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해 만드는 샘플 옷만 30만장이 넘죠…한세예스24홀딩스 김동녕 회장

    입력 : 2012.07.09 16:44:08

  • 사진설명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한세실업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 회사는 ‘미국인 3명 중 1명은 한세 옷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2억장이 넘는 옷을 수출했고 현재 미국 인구가 3억1380만명이니 미국인 세 사람 중 두명이 한세의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게 사실은 보다 정확하다. 예스24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국내엔 꽤 많다. 최근 수년 내 한권이라도 책을 샀거나 영화나 공연 티켓을 샀다면 이 회사 사이트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을 만큼 예스24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터넷 서점이다. 맨손으로 시작해 전혀 상이한 영역의 두 회사를 모두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키운 비결을 듣고 싶어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을 찾았다. 베트남 출장을 마치고 막 돌아온 김 회장은 “요즘은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반 조금 안 될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그는 현장을 뛰는 글로벌 CEO다.

    먼저 창업 스토리부터 물었다.

    “MBA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972년 창업했다. 꼭 40년 전이다. 수출과 섬유업종 중심으로 창업 붐이 일었고 정부가 적극 지원할 때였다. 수출금융 지원이 컸고 ‘수출입국’이란 말도 있었다. 당시 남대문 전광판에 매일 수출 실적을 게시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정부는 특히 기업들의 자존심을 적절히 활용했다. 매년 수출허가를 갱신해주면서 서열을 매겼다. 대우가 1등하고 삼성이 2등할 때도 있었다. 그룹들을 격려하는 한편으로 경쟁을 시키며 수출을 독려했다. 대기업들은 순위 때문에 수출실적을 사려고 작은 기업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이 정책이 북한과 우리를 갈랐다. 북한은 안에서 하자고 했고 우리는 수출을 통해 경제를 키우자고 했는데 우리 전략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수출 붐을 타고 창업 붐이 일 때 김 회장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28살 때였으니 거칠 게 없었다. 게다가 세계 제일의 MBA로 꼽히는 와튼스쿨을 나온 그였다.

    “무역회사를 만들어 남의 공예품을 받아 팔아주기 시작했다. 당시는 영어가 되는 사람이 많지 않을 때다. 게다가 MBA를 했다니 바이어가 신뢰를 했다. 바이어들에게 계속 편지해 관계를 트고 한국을 찾아오면 부지런히 모시고 다녔다. 민속촌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갔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닥치는 대로 팔았다. 부활절 바구니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놀이공원에 간 사람들이 입는 동물모형 옷가지를 개발해 팔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그러다가 당시 미국 최대 유통업체인 시어즈나 K-마트와 거래를 텄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떻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튼 바이어 디렉토리를 찾아 수없이 편지를 썼다. 당시 시어스와 K-마트가 유통의 양대산맥이었는데 편지를 써서 약속을 잡고 찾아갔다. 그래서 시어즈엔 공예품을 납품했는데 물량이 많지는 않았다. K-마트엔 의류가 연결됐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의류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됐다. 의류 공장을 한창 키우던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자금이 말려 도산한 것.

    3년여의 와신상담 끝에 그는 1982년 한세실업을 창업해 재기했다. 10년 전 세운 한세통상의 ‘한세’를 그대로 따왔다. 오는 11월이면 한세실업은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한세통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창립 40주년이다.

    크게 벌이다 쓴맛을 본 그는 이번엔 작게 시작했다. 부도로 담보 부동산을 다 잃었는데 다행히 집안에서 사업자금을 주고 담보도 제공해줬다. 부도 전 최대 거래처였던 K-마트와 거래를 재개했다. K-마트를 통해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른 업체와 거래를 트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만큼 많은 물량을 다룰 형편도 아니었다.한세실업은 지금도 K-마트와 거래를 한다. 물론 K마트의 위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렇다면 김 회장은 어떻게 부도를 내고 3년 동안이나 소원했던 K-마트와 거래를 재개할 수 있었을까. 또 아직껏 거래를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갭(Gap)과는 사이판에 나가면서 거래를 시작했는데 20여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이나 핑크 등이 속해 있는 리미티드와도 20년 넘게 거래하고 있고 타겟과는 15년째 거래하고 있다. 오래 거래하는 비결은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요구조건을 만족시켰다. 요구 조건의 첫 번째는 가격이고 두 번째는 정시납품이며 세 번째는 품질이다. 여기에 곁들여 컴플라이언스도 맞춰줘야 한다. 요즘은 인권 조건이 꽤 까다롭다. 덧붙여 대규모 캐퍼(생산능력)도 필요하다. 물량을 소나기식으로 발주하는데, 필요할 때 단기간에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 최근엔 여기에 덧붙여 원단과 디자인 능력도 필요하다.”

    김 회장은 그러면서 한세의 생산능력을 설명했다.

    “한창 출고할 때면 컨테이너로 30~50개씩 보낸다. 그 정도 생산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한세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니카라과에 현지 공장을 두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베트남엔 현재 제3공장을 신축 중인데 7~8월경 완공된다. 완공되면 500개 라인에 4만명의 직원이 일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협력 공장을 통해 500개 라인을 또 확보하고 있다. 현재 캐퍼로는 연 15억~16억 달러까지는 가능하다.”

    김 회장은 올해는 10억7000만달러 정도의 매출이 가능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를 베트남에서 생산하고 인도네시아에서 35%, 중미의 두 나라에서 15% 정도를 생산한다고 했다. 또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모두 기술수준이 양호하며 중미에선 단순한 제품을 신속하게 배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이들 현지법인에 100여 명의 직원이 나가 있다.

    한세실업은 철저히 OEM(주문자상표생산방식)으로 컸다. 그가 보는 OEM 사업은 어떤가.

    “OEM은 꽤 괜찮은 비즈니스다. 아직도 좀 더 클 것이다. 30억~40억달러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정도를 잡고 우선 1차로 20억달러 규모를 확보할 것이다. 최근엔 미얀마 진출을 추진 중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캐퍼를 갖춰 미래에 대비하려고 한다.” 현재 월마트나 타겟같은 대형할인점은 물론이고 갭이나 올드 네이비, 리미티드, 애버크롬비, 아메리칸 이글, 뉴욕&컴퍼니, 나이키 등 전문점과 시어즈, 메이시, 콜 등 백화점이 한세의 고객이다. 미국 어디를 가든 한세의 옷을 만나볼 수 있는 셈이다. 이들 거래처를 만족시키려고 한세는 OEM에서 ODM(제조자개발생산) 업체로 변신을 하고 있다.

    “패션업체도 R&D가 중요한데 전체가 디자인이다. 디자인에는 스타일 디자인과 패턴 디자인 등이 있는데 원단 개발도 필수다. 지금은 원단 개발도 경쟁이다. 디자이너들이 새 디자인과 원단을 제시하면서 상담을 하고 매출을 일으킨다.”

    한세에서는 650명의 본사 직원 중 50여 명이 연구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뉴욕 사무소도 디자인 개발을 주로 하고 있는데 디자이너들은 미국인이고 책임자만 한국인이다.

    김 회장은 이 대목에서 디자인에 얽힌 옛이야기를 소개했다.

    “옛날에 바이어들과 협상을 하다 보면 우리의 대안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 현장에서 즉시 디자인을 그리고 색을 칠해 주곤 했다. 저녁에 새 제품 이야기가 나오면 밤샘을 해서 샘플을 만들어줬다. 아침에 샘플을 주니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 대화가 부드럽게 풀린다. 가격 깎자는 얘기도 덜 하고….”

    그의 치열한 영업 수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샘플을 만드는 직원들이 한세의 자산이다.

    “현재 한국에선 80여 명이 샘플을 만들고 있다. 또 베트남에선 120명, 인도네시아에서는 20명이 샘플을 만들고 있다. 1년에 이들이 만드는 샘플만도 30만장이 넘는다.

    한세실업 베트남공장 전경
    한세실업 베트남공장 전경
    자체 브랜드 유통·M&A로 성장 추구 OEM으로 기반을 닦은 한세는 얼마 전부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별도로 자체 매장에서 의류유통을 시작한 것. 2010년 10월 자체 브랜드 NYBH(Designed by Hansae in New York)를 론칭했고 온라인 패션몰 iSTYLE24로 SPA 경쟁에도 나섰다.

    “지난해 드림스코를 인수한 것도 그런 차원이다. 현재 국내에 180개 중국에 60개 매장을 갖고 있다. 국내 매장은 이 정도로 하고 중국 매장을 200개에서 300개 정도로 늘려갈 것이다. 이를 위해 M&A로 새 브랜드를 인수하는 것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김 회장은 OEM과 자체유통 두 비즈니스를 병행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당분간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한세가 1조2000억을 할 것이고 드림스코가 600억 정도 할 것이다. 내년에도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본다.”

    와튼스쿨 출신답게 M&A를 통한 성장도 추구하고 있다.“2003년에 예스24를 인수해 합병했고 2005년엔 무비오케이를 인수했으며 2011년에 드림스코어를 인수했다. 추가로 M&A를 할 생각이다. 자기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것, 아동복 브랜드에도 관심이 많다. 비슷한 것을 묶어놔야 한다. 유아복에도 관심이 있고.” 그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인수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조건이 맞으면 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만 미국이나 유럽은 아직 자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특히 일본은 선진화된 나라라 모든 게 투명하니 해볼 만하다고 했다.

    사업철수도 전략이다 김 회장은 신사업 진출 못지않게 철수에도 뛰어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이미 사이판과 중국 등에서 철수한 경험이 있다.

    “사이판의 효용은 쿼터가 없고 무관세 지역이란 점이다. 그러나 원가가 비싸다. 외국인을 데려다 일을 해도 그 나라 최저임금에 맞게 줘야 한다. 거기에 기숙사 제공하고 하니 원가가 오른다. 2000년이 경쟁력 피크였다. 그래서 2005년에 문을 닫고 법인은 올해 청산한다. 철수를 했지만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 중국 공장과 캄보디아 공장에서도 철수했다. 캄보디아는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더 확장하기보다 베트남 공장을 키우는 게 용이해서 그렇게 했다. 어느 곳이나 문 닫기가 쉽지 않다. 직원은 물론이고 지자체나 정부와도 잘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문을 닫는다면 갑자기 이것도 세금이고 저것도 세금이라고 매기곤 한다. 미리 준비하고 충분히 보상해 부드럽게 마무리를 지었다.”

    사진설명
    새 길 찾은 e커머스 그룹의 또 한 축인 예스24를 비롯한 e커머스 사업은 어떨까.

    김 회장은 종이책이 유한한 것은 다 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종이책 시장은 2조5000억원에서 3조원 사이에서 정체돼 있다. 온라인은 성장하는 데도 둔화되고 있다”면서 나름의 대책을 설명했다.

    “우선 e커머스의 해외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베트남은 2009년에 오픈해 상당한 궤도에 올랐고 지난해엔 인도네시아에서도 오픈했다. 베트남에선 선두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초기 단계라 아직은 매출이 크지는 않다. 그렇지만 e커머스가 커지면 큰 시장 확보가 가능해진다. 점진적으로 아시아 각 시장에 진출할 것이다. 두 번째로 패션과 화장품 유통을 하고 있는 아이스타일(iSTYLE)을 적당한 시기에 합병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

    최근 관심사가 되고 있는 전자책 시장과 관련해선 승산이 있다고 했다.

    “아직은 한국 사람끼리의 경쟁인데 아마존이 들어올 것이고 애플과도 경쟁하게 될 것 같다. 다양한 경쟁사와의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승산이 있다. 전자책도 종이책 사는 사람이 산다.”

    전자책 출판에 대해선 일반 서적은 손을 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출판업계의 영역이란 얘기다. 다만 장르(무협 로맨스) 분야 전자책 출판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e커머스도 국가별 특성이 있다며 그에 따라 사업을 조정하고 있다고 했다.

    “베트남은 책 판매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대신 휴대전화를 판다. 오프라인 기반으로 파는 것인데 온라인에선 처음이다. 인도네시아에선 책 판매가 가능하다. 좀 더 큰 시장이 될 것이다. 한국에선 예스24와 아이스타일을 합해서 간다. 단말기 시장도 만들어보려고 한다. 책에 적합한 단말기로 와이파이만 할 것이다. 통신 모드를 넣으면 값이 비싸진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경영 실패를 경험한 최고경영자답게 그는 독특한 경영원칙을 밝혔다.

    “ ‘한 걸음 늦게 가자’이다. 부도 이후에 세운 좌우명이다. 부도 후 한동안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개인과 회사 모두 바꿨다. 우선 회사로선 한 발짝 늦게 가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나는 그 이후 은행엔 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찾아가면 조금은 더 빌릴 수 있겠지만 실무자가 빌릴 수 있는 정도만 갖고 하기로 했다. CEO의 시간은 영업이나 경영에 할애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내 실력보다 늦게 가자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는 일주일에 하루를 놀자고 했다. 부도 전에는 7 Days 24 Hours(일주일 내내 24시간 일하는 것)를 고수했다. 이제는 무조건 하루는 쉰다. 일요일은 운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10여 년간 테니스를 쳤다. 마지막까지 테니스를 하다가 모두들 골프를 치라고 해서 가장 늦게 입문했더니 친구들이 아주 좋아하더라.(웃음) 이후 10년 정도 하지 않다가 2~3년 전부터 다시 하고 있는데 연간 20번 정도 나간다.”

    김 회장은 골프 보다는 걷기를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여의도공원 한 바퀴 돌면 2.5km인데 아침에 임직원들과 걷는다. 매주 화·수·목요일 걷는다. 1년에 한 사람씩 함께 걷는데 나와 사장, 전무가 함께 하고 있다. 두 바퀴를 돌면 5km다. 그러고 나서 함께 아침을 먹고 나온다. 지금은 걷는 게 한세의 문화가 됐다. 벌로 걸으라고도 한다. 벌을 받은 직원들은 처음엔 불평불만으로 가득하다가도 걸으면서 대화하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푼다.”

    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직원들의 건강을 챙겨주는 셈이다. 게다가 월급까지 상당하니 한세는 꽤 괜찮은 회사다.

    창업, 정부·대기업이 나서야 자수성가한 그는 최근 젊은이들의 창업 열기가 부족한 데 대해 아쉬움을 보였다.

    “지금은 창업이 없어서 아쉽다. 1970년대엔 창업이 많았다. 섬유와 수출이 주종이었다. 김우중 씨가 1968년에 창업했고… 나는 그 다음이다. 그 후 겨우 일어난 창업 붐이 IT붐인데 그마저 금방 꺼졌다. 직장이 없었기에 붐이 일었다. 어떤 식으로든 벤처가 일어나야 한다. 미국은 제조업 공동화에도 불구하고 벤처가 활성화됐다. 페이스북은 얼마 전까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회사인데 지금은 세계를 선도하는 100조 기업이 됐다. 구글도 작은 벤처로 시작했고 야후는 중국계가 시작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창업 붐이 무너져 안타깝다. 대기업이 작은 기업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페이스북은 20명 있는 기업을 1조에 인수했다. 그런 게 젊은이들의 사기를 얼마나 북돋워주겠나.”

    정부나 대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2000년대 들어 창업 붐이 없어졌다. DJ 대통령은 연세가 많았는데도 참 잘했다. 몇 년 전 네이버가 ‘첫눈’ 검색엔진을 300억원에 인수했다. (첫눈을 판) 그들이 다시 엔젤을 한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에겐 새 기업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이 NHN이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의 도전정신도 강조했다.

    “젊은이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젊은이가 안전한 길만 가려는 것은 좋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안전만 쫓아간다. 정부 공무원, 선생님, 대기업… 모험적 선택이 필요하다.”

    한세는 그래서 대학생들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매년 대학생 봉사단 20명을 뽑아 베트남에 보내 일주일 동안 자원봉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2세 승계 준비 중 김 회장은 얼마 전부터 두 아들에게 경영수업을 시키고 있다.

    “맏이는 5년 반 됐고 둘째는 3년이 됐다. 맏이는 e커머스 부문을 전담하고 있다. 예스24를 인수 후 석사를 했는데 미국에서 인포메이션 시스템스를 전공했다. 돌아와선 전공을 살려 아이스타일을 맡으면서 예스24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둘째는 지금 한세실업에서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LG에 있다가 MBA를 마친 뒤 미국 애버크롬비에서 근무하다가 최근 귀국했다. 아이들이 경영을 하지 않겠다는 집도 있는데 나는 둘 다 열심히 해주고 있어 아주 다행이다.”

    그러나 2세 승계에 대해선 아직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직은 경영수업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 당분간은 전문 경영인이 위에서 이끌고 아이들은 일을 배워가며 능력에 맞는 자리를 맡는 게 순리라는 것. 그는 오너들이 2세를 남의 회사에 보내 일을 배우도록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첫째는 기회가 없어 잘 모르겠으나 둘째는 실무 경험을 쌓아 경영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2호(2012년 07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