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섭 특파원의 차이나 프리즘] 트럼프가 초래한 新냉전 北·中·러 ‘결속’, 韓·美·日의 선택은

    입력 : 2025.10.15 11:48:51

  •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열병식은 세계 질서의 균열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한·미·일 동맹이 관세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균열을 노출한 틈에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보며 ‘반(反)서방’ 결속을 과시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밀어붙이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글로벌 질서를 뒤흔들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 내 ‘신냉전’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이번 열병식이 냉전 시대의 전형적인 진영 구도를 떠올리게 한 상징적 장면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66년만에 北·中·러 정상 모여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지난 9월 3일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리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지난 9월 3일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리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북·중·러 정상은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나란히 서서 열병식을 지켜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가운데 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오른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왼쪽에 자리했다. 북·중·러 정상이 한 자리에 선 것은 1959년 이후 66년 만이다. 이 모습은 중국중앙(CC)TV 등 관영 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세계는 평화냐 전쟁이냐, 대화냐 대결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모든 국가와 민족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화합하며 서로 도울 때만 공동의 안보를 유지하고, 전쟁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며,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다”고 결속을 촉구했다.

    특정 국가와 세력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관세 전쟁을 앞세워 세계 질서를 흔드는 트럼프 행정부와 이에 동조하는 서방 동맹의 냉전적 공세가 계속된다면 단호한 국익 수호 의지로 승리할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시 주석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 주석의 연설이 끝난 뒤 진행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서는 개량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東風·DF)-61을 비롯한 신무기가 대거 공개됐다. DF-26D 등 극초음속 무기와 함께 징레이(驚雷·JL)-1을 포함한 ‘핵 3축 체계’도 처음 선보였다.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열병식 이후 같은 차량을 타고 이동해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한군 파병 문제 등을 논의했다. 푸틴 대통령은 예상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동원되고 있는 북한군 파병을 결정한 김 위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6월 평양에서 전략적 동반자관계 조약을 맺은 뒤 여러 분야에서 북·러 관계가 강화됐다고 답했다. 타스통신 보도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에 대한 지원은 형제의 의무”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은 열병식 다음날인 지난 9월 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번 정상회담은 2019년 6월 시 주석의 평양 방문 이후 6년 2개월 만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날 회담에서 “중·조(중·북)는 운명을 함께하는, 서로를 돕는 좋은 이웃 겸 친구이자 동지”라며 “두 나라 모두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국가로 공동의 이상과 신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과 북한은 국제 및 지역 문제에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 공동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며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은 항상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며, 북한과의 조율을 계속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대한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양국의 우호적 감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양국 관계를 끊임없이 심화·발전시키는 일은 우리의 확고한 의지”라고 화답했다. 또 “양국 간 호혜적인 경제·무역 협력을 강화해 더 많은 성과를 이루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경제 분야부터 양국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의도로 읽히는 대목이다.

    시 주석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은 항상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며, 북측과의 조율을 계속 강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최대한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이 중국 견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북한에는 대화 재개 메시지를 보내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북·중 간 대외 정책 공조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김 위원장이 다음달 북한에서 열리는 열병식에 시 주석을 국빈으로 초대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 관계의 ‘톱다운’ 방식 정상화 선언으로 해석된다. 이번 회담에는 최선희 외무상과 김덕훈 노동당 경제부장 등이 배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 위원장의 딸 김주애는 회담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 주석은 김 위원장과의 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 등 한반도 핵심 현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해 ‘북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견제하겠다’는 구상을 드러냈다. 두 정상은 회담 뒤 단독 만찬을 함께했으며 이는 국빈 방문급 예우로 평가된다. 다만, 이번 기간에 북·중·러 3자 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美·中, ‘APEC 정상회담’ 결과 주목
    지난 9월 3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 <사진 연합뉴스>
    지난 9월 3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 <사진 연합뉴스>

    열병식과 맞물려 미국은 합성마약 원료 제조·판매에 관여한 중국 화학업체를 제재하기로 했다. 이에 중국은 미국산 특수 광섬유에 최고 78.2%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며 맞불을 놨다.

    미국과 중국이 지난 6월 런던 합의 이후 ‘관세 휴전’에 들어갔지만, 이번 열병식을 기점으로 무역전쟁 재발의 불씨가 지펴진 것이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9월 4일부터 미국산 ‘차단파장 이동형 단일모듈 광섬유’에 대해 33.3~78.2%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해당 광섬유는 일반 광섬유보다 차단파장을 높게 조정해 해저케이블이나 장거리 고속통신망에 주로 쓰인다. 이번 조치는 미국의 중국 화학업체 제재와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강화에 대한 맞대응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전날 중국 화학업체를 상대로 제재를 가했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미국인을 상대로 한 합성 오피오이드 제조·판매에 관여한 혐의로 중국 화학업체 광저우텅웨와 이 회사 대표자 2명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고 이날 밝혔다. 합성 오피오이드는 마약 펜타닐의 원료로 사용된다. 또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8월 29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가 중국 내 생산시설에 미국산 반도체 제조 장비를 공급할 때 일일이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한 포괄허가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을 억제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계획에 따라 빠르게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은 지난 9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한 제4차 미·중 고위급 무역 회담에서 미국 내 안보 우려가 제기된 중국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처분 방안에 대해 큰 틀에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미·중 정상회담 성사 여부에 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무역 협상이 매우 잘 됐다”며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정말로 구해내고 싶어 했던 ‘특정’ 기업에 대해서도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특정 기업은 틱톡이다. 그러면서 오는 9월 19일 시 주석과 이번 협상에 대해 대화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도 이날 협상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양측이 틱톡과 관련해 프레임워크(틀)에 합의했다고 확인했다. 그러고는 “프레임워크는 틱톡을 미국이 통제하는 소유(구조)로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협상 대표 겸 부부장도 미국과 틱톡을 포함한 경제·무역 문제에 대해 솔직하고 심도 있으며 건설적인 소통을 진행했다며 기본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 19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약 3개월 만에 전화 통화를 가졌다. 트럼프는“틱톡에 대한 합의를 포함해 무역, 펜타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진전을 이뤘다”며 “(10월 말 있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시 주석과 만나고 내년 초에 중국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미·중 정상의 APEC 계기 방한(訪韓)이 사실상 확정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시 주석의 방한은 2014년 7월 이후 약 11년 만이다. 시 주석도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실용적 대화였다”며 중국계 동영상 플랫폼인 틱톡 합의와 관련해 “미국 내 중국 기업을 위한 개방적이고 공정한 차별 없는 환경을 촉구했다”고 했다.

    [송광섭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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