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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th for CEO] 겨울철 응급실로 향하는 ‘발작 환자’ 뇌전증 경보 위험신호부터 응급처치까지
입력 : 2025.12.12 09: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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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공기가 깊어지는 겨울, 아이의 작은 변화에도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실내 난방이 강해지면 공기가 건조해지고, 감기나 독감이 유행하면서 병원 대기실이 붐비는 계절이다. 이런 때일수록 부모들은 “혹시 또 열이 나면 어떡하지” “밤에 기침이 심해지면 잠을 못 자는데 괜찮을까”같은 걱정을 달고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갑작스럽게 꺽꺽 소리를 내며 숨을 못 쉬는 듯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며 의식을 잃는 모습을 보인다면 상황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뀐다. 처음 겪는 발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뇌전증’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 부모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기 쉽다. 겨울의 차가움이 그 순간 감정의 온도까지 확 낮춰버리는 셈이다.
겨울에 더 두드러져 보이는 ‘뇌전증’ 발작뇌전증은 뇌신경 세포가 비정상적인 전기 신호를 일으키면서 발작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흔히 뇌 손상이나 뇌성마비가 있는 아이에게만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상적인 인지 발달을 보이는 아이에게도 발생할 수 있다. 발작의 양상은 연령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영아기에는 몸통이나 팔다리를 반복적으로 굽히는 연축 형태가 눈에 띄고, 소아·청소년기에는 온몸이 뻣뻣해졌다가 떨리는 대발작 외에도 잠깐 멍해지거나 반응이 사라지는 증상을 겪는 경우가 있다. 최선아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아이가 발작 증세를 보인다면 먼저 원인을 찾고, 발작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겨울철에 발작이 늘어난 것 같다고 느끼는 보호자가 적지 않은데, 이는 계절 자체보다 겨울에 겹친 생활·환경 요인과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 기온 변화나 습도 같은 기상 조건이 일부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가 있는가 하면, 겨울에 늘어나는 호흡기 감염, 발열, 탈수, 수면 부족이 발작 문턱을 낮출 수 있다는 임상적 관찰도 반복적으로 보고된다. 즉 ‘겨울이면 무조건 발작이 늘어난다’기보다는, 겨울에 동반되기 쉬운 조건들이 발작을 유발하거나 눈에 띄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발작이 특정 시기에 잦아지는 느낌이 든다면, 그 무렵 아이의 수면, 체온 변화, 감염 여부, 약 복용 상태 같은 요소를 함께 점검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 발작을 목격했을 때, 부모가 해야 할 일
발작은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보이지만, 대부분은 수 분 안에 자연스럽게 멈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첫 원칙은 ‘안전하게 지켜보기’다. 아이가 쓰러지거나 몸을 떨기 시작하면 우선 주변의 딱딱하거나 날카로운 물건을 치워 부딪힘을 막는다. 가능하면 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몸을 옆으로 돌려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 목을 조이는 옷이나 목도리는 느슨하게 풀어 숨쉬기 편하게 해주고, 침이나 구토물이 넘어가더라도 옆으로 빠져나가도록 고개를 옆으로 두는 자세가 도움이 된다. 반대로, 경련을 막겠다고 아이의 팔·다리를 억지로 붙잡거나, 혀를 깨물까 봐 입에 손가락이나 물건을 넣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 오히려 치아나 턱, 보호자 손에 부상을 남길 수 있다. 발작이 시작된 시간을 확인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 1~2분 내로 멈추지만, 5분 이상 지속되거나 발작이 연달아 반복된다면 응급상황으로 보고 119를 호출해야 한다. 발작 모습을 가능하다면 휴대전화로 짧게라도 촬영해 두면 이후 진료에서 발작 유형과 원인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치료의 핵심은 ‘꾸준함’…대부분 조절 가능뇌전증 진단을 들은 부모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대목은 예후다. 다행히 소아 뇌전증 환자의 상당수는 약물 치료만으로 발작이 조절된다. 치료 목표는 단순히 발작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가 일상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는 데 있다.
최선아 교수는 “소아 뇌전증 환자들이 가끔 약을 실수로 빠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매일 약을 빠뜨리지 않고 복용하는 게 뇌전증 치료의 최우선”이라며 “최근에는 뇌전증 치료에 사용하는 다양한 기전의 항경련제 약물이 개발돼 발작 조절 효과와 함께 부작용 없는 약제를 처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약을 먹다 보면 어지럼증, 졸림, 두통, 무기력감 등 부작용이 의심되는 증상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 스스로 약을 끊거나 줄이기보다 담당 의사와 상의해 조절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편 뇌전증이 있다는 이유로 아이의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소아 신경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오히려 일상에서 또래와 함께 움직이고 경험하는 과정이 아이의 발달에도 중요하다. 최선아 교수는 “아이에게 뇌전증이 있다고 해서 운동이나 단체생활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학교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의 질환에 대해 미리 알리고 발작 시 아이가 적절한 처치를 받을 수 있도록 대처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겨울방학 캠프나 체험학습, 스케이트장·수영장 등 계절 활동이 늘어나는 시기라면 이 조언은 더 현실적이다. 겨울은 추위 때문에 유난히 길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아이가 또 한 해 성장해가는 시간이다. 뇌전증이라는 진단이 처음에는 삶 전체를 얼어붙게 할 만큼 무겁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치료와 꾸준한 복용, 그리고 주변의 이해와 준비가 더해진다면, 많은 아이가 자기 속도로 학교와 일상을 이어간다.
첫 발작의 순간이 남긴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