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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권의 뒤땅 담화] “어, 골프장 잔디가 왜 이리 좋아졌어?”
입력 : 2025.10.22 16: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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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더운 날에도 잔디 상태가 굉장히 좋은데.”
경기도 여주 아리지CC에서 퇴직한 동료끼리 단체 골프를 하는 도중 동반자가 페어웨이를 걸어가며 탄성을 자아냈다. 1인당 그린피도 인근 다른 골프장보다 2만원 안팎 저렴해 몇 년 전부터 정기모임을 갖는다.
그린피와 잔디 상태를 감안하면 젊은 층에까지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이다. 페어웨이 잔디는 한국 잔디(중지)여서 원래 양호했고 티잉 구역도 지난해 무더위 이후 서양 잔디에서 한국 잔디로 교체했다.
올해 무더위 속에 모든 코스를 둘러봐도 녹은 잔디로 인한 맨땅을 찾기 어려웠다. 디벗(Devot)이 적어 샷을 하기에도 원활했다. 전 코스가 녹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하다. 양잔디는 그린과 에지 주변에 있을 뿐이었다.
포천힐마루CC는 45홀 전 코스를 아예 처음부터 한국 잔디로 깔아 2023년 개장 이후 현재 최상의 상태를 자랑한다. 매트가 아닌 잔디 위에서 티 샷을 날리는 맛이 일품이다.
이 골프장이 한강 이북에서 단체 골프의 성지로 통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5개 코스별로 난이도도 달라 골퍼들이 실력에 따라 다양한 묘미를 즐긴다.
남한강을 끼고 경기도 여주 금사면에 아늑히 자리한 이포CC도 한국 잔디로 잘 조성돼 골퍼들에게 호응을 얻는다.
코스마다 양 옆으로 수려한 수목으로 둘러싸여 보금자리를 방불케 한다.
조밀하게 한국 잔디로 조성된 페어웨이에선 웬만한 미스샷에도 디벗이 생기지 않는다. 티잉 구역 잔디도 촘촘해 골퍼들이 원하는 스윙을 만들어낸다.
지난 여름 라운드를 즐긴 골퍼들은 대부분 잔디 상태에 만족하는 분위기다. 골프장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예전에 비해 훨씬 양호하다.
폭염과 폭우가 동시에 겹친 지난해는 골프장으로선 근래에 보기 드물게 힘든 시기였다. 그린 주변과 티잉 구역에 식재된 잔디(서양 잔디)가 대부분 녹아내려 맨땅에 티를 꽂아야 했다.
임시방편으로 티잉 구역에 인조 매트를 깔았지만 스탠스를 취하기에 매우 불편했다. 어색한 착지 때문에 스윙을 제대로 못하겠다며 캐디와 동반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티 마크 밖에 나가는 사례도 흔했다.
프로 대회에서도 잔디가 말랐거나 아예 고사된 곳에선 공을 옮겨 놓고 진행하는 프리퍼드 라이(Preferred lie)를 수시로 적용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를 기점으로 골프장들이 이상 기후를 감안해 대대적인 잔디 교체에 나섰다. 그대로 놔뒀다가는 앞으로 골프장 자체가 황폐화할 위험에 처할 것으로 직감했다.
올해 골프장 상태가 전반적으로 양호한 것은 바로 잔디 교체 때문이다. 서양 잔디인 켄터키블루그래스에서 한국 잔디인 중지로의 교체가 가장 흔하다.
대부분 티잉 구역을 더위에 강한 한국 잔디를 바꾸었고 페어웨이를 갈아엎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잔디 품종 교체에 18홀 페어웨이 기준 40억원 안팎 소요된다고 한다. 골프장들이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블랙스톤이천CC도 올해 새로 잔디를 교체했다. 상반기에 9홀씩 차례로 폐장해 27홀 3개 코스 전체 페어웨이와 러프를 서양 잔디에서 한국 잔디(중지)로 바꿨다. 교체 비용만도 60억원을 상회했다.
지난해 큰 피해를 입은 해남 파인비치CC는 고온에 강한 새로운 품종인 금잔디(난지형)를 심었다. 이외 여주 360도CC와 안성 마에스트로 CC 또한 한국 잔디 골프장으로 탈바꿈했다.
서양 잔디는 겨울에도 녹색을 띠는 추위에 강한 한지형(寒地)형 잔디이다. 잎이 가늘고 밀도가 높아 한국 잔디에 비해 절반 이상 짧게 깎을 수 있다.
습도가 높고 더운 여름철엔 성장이 느려지고 힘이 약해 물러지거나 고사하기 쉽다. 공이 땅에 거의 달라붙어 정확한 임팩트가 요구된다.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고 촘촘하게 형성돼 디벗 자국이 크고 선명하게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종류로 켄터키블루 그래스가 있고 톨 페스큐, 파인 페스큐 등도 있다.
켄터키블루그래스는 페어웨이와 티잉 구역, 좋은 품질로 평가받는 벤트 그래스는 그린에 주로 사용된다. 잎이 매우 가늘고 촘촘해 짧게 깎아 그린 스피드를 높인다.
고온 다습한 한국에선 관리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데 일부 골프장에선 페어웨이에도 사용한다. 1년간 관리비용이 한국 잔디보다 5억원 이상 더 든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국 잔디를 좋아한다. 공이 잔디에 약간 떠 있어 쓸어 치기에 적당해 뒤땅(Fat shot)이나 토핑(Topping)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잔디, 들잔디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잔디는 고온 다습한 여름에 강해 난지(暖地)형 잔디로 불린다. 대부분 골프장이 사용하는데 금잔디는 가늘고 추위에 약해 남쪽 골프장에서 주로 조성된다.
한국 잔디는 잎줄기가 강하고 꼿꼿해 공을 떠받치는 힘이 좋고 밟아도(답압) 잘 견딘다. 여름 전후 5개월간 공을 치기에는 최상이지만 추워지면 색깔이 변해 힘을 잃는다. 서양 잔디와 한국 잔디에 대한 골퍼 선호도도 다르다. 양탄자 같이 부드러운 서양 잔디에선 정확한 타격이 필요하다. 클럽이 공보다 조금만 뒤를 가격해도 두꺼운 뗏장이 일어난다.
제대로 맞히려고 용을 쓰다 보면 이젠 공 머리를 때린다. 클럽에 가해진 충격으로 손도 아프다.
그린 주변에선 공이 거의 바닥에 붙어 이런 상황에 처하면 아마추어들은 쩔쩔 맨다. 범프 앤 런(Bump & run)이나 공을 굴려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데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요즘엔 겨울에도 초록빛을 발하는 서양 잔디 골프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잔디연구소 통계(회원사)에 따르면 페어웨이를 한국 잔디로 조성한 골프장은 80여 곳으로 서양 잔디 골프장보다 4배 정도이다.
그동안 서양 잔디 골프장은 골퍼들의 선호에 힘입어 그린피를 상대적으로 높게 받았다. 비싼 관리 비용에도 품질을 유지할 명분이 있었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무더위에 한국 잔디에 자리를 내주는 형국이다.
굿 샷을 구사하고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을 만끽하고 멋진 다운 블로(Down blow) 후에 뗏장이 멀리 날아가던 것도 옛 모습이 되고 있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