바란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에서 ‘어른들은 사물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는데, 난 내 아이들이 이런 어른으로 자라길 원치 않는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진리를 찾는 어른이 되길 희망한다. 어록이 떠오를 만큼 좋은 말들이 많은데, 정작 언론과 인터뷰 안 하는 경영자로 유명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하지 않은 건 아니고. 경영에 내실을 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 갖춰졌을 때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뿐이다. 향후 몇 년간은 ‘2020 Global Top 7’ 비전 달성이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앞으로는 좀 더 많은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늘 매끈한 피부가 화제가 되곤 한다. 비결이 뭔가. 우리 회사 제품을 골고루 사용한다. 한 가지 브랜드만 쓰면 다른 브랜드 담당이 서운해하니. 개인적으로 건강한 피부의 기본은 클렌징이다. 그래서 저녁엔 폼 클렌저를 쓰고 아침에는 순한 버블 클렌저를 쓴다. 코에 노폐물이 많은 날엔 먼저 클렌징 오일로 닦아낸 뒤 폼 클렌저를 사용한다.

    아, 외출할 때 자외선차단제는 필수다. 대부분의 노화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게 빛에 의한 노화거든. 깨끗이 제대로 씻고 자외선 차단제를 사용하는 게 내 비결이다.

    최근 2020년 아모레퍼시픽의 비전을 공개했다. 비전 실현 후 계획도 있을 텐데. 개인적인 계획은 무엇인가. ‘2020년 글로벌 Top 7 뷰티기업’은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로서 기업 소명을 이루기 위한 최종 목적지의 경유지에 불과하다. 전 세계인에게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로 기억되는 게 아모레퍼시픽의 갈 길이다. 더불어 글로벌 화장품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의 진출 기회와 입지가 확대될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도 하고 싶다. 내 계획? 그건 기업의 성공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 아닌가. 기업의 비전 달성이 내겐 가장 큰 계획이다.

    어떤가. 돌아보면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내 삶을 돌아보기엔 너무 젊은 것 아닌가. 그저, 1년이 366일이어도 부족할 만큼 쉼 없이, 즐겁게 일해왔다. 난 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바다로 나서기 위한 여정에 이제 샘과 내를 지나 강에 도착했다. 마음이… 바쁘다.

    축구장 30배, 경기도 오산 아모레퍼시픽 뷰티사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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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레퍼시픽은 지난 5월, 연매출 5000억원이 넘는 글로벌 브랜드 10개를 육성해 2020년까지 매출을 11조원으로 성장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같은 비전의 발판이자 동력은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아모레퍼시픽 뷰티사업장’이다. 축구장 30배에 달하는 22만4000㎡의 대지에 건축면적만 8만9000㎡에 달하는 이 공간은 연 1만5000t의 제조와 1500만 박스의 출하 능력을 갖췄다. 또한 유틸리티센터를 비롯해 스킨케어센터, 메이크업센터, 테스트프로덕트(PT)센터, 물류센터, 지원센터가 자리했다. 1973년 설립된 수원의 스킨케어사업장과 1990년 설립된 김천의 메이크업사업장, 각 지역에 자리한 5개의 물류센터를 한 곳에 통합한 생산기지다. 최첨단 기술도 볼거리. 우선 대량 고속 생산이 가능한 자동화 라인과 다품종 소량 생산에 필요한 멀티 셀 라인을 동시에 갖췄다.

    또 균일한 품질 관리를 위해 레시피 컨트롤 시스템(Recipe Control System)과 고객 불만을 낮추기 위한 풀 프루프 시스템(Fool Proof System)을 적용했다. 서 대표는 “뷰티사업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출발점”이라며 “아시안 뷰티의 요람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발생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아모레퍼시픽]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창간 제25호(201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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