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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미카엘 하네케 영화 <피아니스트> vs 엘프리데 옐리네크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
입력 : 2025.11.21 11: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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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누르듯 면도칼을 그은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 영화 <피아니스트>는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 삼습니다. 한국에서 영화 <피아니스트>는 2001년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2003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전해지는데,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전자입니다. 이 작품은 옐리네크가 1983년 집필한 대표작이지만 영화 역시 성공을 거뒀습니다. 2001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2등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비롯해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까지, 총 3개의 트로피를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피아니스트>의 3관왕 이후 칸영화제 집행위원회가 ‘한 작품에 두 개 이상의 트로피를 주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30대 여성 피아니스트가 자신의 20대 제자와 사도마조히즘(SM) 성관계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다 전락하는 내용을 담은 치명적인 심리극을 살펴봅니다.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다섯 번의 폭력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에리카 코후트(이자벨 위페르)는 매력적인 남학생 발터 클레머(브누아 마지멜)의 재능과 성적 매력에 이끌립니다. 에리카는 만인의 찬사를 받는 모범적인 피아노 선생이었지만 그녀 내부엔 혼돈과 결핍이 가득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아버지의 부재, 자신을 ‘천재 피아니스트’로 길러내기 위해 딸의 삶을 온통 금지규정으로 가득 채운 어머니의 감시 때문이었습니다. 강습이 끝난 뒤 에리카는 자신을 항상 감시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포르노 상점을 드나들고, 퇴근 후 화장실에서 자위행위에 몰두하며, 심지어 자해까지 반복하는 이중적인 인물입니다.
에리카의 제자 클레머는 에리카의 약점을 눈치챈 뒤 접근해 그녀와 성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클레머가 바란 건 온기가 느껴지는 섹스였습니다. 하지만 에리카는 발터에게 SM 성관계 수준을 넘어서서 ‘날 모욕하고 폭행하고 강간하라’는 내용이 담긴 지시문을 내밉니다. 클레머는 에리카의 요구에 응해야만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은 지배와 피지배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에리카의 극단적인 폭력 요구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던 클레머는 분노하고 둘의 관계는 제대로 성립된 적도 없이 붕괴됩니다. 바로 그때, 크게 화를 내며 에리카를 떠났던 클레머가 에리카에게 되돌아와, 에리카가 애초에 갈망했던 그 방식으로, 심지어 에리카에 요구에 따른 위장된 연극이 아닌 거짓 없는 폭력의 감정으로, 심지어 에리카의 어머니 곁에서, 에리카를 ‘강간’합니다.
토악질이 나올 만큼 악취로 가득한 영화 ‘피아니스트’와 원작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는, 그러나 역겨운 줄거리에 따른 악평은커녕 온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폭력의 전이와 순환’에 관한 주제의 이해가 선행돼야 합니다.
에리카는 아버지의 부재로, 그녀는 자신을 평생 억압 중인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부양해야 하는 의무를 떠안은 희생자입니다. ‘죽음만이 이들 둘(에리카와 어머니)을 갈라놓을 수 있으며 에리카라는 트렁크 꼬리표 위에는 도착지가 죽음이라고 붙어 있다.’(45쪽)
그런데 에리카의 어머니는 단순히 자식이 잘 되길 갈망하는 선한 모성으로 에리카를 대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혈육 에리카를 ‘죽은 남편의 빈 자리’에 올려놓고, 돌봄이란 명분으로 딸을 심리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중입니다. 침묵과 광기로 가족을 지배했던 아버지와(제1차 폭력), 끝없는 잔소리에 ‘근면과 절약을 통한 부양 의무’까지 들먹이며 딸을 지배 중인 어머니(제2차 폭력)는 에리카에게 자기 파괴의 유전자를 남겼습니다. 이에 에리카는 자기 스스로를 타인의 힘을 빌려 파괴하려는 본원적인 갈망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의 첫 번째 대상이 클레머를 성적으로 지배하려는 욕구와 자신의 기이한 성욕을 대리 수행하라는 요구로 이어졌습니다(제3차 폭력). 그 결과 에리카에서 클레머로 향했던 폭력의 방향계가 바뀌는데, 에리카의 지배 욕망을 불허했던 클레머가 에리카에게 돌아와 결코 현실화해선 안 될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에리카는 다시 희생자가 됩니다(제4차 폭력). 그리고 이튿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학교 강당(영화에선 클래식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클레머의 웃음을 확인한 에리카는 자신의 어깨를 칼로 스스로 찌릅니다(제5차 폭력). 따라서 이 작품의 주제는 ‘폭력은 단절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의 감정을 타고 전이되다 세대를 넘어 순환한다’고 정리될 수 있을 겁니다.
유령의 면도칼원작자 옐리네크의 실제 개인사가 반영된 이 소설이 영화로 변주되면서 소실되거나 역으로 확장된 지점이 적지 않습니다.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만 다뤄보고자 합니다.
첫째, 에리카가 자신의 몸을 긋는 면도칼의 의미가 축소 됐습니다. 어머니에 의해 모든 욕망을 제거당한 삶을 살아가는 에리카는 자신의 살갗을 면도칼로 베며 자해합니다. 칼이 향하는 방향은 손등이나 몸 어딘가를 긋는 수준이 아니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그 부위였습니다 에리카 자신의 ‘성기’입니다. ‘그녀는 이 면도날을 자신의 살에 대려 한다. 푸르스름한 금속으로 된, 구부러지기도 하고 신축성도 있는 얇고 품위 있는 이 면도날.’(122쪽) 문제는 이 면도칼이 단지 뭔가를 벨 수 있는 작은 칼날이 아니라 ‘면도’칼이란 점입니다.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에는 이 면도칼이 애초에 어떤 용도였는지가 기술됩니다.
에리카가 휴지로 감싸 감춰뒀다가 종종 자신의 국부를 긋고자 꺼내는 저 면도칼은, 실은 그녀가 아버지의 뺨의 면도해줬던 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염을 깎는 일은 에리카에게 강요된 역할로 묘사되므로, 면도는 에리카가 강제로 시행해야 했던 강요된 친밀함의 흔적이었습니다. 저 면도칼로 자신을 베고 찌른다는 건 이제 세상에 없는 아버지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새겨넣음으로써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사망하여 부재하지만 유령처럼 지금도 자기 주변을 떠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입한 폭력을 되갚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를 벨 수 있는 지배적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음으로써(자의로 자기 신체에 면도칼을 댐으로써) 어머니가 설정한 ‘대리 남성’으로서의 해방감을 느끼려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칼로 베이는 몸이 타인의 신체가 아니라 에리카 자신의 것이란 점에서 그녀는 지배적 위치에 올라설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합니다.)억압과 피억압의 관계망에서 에리카의 삶을 관조한다면 하필 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가 피아노인지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피아노는 계산된 규범(악보)과 완벽한 통제(연습)를 원칙 삼기에, 감정을 다루는 예술임에도 쾌락이 엄격히 금지된 고통스러운 장르로 묘사됩니다. 그뿐인가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선 철저한 위계(교습)를 숙지해야 하고 혹독한 경쟁(콩쿠르)을 통과해야만 ‘나’로 인정받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피아노는 그 자체로 에리카 삶의 축소판입니다. 하지만 에리카의 삶은 에리카의 것일 수 없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영화의 결말과 소설의 결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릅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학교 강당(영화에서는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소설의 경우 에리카는 클레머가 다른 여학생과 활짝 웃으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심지어 몇 시간 전 에리카를 ‘강간’했음에도), 영화의 경우 에리카는 클레머가 심지어 자신을 보며 “빨리 선생님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인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순간, 에리카는 자신의 파우치에서, 아주 느린 동작으로, 미리 준비했던 칼을 꺼내 자신의 왼쪽 어깨(정확히는 폐부)를 찌르고 건물 밖 거리로 나섭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결말의 해석이 완전히 상이합니다.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에리카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 그녀는 집으로 향한다. 그녀의 걸음은 차츰 빨라지고 있다.’(379쪽).
반면 영화에서 에리카의 행선지는 모호하므로, 이는 ‘열린 결말’입니다. 영화에서 에리카가 위치했던 공연장은 격자의 철창와 유리 구조로, 마치 감옥이나 병원과도 같은 형태입니다. 에리카는 자신을 찌른 뒤 규율과 통제로 가득했던 공간을 ‘이탈’하기에 그녀가 이윽고 타자(아버지, 어머니, 클레머)를 떠나 자유를 찾으러 갔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데, 소설은 그와 정반대로 결국 ‘집’으로 향했음에 명징하게 드러나니까요. 카메라는 에리카의 모습을 원경으로 비추며 그녀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정지된 위치에서 묵묵하게 비추지만, 소설은 에리카가 결국 자유를 찾지 못했다는, 그러므로 ‘닫힌 결말’입니다.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의 문체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우아한 비유의 은유가 문장마다 가득한데 그의 언어 선택엔 경계가 없어 진공 상태에 가까운 전율이 각 장 마다 일곤 합니다. 거의 질식할 것만 같을 정도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장면, 에리카가 자신의 몸을 칼로 찌르는 바로 그 장면은, 이 영화를 이미 본 모든 관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듯이, 21세기에 영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할 명장면입니다. “주연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는 연기를 한 게 아니다”란 한 외신 평가는 기꺼이 수긍할 만합니다. 아직 이 영화 앞에 서지 않았다면 에리카 코후트의 마지막 표정을 꼭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김유태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2호 (2025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