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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블루칩 작가 탐방기] 이야기를 담는 작가 박인우
입력 : 2011.09.30 14: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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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야(十五夜)0931 40.9X31.3cm, Acrylic on canvas, 2009
박인우의 그림을 보자 문득 그저께 아침이 생각난다. 혼자 사는 집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가 다 떨어졌기에 전화를 했다.
“엄마, 김치가 없어.”
오랜만의 전화를 건 무심한 자식에게 엄마는 “내일 바로 보내주마” 하고 얼른 끊으신다. 다급히 배추를 사오고 절여 새 김치를 담갔을 엄마. 도착한 택배상자에는 혹시 국물이 샐까 꽁꽁 싸매고 정성 들여 담은 김치며 반찬들이 바리바리 들어 있었다.
요즘은 보따리 대신 쇼핑백이나 스티로폼 택배상자가 대신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보따리는 ‘엄마 사랑’의 상징이다. 자신은 허름한 비닐봉지나 장바구니를 쓰면서도, 자식에게 보내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포장할 때는 고이 접어놓은 제일 예쁜 보자기를 꺼내시는 엄마. 화사한 봄날에 온갖 꽃이 피어나고 노랑나비가 노는 보자기의 꿈은 객지에서 삶과 싸우고 있을 자식에게 보내는 엄마의 기도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보듬어 싸서 건네주는 그 마음. 과연 나도 우리 엄마처럼 누군가에게 이렇게 줄 수 있을까. 작가 박인우 씨의 인천 작업실로 향하는 길 내내 보따리와 엄마 생각이 한참 머릿속에 맴돈다. 작가에게 보따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어떤 사람일까?
햇볕이 따뜻하게 드는 작업실 입구에는 정성껏 가꾼 화초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작업실에는 작업 중인 그림이 참 많았다. 생각날 때마다 재미지게 그때그때 다작(多作)을 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는 전날 밤 전시 오프닝 때문에 후배들이 찾아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말았다며 멋쩍게 허허 웃었다.
꽉 찬 달밤, 이야기들이 빛나는 밤십오야(十五夜)1042, 91X117cm Acrylic on canvas, 2010
꽉 찬 달. 작품 제목을 통해 박 작가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1960년대만 하더라도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전기도 없이 살았다. 코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 말 그대로 새까맣게 칠흑처럼 어두웠던 밤. 당시에는 해가 지면 애들은 무조건 집에 가서 잘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호롱불을 켜자니 기름을 아껴야 해서 등을 켜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 작가는 당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달랐다고 회상한다.
“보름달이 뜨면 어찌나 거리가 훤한지 꼭 낮같이 느껴져요. 신나죠. 억지로 잠을 안자도 되니까 애들은 물론이고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밖으로 나와요. 평상에 쭉 둘러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별의별 수다가 다 나옵니다. 옆집 할머니 이야기, 묵혀둔 속 이야기…. 그야말로 이야기 꾸러미, 인간의 역사가 다 나오죠. 제 그림 속 보따리도 그러한 존재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였어요. 그래서 제목을 ‘십오야’라고 지었죠.”
제목이 투박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박 작가는 왠지 촌스러운 게 좋다고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그는 보따리를 통해 한 개인의 존재를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몇몇 유명한 사람의 일생 이외에는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린이든 어른이든 개인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시장 할머니,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아버지. 이들의 역사는 유명인의 역사와 달리 소리 없이 잊혀 갈 것이다. 하지만 치열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작가는 그 평범한 사람들 하나하나의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여겨주고 싶었던 것이다.
“수많은 개인의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했어요. 그렇다고 그 사람 인생을 다 그릴 수도 없고요. 그래서 보따리 그 속에 담긴 개인의 모든 것들, 존재감을 담고 싶었어요. 보따리가 한국적이어서도 조형적으로 예뻐서도 아니에요. 같은 미술 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제 그림을 보고 ‘야, 박인우에게 더 예쁜 보자기 하나 사줘야겠다’라고 말했다더군요. 참, 제 마음을 모르는 거죠.”
작업실을 둘러보니 예상과는 달리 보따리가 등장하는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말, 개, 길, 사람 등 등장하는 소재나 구성이 꽤나 다양했다.
“제가 보자기나 보따리만 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저는 소재주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소재보다는 인간에 관심이 많죠. 사람, 사람이 만들어낸 길, 문명에 깃든 힘, 숨겨진 소소한 이야기들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각인시키려고 전략적으로 평생 똑같은 것만 그리는 작가들은 예술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이라는 것은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재를 통해 작가의 정체성이 우러나오는 것이죠.”
덧붙여 그는 조형성보다 작가로서의 책임감을 더 강조했다.
“아이고, 잘 먹고 잘 살려면 미술을 왜 해요. 장사나 취업이 훨씬 효율적이죠.”
그렇다면 그 ‘예술가의 책임’이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예술을 만나는 사람에게 일종의 새로운 눈을 뜨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예를 들어 보자기를 보고 ‘이건 맨날 우리 할매가 마늘 싸 담던 보자기인데? 근데 이걸 작품으로 그려놨네. 허, 늘상 보던 건데 요렇게 보니 색다르구나’ 라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된 것이란다.
투박하게, 담백하게, 소탈하게 즐거운 인생전사 45.5X53cm, Oil on canvas, 2006
“전사가 된 나를 그렸어요. 무식하고 용감한 전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머리에 든 게 많아서 비겁해지는 것이 싫어서요. 무식하면 좀 어때요. 모두 똑똑해서 전부 박사학위 받으면 뭔 재미예요.”
그의 생각에 따르자면 ‘인생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란다. 젊을 때 고생하며 살면 늙어서 조금 편히 살 수 있고, 젊을 때 편하고 재밌게 사는 사람은 늙어서 좀 더 힘든 거니까. 그래서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따지고 보면 다 똑같은 거라고.
십오야(十五夜)1147 72.7X53cm, Acrylic on canvas, 2011
엄마에게 반찬을 한 보따리 받았을 때처럼 마음 한구석이 뜨뜻해진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이룬 게 없는 것 같아 조급해지는 마음, 비교하면서 서글퍼지는 마음이 들 때가 많지만 박 작가는 오늘도 보통의 우리 이야기를 소박한 꾸러미로 소중히 담는다.
당신의 보따리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가. 어릴 적 놀던 이야기,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 키우던 개 이야기, 말 안 듣는 자식 이야기, 바가지 긁는 와이프 이야기…. 연봉 몇 억을 받는 재원 문 아무개 씨가 아니더라도 어떠랴. 오늘은 오랜만에 이야기보따리를 한번 풀어볼까 싶다. 서로 술 한 잔 기울이며 도란도란 부끄러운 속내를 풀어내고픈 친구가 불쑥 그리운 날이다.
■ 작가 박인우는 누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2호(2011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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