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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cess DNA]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캠퍼스 오피스 경영’
입력 : 2011.09.29 10: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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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끝으로 향해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이번엔 ‘식물원’이다. 그냥 식물원이 아니라 옆쪽에 실개천(안양천)이 흐르는, 흔치 않은 풍광을 지닌 식물원이다. 물론 진짜 식물원은 아니다. 끝간 데 없이 계속될 것 같은 오솔길 양편으로 근사하게 가꾸어져 있는 다양한 꽃과 식물마다 붙어 있는 ‘팻말’ 때문에 마치 식물원처럼 느껴질 뿐이다.
한국 최고의 ‘캠퍼스 오피스’로 손꼽히는 시몬느 본사를 둘러본 느낌은 말 그대로 ‘놀라움’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 대지면적 9240㎡(2800평), 건물 면적 8250㎡(2500평)의 시몬느 본사는 앞에 선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함은 없지만 대신 얼굴에 미소를 어리게 만드는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다.
다시 발길을 돌려 건물로 돌아온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물은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3개의 큰 덩어리는 모두 예술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다리와 실외정원으로 이어져 있다. 한 덩어리는 통유리, 한 덩어리는 회백색의 시멘트 판넬, 한 덩어리는 산화처리한 붉은색의 강판으로 꾸며져 있다. 다양한 재질과 질감이 묘하게 조화롭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한 층 한 층 실외정원 없는 곳이 없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굳이 다른 층으로 이동하지 않고 자신이 있는 층에서 바로 비와 눈을 맞을 수 있는 실외정원으로 나갈 수 있다. 자연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인 실외정원마다 놓여있는 돌벤치는 어디가 사람 손으로 꾸민 정원이고 어디가 자연 그대로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돌이켜 보니 이 건물이 지향하는 컨셉트가 ‘열린 공간’이다. 온 몸으로 열린 공간의 정취가 느껴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통유리로 꾸며진 가운데 건물. 사무동과 생산동 두 건물을 이어주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이 건물은 꼭대기층인 4층까지 천장이 뚫려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실외정원과 연결된 ‘열린 공간’시몬느를 자주 찾는 외국인 바이어들을 위한 카페테리아에서 디자이너들이 다과를 즐기고 있다.
이곳을 자주 찾는 외국인 바이어를 위해 꾸민 2층 휴게실은 앤티크 클래식 분위기를 연출했다. 1900년대 영국 어느 귀족의 애장품이었다는 오르골은 하나하나 음각으로 조각한 뒤 파인 부분을 일일이 자개로 메꿔 놓은 수공예품. 가격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휴게실 전면은 바로 외부정원. 외부정원과 이어지는 벽면이 전면 통유리로 돼있어 비쳐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시간마저 정지한 듯 고요한 이곳에 오르골 음악소리가 퍼지면, 순간 왜 이 곳에 왔는지조차 잠시 잊어버리고 만다. 3층은 뒤주와 경대, 약장 등 전통가구로 채웠다.
이곳은 화장실도 특별하다. 각각의 컨셉트에 맞춰 꾸며진 화장실에 자리 잡고 있는 소품 하나하나가 실은 해당 국가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공수해온 작품들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어느 대기업 못지않은 체력단련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헬스 기기는 기본. 당구장, 탁구장도 눈에 띈다.
시몬느 본사 내부의 특징인 화장실. 동양식(좌)과 서양식(우)의 화장실 모습이 대조적이다.
“집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이 회사이지 않습니까. 그런 회사를 멋지고 근사하고 편안하게 꾸미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회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 돼 직원이 10명 가량 됐을 무렵 직원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며 ‘나중에 성공하면 꼭 멋진 업무공간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디자인 사옥으로 바이어 사로잡아직원들은 잠시 쉬고 싶을 때면 해당 층의 옥외정원을 찾으면 된다.
수출업체 거쳐 시몬느 창업 한국에서 흔치 않게 ‘캠퍼스 오피스 경영’을 펼치고 있는 박은관 회장이 핸드백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79년이다. 연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청산’이라는 핸드백 제조업체에 취업한다. 수출 회사에 들어가면 더 큰 세상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업종도 상관없이 그저 수출 회사를 찾았다. 당시 청산은 가방만 450만 달러어치를 수출하던 가방 수출 전문업체였다.
정홍덕 전 청산 회장은 영업을 제대로 하려면 시장을 알아야 한다며 신입사원인 박 회장을 유럽에 출장 보냈다. 1980년대 초는 국외 여행이 아직 자유화되지 않았을 때라 외국에 나가본 사람이 거의 없는 시절. 처음 이탈리아에 가본 박 회장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
“남자들 바지 색깔이 무지갯빛이더라구요. 이름만 들어봤던 베네통 매장에 가보니 티셔츠 컬러가 무려 18가지나 되는 거예요. 라임, 오렌지 등 들어보지도 못한 컬러도 많았어요. 그렇게 패션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재미있어서 일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는 법. 영업사원으로 입사해 1년 만에 대리, 다시 6개월 만에 과장, 그 다음 1년 후 차장, 그리고 29세에 부장이 됐다. 워낙 성장하던 산업군이라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박 회장이 올린 실적도 놀라웠다. 박 회장이 청산에 입사하던 시절만 해도 한국에 ‘가방 수출 전문업체’ 타이틀을 단 곳은 400여 개에 육박했고 청산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박 회장이 청산을 그만두던 1986년 청산은 수출액 8000만 달러 기록을 세우며 1등 가방수출전문업체로 발돋움했다. 박 회장이 ‘리즈클레이본’이라는 대형 거래처를 개척해낸 덕분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에는 제대로 된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없었다. ‘리즈클레이본’이라는 신생 미국 패션 브랜드는 처음엔 이탈리아에 OEM 제작을 맡겼지만 단가가 안 맞아 곧 그만뒀다. 다음엔 남미에 맡겼는데 정정이 불안한 남미에서 안정적인 공급을 받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같이 일해보자’며 나타난 한국 업체가 리즈클레이본엔 딱이었다.
1986년 ‘에스프리’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나타났다. 에스프리는 리즈클레이본 OEM 제작을 하고 있는 청산에 자기네 가방도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1986년 에스프리 브랜드 가방을 출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리즈클레이본 측에서 당장 에스프리 가방 제작을 그만두지 않으면 거래선을 바꾸겠다고 통보해 왔다. 8000만 달러 수출액의 70% 이상을 리즈클레이본에서 올리던 청산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요구였다.
어쩔 수 없이 에스프리 제작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에스프리 사장은 박 회장에게 아예 창업을 하고 에스프리를 맡아보는 건 어떠냐 제안했다. 그렇게 시몬느를 창업했다.
DKNY 시작으로 유명브랜드들과 거래 이어져 박 회장이 시몬느를 설립한 87년엔 “이제 제조업 시대는 지났다. 특히 봉제업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완전 끝났다. 제조업을 하려거든 중후장대 제조업을 하거나 아니면 서비스업으로 갈아 타야 한다”는 게 한국 사회를 감쌌던 분위기다. 가방 수출업체를 창업하겠다고 하자 모두가 말렸다. “이제 끝물이다. 막차 타서 무얼 하겠냐”는 논리였다. 그러나 박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미국 브랜드를 잘만 잡으면 향후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싸구려 OEM 봉제업 시대는 끝났지만 고가 디자이너 브랜드 OEM 봉제업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지요.”
회사를 세우고 처음 찾아간 곳이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패션 브랜드였던 ‘DKNY’다. 각국 영부인들이 디자이너 도나 카란의 옷과 액세서리를 애용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DKNY는 미국 백화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미국 백화점에서 도나 카란 브랜드 가방을 7개 샀습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같은 가죽과 원부자재를 구입해 똑같이 만들었지요. 제가 만든 가방을 가져가 DKNY 바이어들을 만났습니다. ‘이게 내가 만든 가방이다. 당신네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난 30~40%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 줄 수 있다. 내게 일을 맡겨 달라’고 했지요. 바이어들이 흥분하더군요.”
그러나 계약이 쉽진 않았다. 마케팅 담당자가 “DKNY 소비자들은 Made in Italy 제품을 2000달러 주고 사지, 가격이 30~40% 싸다고 Made in Korea 제품을 사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도 없는 신생기업과 뭘 믿고 거래하겠다는 거냐”며 안된다고 잘랐다. 무작정 마케팅 책임자를 찾아 갔다.
“향후 핸드백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텐데 그때는 ‘Made in Italy’ 제품만으로 그 물량을 다 충당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제품을 만들어 달라면 무조건 지켜주겠다. 제품 만드는 실력은 이미 봤지 않나. 당신네 물량의 100분의 1만 실험적으로 한 번 줘봐라. 잘 안 돼도 큰 손해가 없겠지만, 잘되면 당신이나 나나 큰 이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돈을 좀 더 버는 수준이 아니라 당신은 ‘아시아에서 고급 명품 핸드백 생산을 기획한 최초의 디렉터’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됐다.
“미국은 소비자들이 ‘브랜드’ 자체보다 ‘가격 대비 효용성’을 더 중시하는 성향이 강한 지역이예요. ‘Made in Korea’ 제품이지만 유럽산 DKNY 제품과 다를 바 없고 가격은 훨씬 싼데 왜 안 사느냐며 구입하는 고객이 꽤 있었습니다.”
1년 만에 도나 카란 핸드백 물량의 60%를 맡게 됐다. ‘DKNY 핸드백을 만드는 업체’라는 입소문이 나자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오스카 드 라 렌타, 폴로, 캘빈클라인 등이 줄줄이 고객사로 들어왔다.
캠퍼스 오피스 경영 후 인재 몰려본사 로비는 평소엔 다양한 미술작품이 걸리는 미술관으로 활용된다.
의왕 고천동 본사 뿐 아니다. 중국 광저우 공장과 베트남 공장 또한 ‘파크’ 개념을 기저에 깔고 설계했다. 특히 광저우 공장은 ‘세문원’이라는 정원으로 유명하다. 시몬느의 중국식 표기 자체가 ‘세문원’, ‘세상으로 나가는 문에 자리한 정원’이란 의미다. 글로벌 기업인 시몬느와 딱 어울리는 이름인 동시에 시몬느 본사가 표방하는 ‘열린 공간’과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시몬느 광저우 공장에 온 사람들은 다들 세문원이란 이름에 꼭 맞는 사옥과 정원이라 극찬한다. 싼 인건비를 찾아 떠나는 공장에 근사한 인테리어가 결합된 공간을 만든다는 개념이 다소 낯설 정도로 파격적이다.
박은관 회장의 소위 ‘캠퍼스 오피스 경영’은 박 회장의 개인적인 문화적 경험과 취향에서 비롯됐지만 회사 경영에 큰 도움을 주는 요소로 자리잡았다.
“시몬느 사옥이 디자인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사실 서울도 아니고 경기도 의왕이라는 지역적 한계는 디자이너 채용에 큰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사옥이 유명해지면서 디자이너 채용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시몬느 사옥에서 일해보고 싶다’며 디자이너들이 몰려들어 디자이너 채용 경쟁률이 보통 300대 1까지도 합니다. 스펙과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들이 많이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구요. 덕분에 지역적 한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좋은 인력을 대거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뿐인가요. 이직률도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솔직히 처음 캠퍼스 오피스를 만들려고 한 것은 그저 외관이 좋아 보여서였는데, 지나고 나니 이런 이유가 있어서 그 대단한 글로벌 기업들이 그렇게 캠퍼스 오피스에 공을 들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따라오더라구요.”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각각 해당 지역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중국과 베트남 시몬느 공장 직원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두 곳에서도 가장 좋은 인력을 가장 먼저 가려 뽑을 수 있게 됐다.
내부 인력 채용과 단속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꽤 된다.
“저희가 핸드백 업계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처음 거래를 트는 기업들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더 꼼꼼하게 체크를 해보고 싶어 합니다.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항상 담당 바이어를 한국으로 초청합니다. 시몬느 사옥을 방문하면 모두 이전의 다소 날선 태도에서 벗어나 굉장히 우호적으로 바뀝니다. ‘이 정도 감각적인 사옥을 지은 기업이라면 우리 명품 핸드백 제작을 믿고 맡겨도 될 만한 실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요. 시몬느 본사를 방문한 바이어 치고 납품 계약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한편 시몬느가 올해 가방 OEM 제조, 수출로만 벌어 들일 것으로 기대하는 돈이 무려 4억1000만 달러(4500억원 가량)다. 시몬느의 직접적인 가방 수출 매출액은 4500억원이지만 시몬느 가방이 새로운 라벨을 달고 나가 실제로 판매되는 금액은 그 10배가 넘는 5조원에 달한다. 2010년 기준 전 세계 명품 시장 규모는 240조원대로 추정된다. 그중 핸드백 시장은 50조원 정도. 시몬느 가방 판매액이 5조원이라면 전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의 10%를 시몬느에서 공급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다른 도전, ‛자체 명품 브랜드ʼ신사동에 건립되고 있는 ‘핸드백 박물관’은 쇼핑백처럼 생긴 외관부터 독특하다.
핸드백 박물관은 박물관과 멀티숍, 젊은 디자이너들 인큐베이팅 공간 등으로 구성된다. 2개 층에 들어설 박물관에는 핸드백의 역사와 유래는 물론 사회적, 문화적 의미에 대한 고찰 자료 등이 전시된다. 현재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수석 큐레이터인 주디스 클락이 이끄는 전문 팀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중. 이 팀의 연구 내용은 ‘핸드백의 역사와 사회적 의미’라는 제목을 달고 책으로 만들어진다.
명품 핸드백과 핸드백을 소재로 한 각종 예술작품 전시도 빠질 수 없다. 박 회장이 30년간 하나하나 모은 50여 개 핸드백도 전시된다. 백미는 1억원에 구입했다는 1970년대에 제작된 에르메스 핸드백. 세월이 갈수록 가치를 더해가면서 가격이 높아지는 핸드백의 묘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쉽게도 동양 핸드백 역사와 유래, 수집품 등은 2단계로 전시될 예정이다. 자료가 잘 보존돼 있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자료 자체는 물론 관련 유물도 거의 찾을 수가 없어서다.
젊고 실력 있는 핸드백 디자이너에게 무료로 공간을 내줘 이들이 자신의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이외에 핸드백과 관련한 모든 소재와 부품도 판매할 계획. 시몬느가 1년에 사용하는 가죽만 소 120만 마리 분량이다. 그만큼 다양한 종류와 소재의 가죽을 취급한다는 의미. 시몬느가 글로벌 명품 브랜드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가죽 소재와 각종 부품을 판매하면 한국 핸드백 디자이너들은 더욱 손쉽게 원하는 재료를 구입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다른 핸드백 제작업체도 마찬가지다. 한국 핸드백업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는 얘기다.
박은관 회장은 요즘 새로운 꿈을 꾼다. OEM을 넘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Made in Asia’ 명품 핸드백도 충분히 통한다는 걸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여준 것처럼, 한국에 주소를 둔 명품 패션 브랜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시몬느 본사가 위치한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의왕시’ 라벨로 승부를 볼 겁니다.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한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소연 / 매경이코노미 기자 sky6592@mk.co.kr│사진 =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3호(2011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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