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 | Trump] 트럼프, 글로벌 무역 체계 ‘리셋’

    입력 : 2025.10.17 14:57:31

  • 수출의존 높은 한국에겐 도전이자 기회
    다자협력 네트워크 통해 목소리 내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자유무역에 기반한 국제 통상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과 함께 출범한 2기 행정부는 2025년 4월 2일 행정명령(EO 14257)을 시작으로 7월 31일, 9월 5일 잇따라 개정 명령을 내리며 사실상 ‘관세 체계 리셋’을 단행했다. 기존 FTA나 WTO 양허관세를 뛰어넘어 국가별·품목별·조건부로 15~25% 기본율, 경우에 따라 최대 50%까지 적용하는 상호관세 체계가 가동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보호무역이 아니라 국제통상 규칙 위에 새로운 규칙을 덮어쓴 조치다. 관세가 단순한 무역 수단을 넘어 재정 수입, 제조업 부흥, 안보 논리와 결합하면서 정권이 바뀌어도 되돌리기 어려운 구조가 마련됐다.

    트럼프, ‘美 제조업 부흥’ 기치

    실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모든 교역 상대국에 기본 관세를 부과하고, 무역적자 규모가 큰 국가에는 추가 관세를 더하는 상호주의 모델을 도입했다. 이는 단순히 수입품을 비싸게 만드는 보호무역조치가 아니라, 제조업을 되살리는 정치적·경제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관세 수입은 재정 재원으로 연결돼 감세나 현금 환급에 쓰이고, 그 대가는 ‘미국 제조업 부흥’이라는 정치적 약속으로 귀결된다.

    미국 내에서는 제조업이 다시 중산층을 지탱할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 제조업의 절대 강자였지만, 탈제조업화와 글로벌 분업 속에서 비중은 꾸준히 줄어왔다. 이번 관세 정책은 그런 구조적 쇠퇴를 되돌리려는 시도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부소장은 최근 열린 제26회 세계지식포럼(WKF)에서 “미국의 관세 부과가 단순한 무역정책을 넘어서 정치적 도구이자 재정 수입원으로 자리잡았다”며 “미국 내 오래된 관세 정책, 예를 들어 1930~60년대 도입된 ‘설탕세’ ‘치킨세’ 등이 현재까지 유지되는 것은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관세의 영향은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미 FTA에도 불구하고 한국산 자동차, 철강에는 15~50% 신규 관세가 부과됐다. FTA가 있어도 미국의 비상경제권(IEEPA)에 근거한 관세 부과가 우선할 수 있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해석이 어떠하든 한국은 대미 의존도가 큰 만큼 미국 관세 조치의 직접적인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자동차와 철강 등 주요 수출품이 상호관세 대상에 포함된 데다,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충격파가 불가피하다. 단기적으로는 업종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유예 기간·스냅백 조항 등 세부 조건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실제 트럼프발 관세 쇼크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주요 대미 품목의 수출 규모가 급감했다. 자동차·철강·가전을 포함한 고관세 품목이 직격탄을 맞았다. 반면 반도체·석유제품·무선통신기기를 비롯한 무관세 품목이 호조를 보이면서 부진을 만회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합의가 끝나지 않은 만큼 당분간은 통상환경 불확실성이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 8월 대미 수출액은 87억 4000만달러로 전년 동기에 견줘 12% 하락했다. 지난 2023년 1월(80억590만달러) 이후 2년 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온 것이다. 감소폭은 코로나19 대유행 시절인 지난 2022년 5월(29.4%) 이후 가장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분쟁을 중재할 기구는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WTO 상소기구가 2019년부터 마비 상태에 빠져 있고, 급기야 미국은 WTO 체제의 종식을 고했다. 회원국들은 분쟁해결기구(DSB)의 개점휴업을 인정했고, 유럽연합(EU)·칠레·브라질 등이 참여하는 임시상소중재(MPIA)만이 제한적으로 가동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MPIA는 참여국 간에만 효력이 있다. WTO라는 다자 규범의 구속력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FTA 역시 힘을 잃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존 협정을 ‘국익 우선’ 원칙으로 재해석하거나 무력화했다. 결국 통상환경은 규범에서 거래로, 제도에서 정치와 힘의 논리로 이동했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무역 성장세는 멈추거나 감소했다. 특히 외국인의 타국 투자 규모를 보여주는 FDI(외국인 직접투자)는 20년 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며 “세계화가 쇠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의 관세전쟁은 이미 상당 기간 이어져온 반세계화 흐름 속에서 분석해야 한다. 그것은 ‘원인’이라기보다 반세계화 흐름의 ‘결과’에 가깝다”고 말했다.

    한·미 추가 세부협상 진통

    미국은 주요 동맹국과 15% 관세 협상을 끌어낸 뒤 각종 투자 약속과 함께 비관세 장벽을 완화한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문서화하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우리나라는 추가 세부 협상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구미에 맞추려 대규모 투자 보따리를 풀었음에도, 정작 기대했던 철강 관세 인하는 회담 화두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 참여 압박이 거세다.

    일단 조선업 협력펀드를 포함한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펀드 조성 방안과 집행 방식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대미 투자 펀드는 조선 분야에 1500억달러, 에너지·배터리·반도체·의약품·인공지능(AI) 등 전략 산업 분야에 2000억달러 규모로 조성된다.

    미국은 대미 투자 펀드 이행 계획과 투자 분야 선정, 수익 배분 등을 두고 한국에 추가 요구를 쏟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직접 투자액 5% 외에 투자 펀드 대부분을 대출과 보증 중심 ‘금융패키지’로 구성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은 직접 투자를 늘리고 구체적 이행 계획도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미국 측은 대미 투자 펀드가 트럼프 대통령 지시를 받아 투자되고, 향후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입장이라 양측 이해관계가 확연히 엇갈린다는 의미다.

    정인교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이 일본·EU와의 합의 내용을 다 공개하지 않은 상태이고, 필요한 부분만 행정명령을 통해 밝혔기 때문에 우리도 세부 정보를 파악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며 “미국 내에서도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당장 판을 깨기보다는 협상을 통해 양측 입장을 조율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인력 비자 쿼터 확대와 한미 무제한 통화스왑 체결 등의 조치를 무역협상과 연계해 끌어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한국 조선사들이 원활하게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 부흥)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번스·톨레프슨 수정법(미국 군함 해외 건조 금지 규정)과 존스법(미국 연안 사용 상선 미국 조선소 의무 건조 규정) 개정 등에 대한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무역 갈등, 경제 이슈 넘어서 안보문제로
    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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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제조업 부활 전략은 한국에도 도전이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수출 의존도가 높고, 대미·대중 교역 비중이 크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면서 생기는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면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다.

    현대차와 제너럴모터스(GM)의 협력, 삼성전자와 테슬라의 반도체 협력,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원전 협력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과 원전은 한국의 비교우위가 뚜렷한 분야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하는 대신 한국을 파트너로 삼는 흐름은 점차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배터리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중국과 달리 미국 시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파트너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협력 기회와 동시에 리스크도 존재한다. 최근 조지아주에서 대규모 불법체류 단속으로 한국인 근로자들이 구금된 사태는 양국 협력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배터리 공장을 짓고 운영할 경우 운영 노하우 등을 교육하는 데 국내 전문가의 출장은 필수적이다. 미국에는 배터리 산업이 한국만큼 발전해 있지 않은 만큼 관련 전문가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조지아 구금 당시 B-1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던 근로자들 역시 구금시설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진 것이 문제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런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다시 국내 전문가를 해외로 보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설령 한미간의 협약이 구체화돼 불확실성이 사라졌다고 해도 근로자 개인 입장에서는 회사의 권유에도 출장을 꺼릴 수 밖에 없다. 미국 구금시설 내에서의 부당한 대우나 인종차별 등이 이미 논란이 된 마당에 장기 출장은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미국에 투자하는 분야의 상당수가 미국에는 없는 제조업의 약한 고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문제점은 더 심각하다.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이번 사태로 인해 트럼프 정부가 미국에 내재화하려고 했던 첨단 생산시설들의 상당수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이를 봉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숙련 인력의 비자 발급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돼 온 과제였지만, 이번 사건으로 산업 협력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현실적 위험이 드러났다. 결국 한미 협력이 제도적 뒷받침 없이 확대될 경우, 인력 문제 같은 ‘보이지 않는 변수’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다양한 시나리오 하에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비슷한 상황에 있는 국가들과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통상 관련 한 전직관료는 “(우리나라가) EU뿐 아니라 일본 등 유사 입장국과 협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포함해 “미국을 제외한 다자 무역 질서를 지키려는 국가들이 모이는 네트워크에는 무조건 많이 들어가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커틀러 부소장은 “국제 무역의 현재 갈등은 단순한 경제 이슈를 넘어 안보, 투자, 그리고 사회적 가치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있다”며 “한국이 이러한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한 만큼 다각적인 국제 협력과 내실 있는 정책 대안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수 기자 · 우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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