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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 … 고령화 ‘스텔스기’ 처럼 소리 없이 한국 위협
입력 : 2012.06.01 17: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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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얘기를 하면서 간혹 ‘우리(We)’라고 말해놓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을 정도다. 한국 정부가 주창한 ‘녹색성장(Green Growth)’을 OECD의 핵심 어젠다로 끌어들인 주인공도 바로 구리아 사무총장이다. 지난 1년 새 OECD는 두 차례 한국보고서를 냈다.
지난해 OECD가 사회통합보고서를 통해 제안했던 기초생활수급자 수혜대상 확대 등은 이미 우리 정부가 정책화했다.
지난 4월 26일 서울에서 발표한 한국경제보고서도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깨알 같은 조언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잠재성장률 제고라는 새로운 이슈와 함께 지난해 제시했던 사회통합 필요성을 양대 키워드로 밝히면서 그 해석을 놓고 논란이 뒤따랐다.
OECD가 성장과 복지 중 어디에 방점을 찍은 것이냐를 두고 제각각 해석이 달랐던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한 의원은 보도자료까지 배포해 구리아 사무총장이 복지 지출을 늘리라고 언급한 것이지 ‘복지제도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아전인수 격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구리아 총장과 OECD가 말하려는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갸우뚱해지는 대목이다.
다행히 구리아 총장은 지난해 6월에 이어 이번 방한 때도 직접 매경미디어센터를 방문해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과 대담을 나눴다. 분 단위 스케줄로 움직이는 OECD 사무총장이 언론사를 직접 찾아와 한 시간 넘게 별도의 대담 시간을 갖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할 얘기가 더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필자도 지난해에 이어 또 한 번 대담 자리에 배석해 그의 생각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중남미 사람 특유의 다양한 표정은 여전했다. 중립적 표현이 많았던 보고서와 달리 구리아 사무총장이 들려준 이야기는 훨씬 직설적이었다. 구리아 총장은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소득세와 법인세 등 이른바 ‘부자 증세’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명확히 밝혔다. 특히 그는 한국을 34개 OECD 회원국 중 글로벌 위기 이후 모범적 회복을 이룩한 나라로 꼽았다.
다만 아직까지 글로벌 위기가 지나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위기 이후를 대비한 정교한 정책 설계와 사회 각 분야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지난 4월 27일 구리아 사무총장과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 간 대담 내용을 일문일답식으로 요약했다.
장대환 매경미디어그룹 회장 : 한국은 지금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나.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 : 한국이 당면한 과제는 유럽이나 미국과 다르다. ‘고령화(aging)’가 가장 큰 문제다. 한국은 지금 OECD 회원국 가운데 세 번째로 젊은 나라지만 2050년이 되면 두 번째로 늙은 나라가 된다. 일본은 이미 늙은 나라지만 한국은 빠르게 고령화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다. 고령화에 대해 사회 전체가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의 과제는 ‘사회통합(Social Cohesion)’이다. 지난해 6월 한국 정부에 사회통합 보고서를 전달한 바 있다. 노동시장과 관련해선 청년, 여성, 노년층 등 세 그룹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학교를 졸업한 뒤나 재직 중에도 질 높은 교육에 접근할 기회를 줘야 한다. 교육시스템 개혁이 중요한 이유다. 한국의 지나치게 긴 근무시간도 문제다. 더 이상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계는 이제 지식기반 경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고령자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매우 커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삶의 질을 개선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장 회장 : 한국 정치권에선 복지를 위한 증세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구리아 총장 : 세금으로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를 이루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 다른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지출이 한국은 7%대, OECD 평균은 20%에 가까운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한국이 사회적 지출을 지금보다 더 빠르게 늘릴 것인가. 이미 해마다 사회적 지출이 11~12% 증가하고 있다. 빠른 고령화는 자동적으로 사회적 지출을 늘리게 돼 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스텔스기(Stealth aircraft)’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한번 제도를 만들면 되돌리기 어렵다. 고령화에 대비해 여유 공간을 확보해 놓아야 한다. 재정 건전성이 중요한 이유다. 앞으로 고령화는 한국 사회에 매우 값비싼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장 회장 : 보고서에서 간접세로 세원을 확보하라고 조언한 까닭은.
구리아 총장 : OECD는 기본적으로 세금을 낮출 것을 권고한다. 세금 인하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이 OECD의 기본적 세제 철학이다. 법인세가 오르면 기업에 속한 직원들의 복지는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소득세와 법인세는 기본적으로 낮추는 방향으로 갈 것을 권유한다. 근로와 기업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는 앞으로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한국정부가 재정 수입이 더 필요하다면 부가가치세, 보유세, 환경세 등을 이용하는 것이 옳다. 한국의 부가가치세는 10%지만 OECD 평균은 18%다. 프랑스는 19%, 덴마크의 경우는 최고 25%에 달한다. 일본은 5%지만 10%로 인상을 추진 중이다. 환경세도 잘 활용하라. 환경 개선과 재정 건전성 양쪽에 이득이 된다.또 부자들이 더 많은 전기와 기름을 사용하지 않는가. 부가세 인상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필요시 극빈층에게 현금성 보조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장 회장 : 올해 세계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구리아 총장 : 유럽은 올해 소폭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도 2% 수준의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 다만 유럽도 올해 하반기부터 회복되기 시작해 내년엔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다. 대규모 경기후퇴는 없다. 유럽 내에서도 일부 국가는 골이 더 깊겠지만 반대로 일부 국가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대체로 유럽 역시 내년에 올해보다 조금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순항(crusing speed)’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상태다.
장 회장 : 전 세계가 긴축과 내핍에 지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구리아 총장 : 성장과 긴축의 문제는 결국 각국이 어떤 정책 조합(Policy Mix)을 선택할지에 달렸다. 모든 나라에게 통용되는 원칙은 없다. 영국의 경우 매번 시장 기대를 뛰어넘는 강도의 조정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일종의 오버슈팅이긴 했지만 신뢰를 얻었다. 만약 정부가 기존 정책을 갑자기 바꿀 것이란 인상을 준다면 시장은 곧바로 역습에 나설 것이다. 시장은 인내심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이냐 긴축이냐 선택 문제에서 당분간은 대체로 긴축 쪽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장 회장 : 하버드대 제임스 로빈슨 교수 등은 ‘실패국가 연구(Why nations fail)’란 책에서 포용적(Inclusive) 경제제도를 갖춘 나라가 성공한다고 진단했는데.
구리아 총장 : OECD 34개 회원국에서 전반적으로 불평등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 상위 10% 소득을 하위 10%로 나눈 ‘소득 10분위 배율’은 OECD 평균이 9배다. 한국은 평균보다 조금 높고 미국은 14배, 멕시코는 25배, 브라질은 50배에 달한다. 일본은 9배다. 25년 전 OECD 평균은 7배였다. 불평등이 30% 정도 심화된 셈이다. 5월 열리는 OECD 재무장관 회의 주제도 바로 불평등 완화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 누구도 뒤처져선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 맥락에서 포용적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장 회장 : OECD 회원국 가운데 어떤 나라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모범국가인가.
구리아 사무총장 : 한국은 OECD가 지적한 몇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계속 좋아지고 있는 대표적 국가다. 터키, 폴란드, 칠레, 덴마크, 핀란드 등도 잘 하고 있다. 독일은 가장 앞서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보다 실업률이 오히려 낮아졌다. 2016년에 균형재정도 가능할 것이다. 독일의 성공 비결은 선제적 개혁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은 이미 전임 슈뢰더 정권 때 ‘어젠다 2010’이란 주제로 고강도 개혁을 시작했다. 덕분에 글로벌 위기에 잘 대처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스페인은 위기 이전에 5년간 흑자재정이었고 국가부채도 낮은 편이었지만 구조개혁에 실패했다. 국가 간 성과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정책 수단의 질과 개혁의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잘 하고 있는 나라들도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장 회장 : 한국이 그리스, 스페인, 일본의 전철을 밟을 우려는 없나.
구리아 총장 : 그렇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재정 건전성에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하겠지만 한국은 올해 3.5% 성장하고 내년에도 4% 성장이 예상된다. 한국 실업률은 4% 미만으로 글로벌 위기 이전 수준이다. 물가상승률도 비교적 잘 제어되고 있고, 금융시스템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장 회장 : 당신 조국인 멕시코는 1968년 올림픽 개최 후 선진국 진입 기대감이 높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가 뭔가.
구리아 총장 : 기본적으로 폐쇄경제 탓이다. 정부가 너무 많은 분야를 통제했다. 재정건전성을 지키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1970년부터 6년 단위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지출이 늘어났고 위기로 이어졌다. 내가 1990년대 말 멕시코 재무장관으로 일할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대출금을 갚고 재정을 건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재정도 나아졌고 6~7% 성장도 이뤄냈다. 지금 멕시코 경제는 대체로 양호하다. 다만 정치적 컨센서스가 부족하다. 이로 인해 교육, 재정, 노동,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 속도가 더디다.
멕시코 출신 앙헬구리아 사무총장장대한 매경미디어그룹 회장과 앙헬구리아 OECD 사무총장
멕시코 오토너머스국립대 경제학과를 나와 리즈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남미에서 엘리트 관료로 성장할 수 있는 학문적 배경을 충분히 쌓은 셈이다. 조국인 멕시코에서 쌓은 경력도 화려했다. 수출입은행장, 국제산업은행장, 국민기금 최고경영자(CEO) 등을 두루 거쳐 외무부 장관(1994~1998년), 재무부 장관(1999~2000년)을 잇따라 지냈다. 외교부와 재무부 수장을 연이어 맡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특히 재무부 장관으로 일할 때는 국가채무 감축에 공을 들였다. 장관으로 일하며 국제 인맥을 넓힌 덕분에 2005년 11월 OECD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연임에 성공한 그는 지난해 6월부터 두 번째 사무총장 임기(5년)를 시작했다.
OECD는 어떤 기구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12월 12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됐다. 선진국들만의 리그로 불리던 OECD에 가입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물론 이듬해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이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OECD에 진입한 것은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OECD의 역사는 제 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6월 미국의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1959) 국무장관은 마셜플랜이라고 불리는 유럽재건계획을 내놓는다.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게 된 유럽은 마셜플랜의 이행기구인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출범시켰으며, 1961년엔 몇몇 유럽 내 국제기구와 통합해 현재 형태의 OECD로 확대 재편됐다.
유럽뿐 아니라 북미 선진국을 포함해 서방 선진국 전체의 공동 경제발전과 개발도상국 원조를 아우르는 초대형 국제기구로 확대된 셈이었다. 이후 시장주의 확산을 모토로 세계무역기구(WTO, 전 GATT), 세계은행(WB) 등과 보조를 맞춰 왔다.
탄생 이후 지금까지 OECD는 다른 국제기구와는 달리 ‘협상’이 아닌 ‘협의’를 원칙으로 한다. 각국의 데이터를 면밀히 분석 비교하고,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는 것이 핵심 기능이다. 의사결정도 만장일치가 원칙이다. 다만 과거엔 선진국 간 ‘공통의 룰’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국가별 맞춤 전략을 조언하는 역할이 커졌다. 냉전 종식 이후엔 문호를 더욱 개방해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남미 국가들도 진입하는 등 현재 34개국이 가입돼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신흥 개도국들의 경제 규모가 급증하면서 선진국 경제질서를 대변해온 OECD 위상은 흔들렸다. 브릭스(BRICs)로 불리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여전히 비(非) OECD 국가다. 이 때문에 OECD는 러시아와 중국 유치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신헌철 매일경제 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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