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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⑨ Pieta
입력 : 2012.10.05 17: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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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리스와 이시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가 등장하면서 이시스 숭배가 이집트 전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문화와 그리스 헬레니즘을 하나로 엮을 종교제의를 찾았다. 프톨레미 소테르왕은 이시스 신앙을 그리스-로마사회에 접목시킨다. 오시리스는 ‘세라피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하데스로, 이시스는 그리스의 데메테르와 아프로디테로 동일시됐다. 이시스, 오시리스, 그리고 호루스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 명의 거룩한 세 신들’ Holy Trinity로 신앙의 대상이 됐다.
이 세 명의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은 바로 이시스이다. 이시스는 재생의 신이자 가난하고 병든 자의 신으로 자리 잡는다. 이시스가 처녀 잉태한 호루스를 젖 먹이는 동상은 이시스 신앙이 로마제국 안에 퍼지면서 가장 익숙한 종교 아이콘이 됐다. 특히 기원후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오시리스-이시스-호루스의 관계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형성에, 이시스의 호루스 처녀 잉태는 예수의 탄생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피에타’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에 대한 세 가지 예술적인 표현들 중 하나였다. 다른 두 가지 표현은 ‘마테르 돌로로사(슬픔의 어머니)’와 ‘스타바트 마테르(어머니가 여기 서있다)’이다. ‘피에타’는 독일에서 1300년경부터 ‘베스페르빌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베스페르빌트’란 저녁 예배시간에 사용되는 그림이나 조각을 의미한다. 이 예술품을 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의 찢겨진 몸을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 애도한다. 이전의 유사한 이집트 이시스-호루스 동상이나 초기 그리스도교 마리아-아기예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들이 있다. 이전의 조각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피에타’의 예수는 죽은 모습으로 절망과 슬픔을 묘사한다.
‘피에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킨 최고의 조각가는 미켈란젤로이다. 이탈리아 카프레세에서 1475년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12세에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나 1년 후 회화를 그만두고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예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던 메디치가의 로렌조 집안에서 기거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가 23세가 되던 해 로마에 파견된 프랑스 추기경이었던 장 빌에르 드 라그롤라는 그의 무덤에 배치할 조각품을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한다. 그는 거의 2년 동안 커다란 대리석판을 자르고, 갈고, 광을 내 이전 북유럽 스타일과 다른 ‘피에타’를 조각한다. 북유럽 조각가들은 과장된 몸짓, 상처, 표현으로 슬픔을 표현하려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마리아는 순결한 여인으로 똑바로 앉아 예수를 그녀의 무릎 위에 안고 있다. 여기에는 과장이 없고 예수의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몸에서는 죽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탄력이 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깨우면 금방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이다.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과 몸짓은 영광스러운 자기희생의 미션을 마친 아들을 위로한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동정녀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젊은 여인으로 묘사한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인 ‘피에타’는 동서고금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생산된 인간이 갈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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