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일 셰프의 맛의 향기] 고흐가 최후에 먹었을 프랑스 시골 농가의 맛, 단호박
입력 : 2011.11.25 15:30:07
-
호박은 우리 음식에도 늘 올라가는 중요한 식재료다. 엿을 고기도 하고 떡이나 죽, 범벅의 재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단호박은 상대적으로 귀한 작물이어서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건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과거에는 어디서나 심어두고 방치하다시피 해도 큼지막하게 잘 자라 나 수확을 도와주는 재래종 호박이 대부분이었다. 호박은 영양가도 높고 특히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아서 푸성귀가 귀한 겨우내 먹으면 몸에 아주 좋았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긴긴 겨울 밤, 할머니가 호박범벅을 만들어 주시던 기억이 난다. 창고에 있는 마른 콩과 옥수수, 밀가루를 넣고 만드시던 호박범벅. 그 달큼하고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서 피어나면 나는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가 이종형들이 떠는 소란에 잠이 깨어 범벅을 마구 입에 넣곤 했다. 그 때문인지 호박범벅을 연상하면 침이 고이고 할머니의 동백기름 바른 머리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호박으로 만드는 파스타도 있다. 파바로티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북부 모데나라는 도시는 호박 만두로 유명하다. ‘러비올리 디 주카’라는 이름의 이 만두는 달걀을 넣어 반죽한 피(皮)에 호박과 치즈로 양념한 소를 채워 소금물에 삶아 먹는 요리다. 삶아서 건진 후 위에 파르미자노 치즈(흔히 파마산이라고 부르는 미국산은 이미테이션으로 맛이 없다)를 뿌리면 정말 누가 죽어 나가야 정신을 차리는 맛이다. 호박은 입안을 꽉 채우는 속성을 지녔다. 밀도 있고 부드러우며 진지한 맛이다. 약간 단맛도 있고 향은 입에 남는다. 이 지역 특산인 가벼운 거품이 이는 람부르스코 와인을 곁들이면 모데나식 정찬이 된다. 틀림없이 파바로티도 즐겼을 법한.
호박을 퓌레로 만들어 면을 뽑기도 한다. 연한 주황색의 면이 뽑아지는데 크림과 치즈에 버무려 먹으면 겨울철 힘을 내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스프를 만드는 것도 있다. 늙은 호박이나 단호박 스프를 제대로 만들려면 몇 가지 팁이 있다. 믹서로 갈고 크림을 넣는다는 건 짐작하겠지만 뜻밖에도 놓치곤 한다. 호박을 양파와 함께 버터에 잘 볶아서 맛을 충분히 들이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호박은 잘게 썰어야 하는데, 버터에 볶아지는 단면적이 넓을수록 맛이 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좋은 육수로 맛을 더해 줘야 한다는 점이다. 걸쭉한 크림 스프처럼 보이므로 육수의 존재를 잊기 쉬운데 스프의 뒷맛은 거의 육수가 책임진다고 보면 된다. 고기국물이 부담스러운 사람은 채소 우린 물을 넣어 맛을 보강해주면 좋다.
단호박이나 늙은 호박을 쪄서 먹는 것도 입의 즐거움이다. 혈당을 크게 높이지 않으므로 노인들에게도 좋다. 호박을 찔 때는 소금을 조금 넣으면 단맛을 더 잘 느끼게 된다. 단호박을 고를 때는 겉이 매끈하고 울퉁불퉁하지 않은 것, 무게가 묵직한 것이 좋다. 늙은 호박도 상처가 없고 무거우며 크기가 적당한 것을 고르도록 한다. 냉장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서늘한 곳에 신문지로 싸서 두는 게 좋다.
[박찬일 / 라꼼마 셰프 chanilpark@naver.com│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4호(2011년 11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