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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박찬욱 <어쩔수가없다> vs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도끼>
입력 : 2025.10.28 10: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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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쏘아야 하는 시대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범죄소설 <도끼(The Ax)>를 원작 삼은 영화입니다. 지난 8월 29일 제 82회 베니스영화제가 열린 이탈리아 리도섬에서 초연(初演)됐고 한국에선 현재 개봉한 상태입니다. 리도섬 현지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다짐했지만 이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2005년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어 영화화에 난항을 겪기도 했답니다. 특히 코스타 가브라스 부부가 원작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와 ‘절친’이어서(영화화 과정에서 친분이 깊어졌다네요) <도끼>의 판권까지 보유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제작자였던, 가브라스 감독의 부인 미셸 레이가 박찬욱 감독에게 특별히 영화화를 허락하면서 <어쩔수가없다>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쩔수가없다>와 <액스>는 설정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작품입니다. 시대적인 배경도 다르고 등장인물 구도, 특히 주인공에 의해 살해 당하는 피해자들이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끼>와 <어쩔수가없다>는 각 작품을 보면 소설만 봐서는, 또 영화만 봐서는 알기 어려운 의미망이 가득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쩔수가없다>와 <도끼>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종이 인간’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은 만수(이병헌)로, 그는 제지 업체에서 해고돼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인물입니다. 부당해고에 가까웠지만 회사엔 노조가 결성돼 있지 않았고, 그는 힘없이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곧 재취업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구체적인 현실은 막연했던 이상과 너무 달랐고 재취업에 실패한 만수와 가족들은 점점 궁핍의 극한까지 내몰립니다. 자책하고 분노하던 만수는 자신과 같은 제지업체 특수용지 전문가를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허위로 구직 광고를 낸 뒤 이력서가 도착하면 강력한 경쟁자들을 차례대로 살해하기로 한 겁니다. 만수는 경쟁자를 모두 살해해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도끼>는 <어쩔수가없다>와 설정은 동일합니다. 주인공 이름은 버크 드보레. 그는 판매과장으로 4년, 생산 매니저로 16년간 총 20년을 넘게 근무했던 회사에서 해고됐습니다. 2100명이 재직 중이던 회사가 인원을 1575명으로 감원하면서 버크 역시 해고된 겁니다. 만수처럼 버크 역시 경쟁자를 살해합니다.
그런데 <어쩔수가없다>에는 <도끼>엔 나오지 않는 몇몇 중요한 상징이 등장합니다. 바로 구직 광고를 보고 희생자들이 보내온 이력서입니다.
버크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도끼>에서, 버크는 잠재적 경쟁자들이 보내온 이력서를 꼼꼼히 살핀 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력서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회사 문까지만 나를 데려다 줄 뿐이다.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 내 경력은 그 문까지 인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면접이란 것도 무언가를 팔기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며 팔 것이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말한다.’(54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력서는 인간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첫 번째 홍보물이자 전단지입니다. 이력서 앞장에는 공적 삶의 성취가 기술되지만 뒷면에는 당사자가 ‘차마 쓰지 못한’ 삶의 처연한 자리가 ‘빈 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력서를 쓴다는 행위는 개인의 생존과 가족의 부양, 삶의 무게를 종이 한 장에 압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력서는 이처럼 양면적이지요.
따지고 보면 저 이력서가 종이로 작성된다는 점, 나아가 만수와 버크가 공통적으로 다른 업종이 아닌 종이를 다루는 제지업체에 근무한다는 점도 주목을 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화이트칼라 직장인에게, 종이란 산업의 ‘쌀’과 같은 상징적 물건입니다. A4용지로 규격화된 크기의 종이는 노동조차 규격화하며, 그 위에 규격화된 형태로 기록됩니다. 그렇다고 종이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종이는 너무나 흔한 사물로서 가볍고 천하게 여겨지니까요. 구겨지면 ‘버리면’ 되는, 또 찢어지면 다른 종이로 ‘대체하면’ 되는 물성의 사물입니다. 사용가치가 사라지면 폐기되는 노동자의 운명을 종이는 닮았습니다. 원작자 웨스트레이크가 버크의 재직 회사를 다른 업종이 아닌 제지업체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이런 종이의 특성과 유관하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총<어쩔수가없다>에서 만수가 살해하는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희생자들이 모두 제지 전문가란 점입니다. 그런데 원작 <도끼>에는 희생자들 간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숨겨져 있습니다. 버크가 검토하는 저들의 이력서에 그 단서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그들이 모두 한때 군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에드워드 G. 릭스는 해군에서 복무했고, 개럿 L. 블랙스톤은 베트남과 오키나와에 주둔했으며, 호크 C. 엑스멘은 해병대 교관이었습니다. 이는 당대의 시대상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가능하긴 합니다.
미국은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징병제였다가 1973년에 모병제로 바뀌었으니, 희생자들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도끼>의 첫 문단의 내용을 고려하면 이들이 자신의 이력서에 군 경력을 상세히 적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정보입니다. 버크는 소설 초반부에 이렇게 사유합니다.
‘나는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살인을 하거나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7쪽)
버크는 소설 첫 문장에서 아버지가 가져온 권총(루거) 한 자루를 이야기합니다. 버크는 이 루거로 경쟁자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하는데, 이 루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아버지가 독일군에게 빼앗은 전리품이었습니다. 1944~1945년 참전했던 아버지를 두고 버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으니 그 방면의 ‘경력 사원’이라고 말이지요.
아버지가 전시에 적군을 살해했다는 점, 아들 버크가 아버지가 전쟁 때 썼던 루거로 타인을 살해한다는 점, 그리고 버크의 희생자들이 군인이었다는 점은 뭘 의미할까요. 아버지 세대는 국가가 정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던 세대였지만, 이제 그 시대가 저문 뒤의 아들 세대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시대가 됐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요.
군대와 기업은 둘 다 규율과 명령에 기반한 조직입니다. 당시만 해도 군인들이 쏘아야 하는 대상은 적군이었습니다(아버지는 독일군, 희생자들은 베트콩들). 그러나 그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한 뒤에 그들이 쏘아야 하는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 때 적군을 쏘았던 바로 그 총으로, 이제 내 옆의 경쟁자를 제거해야만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게 됐으니까요.
따라서 버크가 사용하는 루거는 ‘역사적 폭력(전시 살인)’이 어떻게 ‘구조적 폭력(생계형 살인)’으로 전환되는가를 이해시키는 결정적 열쇠입니다. <어쩔수가없다>가 만수라는 개인이 처한 고통에 더 가까이 서서 이를 들여다보는 반면, <도끼>는 아버지 세대에서 아들 세대로 이어지는 ‘폭력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한때 가장 강직했던 군인이었던 희생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무력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포효하는 만수<어쩔수가없다>의 결말은 재취업에 성공한 만수가 짐승처럼 포효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고 거대한 공장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환호하는 그는 승리자이지만, 그의 승리는 상처뿐이기도 합니다. 이때 카메라는 만수의 표정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고 거대하고 육중한 크기의 기계들 옆에 선, 작고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만수를 보여줍니다.
만수가 취업한 제지업체는 인공지능(AI)으로 인한 전면 자동화가 이뤄진 곳으로, 만수는 관리자로서 사람 대신 기계를 다루게 됩니다. 원작 <도끼>가 집필되던 1997년엔 AI란 주제까지 아우를 수 없었겠지만 <어쩔수가없다>엔 AI로 인해 변화한 시대상까지 포함된 것이지요.
‘마침내 자동화 시대가 도래했고 노동자들에게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1950, 60년대에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수만 명씩 직장을 잃었다. 이들 대부분이 노동조합을 결성했으며 30여 년간 힘을 결속하여 철강 산업, 광업, 자동차 산업 등에서 대규모 노동 궐기를 강행한 결과 실업의 고통은 다소 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오래 전 일이고 자동화로 희생된 미국 근로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다른 분야로 흡수되었다. 자동화로 인한 변화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점점 더 그 여파가 커져고 있다.’(75쪽)
박찬욱 감독이 <어쩔수가없다>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던 이유가 위 문장에 숨어 있지 않을까요. 인간을 위한 보호막이 사라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리’의 문제는 노동자인 모든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버크와 만수는 그런 점에서 우리 절박한 현대인의 초상입니다.
[김유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