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격인터뷰] 최진철 시아스 회장 “정체기 맞은 K-푸드, 컨테이너에 실어 파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입력 : 2025.11.19 12:05:12
-
파리에서 동쪽으로 다섯 시간, 알자스의 대규모 라면공장 한복판에 멋들어진 백발 위에 헬멧을 눌러쓴 한국인이 서 있다. 국내에서는 주로 즉석밥, 냉동만두, 간편식 등을 브랜드에 납품하는 PB·PL(자사·유통사 브랜드)로 성장한 히든챔피언 시아스(SIAS)의 최진철 회장(72)이다. 국내에서 철저히 이름을 숨긴 시아스는 유럽에서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올해 여름 문을 연 프랑스 2공장에선 곧 ‘최씨(Choi’s) 라면’이 끓기 시작한다. 이미 만두·볶음밥을 만드는 1공장(로예)에 이어, 연간 2억 개 생산이 가능한 라면 공장까지 더했다. 한국 기업으로는 첫 유럽 라면 공장이다.
“라면이든 만두든, 이제는 한국에서 만들어 ‘컨테이너에 실어 파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인터뷰 내내 최 회장이 반복한 메시지는 단순했다. K-푸드는 더 이상 ‘수출품(Export)’이 아니라, 각 나라에서 뿌리내려야 할 ‘로컬 브랜드(Local)’라는 것. 그리고 그 말은, 동시에 요즘 숨이 턱 막힌 중소 식품기업에는 꽤 불편한 진실을 전하기도 했다.
▶ 최진철 회장은?
40년 넘게 K-푸드의 전선을 지켜온 ‘현장형 엔지니어이자 글로벌 식품 개척자’다. 연구원으로 출발해 제조·유통·수출을 두루 거치며 한국 식품산업의 굵직한 변곡점을 몸으로 겪어낸 1세대 경영자다. PB·PL 시장의 성장기를 이끈 숨은 설계자로 불리고, 최근에는 프랑스 알자스에 라면·만두 공장을 세우며 “K-푸드는 이제 각 나라의 로컬 음식이 돼야 한다”는 비전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유행보다는 구조를, 스토리보다 수요곡선을 먼저 보는 실무형 리더로, 중소 식품기업의 해외진출 방식과 K-푸드 전략의 ‘다음 장’을 꾸준히 제시해온 인물이다.“수출품으론 끝났다.” — 연구원 출신 1세대 K-푸드 기업인의 진단최진철 회장은 국내 식품업계에서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식품 대기업 연구원 출신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유럽·미국 다국적 식품회사에서 아시아·태평양 총괄을 지낸 뒤, 환갑(60세)을 넘겨서야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에 ‘풀타임’을 걸었다.
“나는 원래 언론 인터뷰를 피하는 사람이에요. 공장 안에서 조용히 돈 벌고 직원 밥 먹이는 게 내 스타일이지, 얼굴 알려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그는 자신을 “식품업계 남은 몇 안 되는 ‘연구원 출신 1세대 기업인’”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시아스는 소비자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 국내에서 시판되는 전자레인지용 즉석밥, PB 냉동만두·볶음밥, 각종 가정간편식의 뒷면을 뒤집어 보면 조그만 글씨로 등장하는 그 이름.
“우리는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이 아니라 PL(Private Label) 회사입니다. 남이 설계해온 대로 찍어주는 회사가 아니라, R&D를 우리가 하고 브랜드만 유통사 걸 쓰는 거죠. 그러려면 연구 인력·설비·품목 다각화,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하는데, 그게 중소·중견 기업에 제일 어려운 조건입니다.”
국내에서 ‘숨어 있는’ 제조 역량을 키운 뒤, 그는 자연스럽게 시야를 해외로 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시장은 이미 과잉이에요. 제 감으로는 국내 식품 생산 능력이 내수 수요보다 30~40% 많습니다. 인구는 줄고, 소득은 정체돼 있는데 공장만 늘렸죠. 한국에서 살아남을 실력이라면,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K-푸드, 첫 번째 전성기에서 ‘조정기’로수출 통계를 보더라도 K-푸드는 분명 잘 달려왔다. 최 회장은 “올해 예상 K-푸드 수출이 130억 달러 선에서 전년 대비 8~9% 성장한 수준”이라고 짚는다. 다만 “지난 4~5년 폭발적으로 달려오던 성장세가 올해 처음 확 꺾였다”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라면 같은 품목은 여전히 연 20~30%씩 큽니다. 반대로 김밥·떡볶이 같은 건 급감했어요. 품목별 ‘옥석 가리기’가 시작된 거죠. 저는 지금을 K-푸드 1막이 끝나고 2막으로 넘어가는 조정기라고 봅니다.”
대표 사례가 지난해 미국을 휩쓴 ‘냉동 김밥 대란’이다. 한 리테일 체인의 냉동 김밥이 품절 사태를 빚으며 K-푸드의 상징처럼 떠올랐지만, 1년 만에 판매량이 급감했다.
“작년 한 해 미국 냉동 김밥 수출액을 다 합쳐봐야 400억 원 남짓일 겁니다. 그런데 주가는 수조 원이 움직였죠. 많은 회사가 100억씩 설비를 넣었는데, 지금 상당수가 수출을 멈추거나 접었어요. 우리는 기계 두 대, 7억만 투자했습니다. ‘단일 품목으로 연 1,000억 매출을 만들 자신이 없는 사람은 설비부터 지으면 안 된다’라고 봤으니까요.”
그는 웃으면서도, 눈은 웃지 않았다. “유행은 1년이면 끝나지만, 설비와 빚은 10년을 따라온다”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가난한 음식이 프리미엄이 됐다.’ — 최진철식 음식사(食史)
인터뷰는 어느새 ‘음식사 토크’로 흘러갔다. 최 회장은 한국 음식의 출발점을 “가난”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국은 산이 70%라 농산물이 늘 부족했습니다. 기름도, 향신료도 귀했죠. 그러니 비빔밥 같은 ‘가난의 메뉴’가 발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열량 과잉 시대입니다. 기름을 덜 쓰고, 소박하게 먹는 음식이 ‘건강식’이 됐어요. 가난이 프리미엄이 된 셈이죠.”
그는 ‘빨갛고 매운 한국 음식’ 이미지도 사실은 1970년대 이후의 산물이라고 본다. 중국산 고춧가루 대량 수입과 정부의 농산물 정책이 맞물리면서다.
“제가 자란 50~60년대만 해도 경상도·강원도 김치는 푸르렀습니다. 고춧가루가 귀해서 못 넣었으니까요. 지금처럼 새빨간 김치는 70년대 이후 이야기입니다. 요즘 세계가 사랑하는 ‘맵고 붉은 K-푸드’는 의외로 짧은 역사를 가진 신생 종(種)이에요.”
학계에서 보는 한국 음식사의 통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최소한 ‘현장을 뛰어온 식품 기술자의 기억 속 한국 음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다소 뜬금없이 한국 음식사 이야기를 꺼낸 최 회장은 K-푸드 수출과 국내 농업 활성화라는 아젠다를 현실적으로 연관시키기 어렵다는 속내를 밝혔다.
정부와 지자체는 K-푸드 수출을 이야기할 때 종종 ‘국내 농업 활성화’와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최 회장의 계산은 냉정하다.
“우리가 수출하는 130억 달러 중에 진짜 국내 농산물이 주원료인 것은 1%도 안 됩니다. 대표적인 게 김(김 수출), 김치, 쌀 가공품 정도죠. 김치의 경우 배추는 국산이지만 고추·마늘·양념은 상당 부분 수입산입니다. 즉석밥(햇반 등)도 대부분 WTO 쌀 쿼터(MMA)로 수입한 미국·중국산 쌀을 씁니다. 정부가 농가를 위해 고가에 사들인 국내 쌀은 ‘정부미’로 다시 싸게 풀어주고, 그걸로 만든 가공품이 수출되는 구조죠. 세금이 들어간 겁니다.”
그는 “K-푸드 수출을 국내 농업정책과 엮어 생각하는 건 현실과 다소 괴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일본도 농수산물 수출정책을 사실상 포기했어요. ‘식품 수출로 농업을 살릴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 거죠. 한국도 K-푸드는 어디까지나 일반 제조·서비스 산업으로 보고, 농업은 별도의 정책 프레임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 둘 다 건강해집니다.”
K-라면, 스낵에서 식사로, 까르보나라의 반전전 세계 라면시장에서 K-라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10%가 안 된다. 전체 시장의 70%는 여전히 동남아 저가 라면이다. 60g 안팎 소포장, 간식용 ‘스낵 라면’이 주류다.
“동남아라면 시장은 작년 20% 빠졌습니다. 거긴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그 대신 한국 라면은 30% 성장했죠.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는 110g짜리, 한 끼 ‘식사용 라면’을 팔았거든요.”
그가 특히 높게 평가한 건 삼양식품의 ‘불닭’ 시리즈다.
“사람이 먹기 힘들 만큼 매운 불닭볶음면은 어느 순간부터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역시 일시적 유행이었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삼양이 까르보나라 매운맛을 내놓으면서 판을 갈아엎었습니다. 제 계산으로는 지금 불닭 계열 판매의 70% 이상을 까르보나라가 대체했을 겁니다.
까르보나라는 원래 이탈리아 낙농소스입니다. 여기에 한국식 ‘불닭 매운맛’을 합쳐 전혀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어요. 이게 바로 K-푸드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한국 음식 고집이 아니라, ‘한국적 매운맛’을 세계의 언어로 번역한 거죠.”
그는 ‘매운맛 번역’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세상에 존재하는 매운맛만 해도 수십 가지입니다. 현지 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시장은 금방 닫힙니다.”
“한국 공장에서 실어 나르는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왜 알자스까지 가서 라면 공장을 지어야 했을까. 최 회장은 ‘유통기한’부터 꺼냈다.
“한국에서 만든 라면 한 컨테이너를 유럽까지 보내면 40일이 걸립니다. 매대에 올라갈 때쯤이면 프리미엄 이미지는 이미 많이 닳아 있죠. 이게 모든 수입식품의 한계입니다.”
그의 해법은 명확하다.
1. 현지 원재료를 쓰고
2. 현지 공장에서 만들고
3. 현지 입맛에 맞춰 레시피를 바꾸는 것
“밀가루·유제품·고기·채소… 한국산 원료로 만든 제품은 해외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고추는 90% 이상 수입, 쌀은 비싸고, 축산은 사료 100% 수입이에요. 한국에서 만든 라면은 밀가루부터 고춧가루까지 거의 모두 수입 원료입니다. 차라리 그 원료가 나는 현지에서 만드는 편이, 가격·탄소·물류 모든 면에서 낫습니다.”
여기에 유럽의 ‘탄소 다이어트’ 트렌드도 더해진다.
“유럽 젊은이들은 점점 더 CO₂ 배출량이 높은 식품을 피하려고 합니다. 미국·호주 밀가루를 한국까지 가져와 가공하고, 다시 유럽으로 보내면 원료와 제품이 합쳐 3만km를 여행하는 셈이죠. 라면 한 개에 탄소 발자국이 얼마나 되는지 따지기 시작하면, 장거리 운송식품에는 점점 불리한 시대가 옵니다. 현지 생산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일본이 먼저 간 길, 그리고 ‘해외 공장 매출 8조 시대’
최 회장은 한국보다 앞서 고비용 구조를 겪은 일본 식품기업들을 자주 예로 들었다. 엔고(円高)로 수출 경쟁력을 잃은 일본은 1980~90년대에 내수를 포기하는 대신 동남아·미국으로 대규모 해외 투자를 택했다.
“아지노모토, 니신 같은 회사는 이제 매출의 60~70%를 해외 공장에서 벌어들입니다. 현지에서 만든 일본 라면·조미료를 일본으로 역수입해 물가를 잡기도 했죠. 일본은 사실상 ‘J-푸드 직접 수출’을 포기한 겁니다.”
그는 한국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제가 따로 집계해 보니, 한국 식품기업들이 해외 공장에서 올리는 매출이 이미 8~9조 원에 육박하는 것 같습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CJ·오리온·농심·팔도·대상 등 주요 회사들의 외국 법인 실적을 대략 더해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수출(국내 생산품 수출)이 18조라면, 해외 생산 매출이 이미 절반 가까이 온 거예요. 앞으로 3~4년 안에 일본처럼 ‘직접 수출’보다 ‘현지 생산·현지 매출’이 더 커지는 구조로 갈 겁니다.”
해외에서 버티는 힘: R&D·인력·시간해외 현지에서 K-푸드로 승부를 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최 회장은 세 가지를 꼽았다.
1. R&D 역량
2. 다양한 생산 인프라
3. 해외 사업을 끌고 갈 인재와 시간
“PL 회사가 되려면 대기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자기 규모 대비 더 과감한 R&D 투자가 필요합니다. OEM은 남이 개발해온 걸 찍어주면 되니까 연구소가 필요 없지만, PL은 유통사가 ‘이런 트렌드 상품 없느냐’고 물으면 우리가 레시피를 내놔야 하거든요.
또 유통사는 소스만 찾는 게 아니라, 즉석밥·만두·샐러드까지 한 번에 보고 싶어 합니다. 공장이 한 종류뿐인 회사는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국내에만 공장 5곳을 갖고 있어요. 들어와 보니, ‘소스 만들다 왔는데 즉석밥도 할 수 있네?’ 이런 식으로 일이 늘어납니다.”
사람 얘기로 넘어가면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지난 30년간 한국 식품업계에는 해외 사업을 설계하고 끌고 갈 고급 인력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자·IT·배터리로 다 빠져나갔죠. 언어 문제는 기본이고 연구개발 부문도 그렇고 국제 사업을 진행할 인재는 대기업을 포함해 전반적으로 부족한 실정입니다. 해외 공장 설립·인허가·규제 대응·영업 채널 개척까지 총괄할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게, 중소·중견기업 해외 진출의 가장 큰 병목입니다.”
최 회장은 K푸드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다음 요소로 시장에서 버틸 ‘시간과 체력’이라고 밝혔다.
“유럽에서 식품 공장 하나 세워 제대로 돌아가기까지는 최소 5년을 잡아야 합니다. 공장 부지 선정·인허가·공사에 2~3년, 생산과 IFS 같은 글로벌 인증을 받는 데 1~2년. 메인스트림 유통망(대형마트)에 깔리려면 또 3~4년이 걸립니다. CJ 독일 만두 공장은 공장 완공 후 6년 만에야 24시간 풀가동·흑자 구조가 됐어요. 그동안 에스닉 마켓(한인·중국·아시안 마켓) 위주로만 팔며 버틴 거죠. 중소기업이 유럽에 공장을 짓겠다면, ‘3년 매출 제로’를 버틸 자금과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걸 모른 채 뛰어들면 중간에 숨이 막혀요.”
글로벌 진출 위한 금융지원 전무 “제도적 개선 필요해”
K-푸드 전선에 서 있지만, 중소 식품기업에는 ‘금융 사각지대’ 여기서 자연스럽게 금융 얘기가 나온다. 최 회장이 가장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인 대목이다.
“식품은 수출 효자라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중소·중견 식품기업이 해외 공장을 짓겠다고 나서면, 어디서도 제대로 된 정책금융을 찾기 어렵습니다.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산업은행 어디에도 ‘글로벌 로컬 식품 펀드’ 같은 건 없습니다. 해외 공장을 지으면 당연히 정책금융이 따라올 거로 생각하는데, 현실은 정반대예요.”
실제 사례를 들려준다.
“프랑스 로예 공장 자금을 조달하는 데만 1년 넘게 허비했습니다. 한 은행에서는 ‘해외에서 쓰지 않는 조건’으로 대출해주더군요. 국내 사업에만 쓰고, 해외 공장에는 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K-푸드가 국가 전략산업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현장에서는 ‘해외 투자 위험이 크니 국내에만 써라’라는 대출 조건이 달리는 거죠.”
농식품 정책과 식품 산업의 ‘주소지’가 엇갈려 있는 것도 구조적 문제로 꼽는다.
“지금 한국의 식품산업은 원료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반 가공업입니다. 그런데 행정적으로는 농림축산식품부 관할 아래 묶여 있어요. 농민을 보호해야 하는 부처 밑에 있으니, 식품기업의 해외 공장 설립·M&A·현지화 투자 같은 얘기는 정책 테이블에 올리기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산업부는 로봇·자동화·반도체에는 각종 펀드와 융자를 쏟아붓지만, 식품은 제조업·IT 중심 제도 설계에서 늘 한 발 비켜나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중소 식품기업들은 ‘끼인 존재’가 된다. 농업을 살리는 주체로 불리기엔 실제 원료 구조가 다르고, 제조·서비스 산업으로 인정받기엔 고부가가치 이미지를 갖기 어렵다.
“정부 지원에 기대 사업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해외에서 공장 짓고 사람 뽑고 규제와 싸우는 기업들을 위한 맞춤형 금융 도구가 전혀 없다는 건 문제죠. 지금 구조에선 자기 돈 혹은 담보 대출로 버티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시도할 수 있는 기업이 극히 제한됩니다. K-푸드 2막이 ‘대기업 전용 무대’가 되는 걸 막고 싶다면, 이 부분이 반드시 손봐져야 합니다.”
불황이 찾아오면 라면의 부흥이 찾아온다화제를 돌려 유럽 이야기로 넘어가자, 최 회장은 특유의 거침없는 농담으로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그래요. ‘유럽 경제가 망해가는데, 거기 가서 공장을 왜 짓냐?’라고. 저는 오히려 그게 기회라고 봅니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라면은 잘 팔립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유럽 주요국의 1인당 GDP는 30년 전보다 미국 대비 크게 낮아졌고, 사회복지 부담과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성장 잠재력이 줄어든 반면, 외식비는 1인분 10~15유로까지 올라 젊은 층이 일상적 외식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점심 한 끼 먹으려면 15유로를 내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운 젊은이가 엄청 많습니다. 그럴 때 2유로짜리 라면 한 그릇은 ‘합리적 선택’이 되는 거죠. 유럽이 어렵다고요? 맞습니다. 그래서 라면이 더 잘 팔릴 겁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도 라면 수요는 오히려 늘었다. 난민·군인·저소득층의 식량으로 라면이 대체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경제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소비를 줄이는 건 외식과 프리미엄 식품입니다. 그 대신 싸고 배부른 라면·즉석밥이 올라오죠. 거칠게 말하면, 유럽이 힘들어질수록 K-라면에는 기회가 늘어납니다.”
“K-푸드는 한식(韓食)이 아니다”
최 회장은 ‘K-푸드’를 한식당의 비빔밥·불고기에 한정하는 시각을 강하게 경계했다.
“앞으로 우리가 수출·해외 진출이라고 말할 때 K-푸드는 ‘한국 사람이 만든 모든 먹거리’라고 정의해야 합니다. 오리온 초코파이도, 롯데 빼빼로도, 파리바게뜨·뚜레쥬르도, 한국식 치킨도 다 K-푸드입니다. 프라이드 치킨은 원래 미국 KFC에서 들어온 메뉴지만, 한국에서 수백 가지로 변주해 세계에 다시 수출하고 있잖아요. 이게 진짜 K-푸드죠.”
그는 프랜차이즈·브랜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미국 스시 레스토랑의 80%를 한국인이 운영하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상당 부분이 중국·베트남계로 넘어갔습니다. 한식당도 비슷한 길을 갈 겁니다. 인건비와 수익 구조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소득이 낮은 국가 출신 사업자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돼 있어요. 국가적으로 남는 건 브랜드를 가진 프랜차이즈입니다. BBQ, 굽네 같은 치킨 브랜드, K-카페, K-베이커리처럼 시스템과 레시피, 공급망을 수출하는 모델이 지속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외 한식당 숫자가 늘어나는 건 문화적으로 반가운 일이지만, 산업·수출 측면에선 한계를 분명히 짚었다.
“일반 한식당은 현지 식재료를 쓰고, 현지 인력을 쓰기 때문에 한국 경제와의 연결고리가 약합니다. 반면, 프랜차이즈는 소스·레시피·브랜드 사용료·교육 시스템까지 한국에서 설계합니다. 수출도 늘고, 고급 인력 일자리도 만들어지죠.”
알자스에서 끓기 시작한 ‘최씨 라면’의 실험이야기는 다시 알자스로 돌아왔다. 시아스의 프랑스 라면 공장은 이미 연간 2억 개 생산 규모를 갖췄고, 설비만 조금 더 넣으면 3억 개까지 키울 수 있다. 프랑스 현지 밀가루와 유제품을 쓰는 라면. 그는 그 맛에 상당한 자신감을 보였다.
“프랑스 밀은 품질이 아주 좋습니다. 제빵을 배우러 프랑스로 간 제빵사들이 한국에 밀가루를 수입해 쓸 정도죠. 현지 밀가루로 뽑은 면을 먹어보니, 저도 깜짝 놀랐어요. ‘아, 우리가 한국에서 생각하던 면보다 한 단계 위의 품질이구나’ 싶었습니다.”
메뉴 구성도 절반은 한국식 매운맛, 절반은 철저하게 현지 입맛을 겨냥했다.
“한국 사람 입맛으로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치킨·야채 라면, 그리고 네덜란드와 독일 시장을 겨냥한 고우다 치즈 라면, 스리라차 스타일 라면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에는 없는 맛들이에요. 유럽의 대형 유통사 몇 곳이 이미 시험 발주를 넣었고, 북아프리카 모로코 카르푸에서도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은 관세 40%를 내야 하지만, 프랑스산 라면은 EU-모로코 FTA 덕에 관세가 제로거든요. 물류비까지 생각해도 현지 생산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물류 리드타임은 더 극적이다.
“한국에서 주문하면 유럽 매대에 깔리기까지 6개월을 잡아야 합니다. 생산 일정 잡는 데 1~2개월, 배 타고 오는 데 2개월, 통관과 창고·유통을 거치다 보면 그렇죠. 알자스 공장에 주문하면 유럽 내는 1~2주, 북아프리카도 2주 안팎이면 도착합니다. 유통업자로서는 재고와 자금이 묶이는 기간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드는 거예요. 현지 생산을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라면 사업은 생각보다 빨리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라며 “내년(2026년) 600~800억 원 매출, 2~3년 뒤에는 천억 원 이상을 목표로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라면 3~4년 후에는 시아스의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을 넘어서는 그림이다.
인터뷰 말미, 앞으로의 ‘경영 계획’을 묻자 최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세대는 5개년 계획을 짰습니다. 지금 5년짜리 계획은 소설입니다. 2년짜리도 장편 소설이고요. 1년짜리 계획을 세우고, 그걸 유기적으로 틀어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 시대예요.”
그러면서도 흔들지 않는 세 가지 원칙을 말했다.
1. 현지 공장으로 물류·관세·탄소 발자국을 동시에 해결할 것
2. 한국적 DNA는 지키되, 레시피 번역은 과감하게 할 것
3. 정책금융 공백은 현지 투자·현지 매출로 채울 것
마지막은 정체 국면에 접어든 K푸드가 다시 제2의 전성기로 들어서기 위한 최 회장의 말을 전한다.
“한국 이름만 달고 아시아 코너에 머무르면 결국 저가 경쟁에 말려듭니다. 현지 공장에서, 현지 입맛으로, 현지 자본으로 뛰어야 K-푸드 두 번째 전성기가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최진철 회장 직격 Q&A 정리
알자스 공장에서 최씨 라면을 소개하고 있는 최진철 회장 Q. 지금 K-푸드는 ‘호황’인가, ‘위기’인가요?
A. 숫자만 보면 아직 성장입니다. 다만 라면처럼 계속 커지는 품목과, 김밥·떡볶이처럼 급속히 꺾이는 품목이 갈리기 시작했죠. 저는 지금을 ‘첫 번째 전성기 이후 조정기’라고 봅니다. 이 단계에서 현지화에 성공한 품목만 2막 무대에 남을 것입니다.
Q. 최 회장이 말하는 ‘현지화’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A. 공장만 짓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현지 원재료 + 현지 생산 + 현지 입맛 번역 이 세 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여기에 물류·탄소·관세까지 고려해야 하고요. 공장을 짓고도 3년 매출 ‘0’을 버틸 시간 투자 없이는 진짜 현지화가 아닙니다.
Q. ‘김밥 대란’은 어떤 교훈을 남겼습니까?
A. 유행은 1년, 설비는 10년입니다. 김밥 수출 전체 시장이 400억 원인데, 몇조의 시가총액이 움직였어요. 단일 품목으로 연 1,000억 매출을 5년 이상 유지할 자신이 없다면, 설비부터 넣지 말라는 게 제 조언입니다.
Q. K-푸드 수출이 국내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A. 수출 130억 달러 중 국내 농산물이 주원료인 건 1%도 안 됩니다. 김·김치·쌀가공품 정도죠. 대부분 수입 원료로 만든 가공식품입니다. 그래서 K-푸드는 일반 제조·서비스 산업, 농업은 별도 정책 영역으로 보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Q. 중소 식품기업이 해외 공장을 꿈꾼다면, 현실적인 최대 난관은 뭡니까?
A. 돈과 사람, 그리고 시간입니다. 최소 5년은 ‘투자 기간’으로 버틸 자금이 있어야 하고, 해외 규제·인증·영업을 한 몸에 끌고 갈 인력이 필요합니다. 현재 중소 식품기업을 위한 전용 해외 투자 금융이 거의 없다는 점도 큰 장애물입니다.
Q. 정책·금융 당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A. 식품을 농업 보호 프레임 안에만 가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식품산업은 이미 90% 이상 수입 원료를 쓰는 가공업입니다. ‘글로벌 로컬 식품’에 투자하는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장기·저리 금융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것만 있어도 시도할 수 있는 기업 수가 훨씬 늘어날 겁니다.
Q. 마지막으로 K-푸드 2막을 준비하는 기업들에 한마디 한다면?
A. 한국에서 살아남았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한국에서 만든 것을 파는 수출업자’가 아니라, ‘현지에서 한국식 감각으로 음식을 재해석하는 로컬 플레이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전환에 성공한 회사만 다음 10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연관 기사 : K‑푸드, 더 이상 ‘수출품’ 아닌 ‘로컬브랜드’ “현지화 없이 스테디셀러로 가기 어렵습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