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r My Walking] 강원도 정선 민둥산 | 한해 마무리, 정상 정복의 희열

    입력 : 2025.12.05 15: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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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정상 언저리가 까마득하다. 그 부근까지 차로 이동하고 30여 분 남짓 등산에 나서겠다는 계획은 산 입구에서 막혀버렸다.

    “여기부터는 차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억새가 산을 덮는 시기엔 차량 통행이 금지되거든요.”

    억새의 계절은 가을인데, 왜 초겨울까지… 란 생각은 산을 올려다보곤 사라졌다. 초가을부터 시작된 억새의 금빛 향연이 겨울이라고 갑자기 자취를 감출까. 게다가 남녀노소 삼삼오오 무리 지어 산을 찾는 이들 중 누구 하나 찌푸린 이가 없다. 앞서 간 무리에는 등산용 베이비 백팩에 이제 갓 돌 지난 아기를 업은 엄마도 보인다.

    “우리 애기 괜찮아? 괜찮을까.”

    옆에서 보폭을 맞추던 아빠가 걱정 가득한 말로 투정이다.

    “걱정도 참. 이렇게 상쾌한 날씨가 아이에게 더 좋은 거야. 나중에 커서 한 살 때 정상에 오른 거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 좀 있다 가팔라지면 교대하자고.”

    옆에서 작은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에 집중하던 아빠도 거든다.

    “이거 편집해서 유튜브라도 개설해야 하는 거 아냐. 우리 애기 이뻐서 금방 조회수 폭발할 거 같은데.”

    “그러다 전 세계적으로 고슴도치 소리 듣기 딱 좋지. 유튜브든 인스타든 먼저 애기한테 의견 묻고 올리는 거 잊지마. 우리부터 존중해줘야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아주머니가 가족처럼 대화에 동참한다.

    “아이고, 우리 애기 나중에 유명해지면 어린 시절 추억할 영상 많아서 좋겠구먼. 힘들면 얘기해요. 저 앞에 가는 우리 집 양반도 힘 좋거든.”

    어쩌면 이런 분위기를 K-등산이라 하던가. 산등성이를 넘은 초겨울 찬 바람이 왠지 후끈했다.

    MZ세대 핫플, 돌리네
    정상 옆 돌리네
    정상 옆 돌리네

    강원도 정선의 자랑 민둥산에 올랐다. 해발 1119m에 이르는 민둥산은 한국의 대표적인 억새 군락지다. 정상 부근에 약 66만㎡의 은빛 억새밭이 펼쳐진다. 올해 30회를 맞았다는 ‘민둥산 은빛 억세축제’에만 25만 여 명이 다녀갔다. 덕분에 9월부터 11월까지 약 40여 일간의 축제 기간엔 단연 SNS의 핫플로 떠오른다. 산을 찾는 이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 다양하다. 어떻게 하면 예쁘고 멋지고 독특한 시각으로 촬영할 수 있을지 연구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억새밭 앞에서 구현한 포즈도 각양각색이다.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이 짧은 기간 화려함을 뽐낸다면 억새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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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둥산은 화전민들의 터전이었다. 산의 7부 능선까진 관목과 잡목으로 우거진 숲이 푸릇푸릇하지만 정상 부근엔 산 이름처럼 나무가 없는 둥근 봉우리가 전부다. 산나물이 많이 나게 하려고 매년 한 번씩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는데, 먹고 살기 위한 궁여지책이 수십 년이 지나 사람을 모으는 보물이 됐다.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말 한 마리가 보름 동안 마을을 돌며 주인을 찾아 헤맸는데, 이후 나무가 자라지 않고 억새만 남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총 4개의 코스 중 선택할 수 있다.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1코스. 그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가장 빠른 코스는 능전마을에서 출발하는 2코스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1시간 30~40분쯤 걸리는데, 이코스를 택했다. 발구덕 마을을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민둥산은 등산로가 깔끔해 여느 산행과 비교하면 크게 부담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산도 아니다. 산이 많기로 소문난 대한민국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산은 단 26개에 불과하다. 그 중 하나가 민둥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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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글게 움푹 꺼져 들어간 곳이란 의미의 발구덕은 순우리말이다. 민둥산 9부 능선에 자리한 발구덕마을은 곳곳에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가 많다.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에서 보이는 돌리네(Doline·석회암 지대에서 빗물 등 용식작용과 지반 함몰로 형성된 원형이나 타원형의 오목한 지형)인데, 정상 부근의 깔딱고개(계단)가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한 분화구 모양의 작은 연못도 바로 그 지형이다. 민둥산에서도 가장 핫한 장소인데, 정상에 오르기 전 누구나 이곳에서 인생컷 촬영에 몰두한다. 주말에는 긴 줄이 생길 만큼 유명세가 대단하다.

    산 정상 아래 터를 잡은 발구덕마을은 여느 농촌처럼 농사를 짓는다. 농촌의 그것과 다른 풍경이라면 여느 농기구 대신 작은 포클레인이 밭고랑을 만들고 흙을 다진다. 아마도 높은 곳까지 무난히 오를 수 있는 차량을 선택한 것일 텐데, 멀리서 보면 이색적인 풍경이다.

    드디어 정상, 한해를 마무리하는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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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에 오르면 커다란 표지석이 우뚝 서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줄을 서고 그 앞에서 다시 한번 포즈를 취한다. 잠시 정상의 벤치 앉아 정복에 성공한 이들의 표정을 보니 산에 오르기 시작할 때처럼 찌푸린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민둥산의 정상은 사방으로 탁 트였다. 가까운 주변에 이보다 높은 산이 없어서인지 산 아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등성이 오롯한 길을 따라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딛는 이들의 모습도 그 안에 담겨 있다.

    “우리 애기 잘있지?”

    정상 표지석 앞에선 아빠가 아이를 살핀다. 엄마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가 정상인 걸 알았나? 입꼬리가 올라갔네! 올해 우리 가족 정상 정복 성공!”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3호 (2025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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