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BM 시장 ‘프리미엄의 역설’ 마주할까 단가 압박, 기술로 방어 나선 韓 반도체

    입력 : 2025.09.12 17:12:51

  •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엔비디아로부터 HBM3E 12단 제품 품질 검증을 받는 한편 HBM4 1c 나노 공정 양산 준비 완료 단계에 있다.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엔비디아로부터 HBM3E 12단 제품 품질 검증을 받는 한편 HBM4 1c 나노 공정 양산 준비 완료 단계에 있다.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의 대표 프리미엄 메모리로 불리지만, 시장에서는 조만간 ‘프리미엄의 역설’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성능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가격은 하락 압박을 받고 수익성 방어는 한층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셈이다.

    미국 금융증권사 골드만삭스는 지난 7월 보고서를 내고 2026년 고대역폭메모리(HBM)의 평균판매가격(ASP) 하락과 공급 과잉 가능성을 지적했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 등 주요 업체들이 앞 다퉈 HBM3E와 HBM4 투자를 확대하면서 2026년에는 수요 증가 속도를 공급이 추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골드만삭스는 이 경우 평균 판매 가격(ASP)이 두 자릿수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HBM 공급에서 총 생산용량은 2026년 월 48만 5000개의 웨이퍼 수준으로 확대되고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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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성장세도 조정됐다. 공급 성장률이 최대 48%로 상향 조정되지만 수요 성장률은 38%로 예상된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전통의 글로벌 메모리 강자 삼성전자의 움직임은 시장 구도 변화를 가속하는 변수로 꼽힌다. 삼성전자의 향후 기술 돌파 속도와 생산·공급 상황에 따라, 지금까지 엔비디아 물량을 대부분 확보해온 SK하이닉스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삼성전자는 HBM3E 인증과 공급을 목표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차세대 제품인 HBM4 준비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마이크론 역시 글로벌 주요 거점에 생산 능력을 빠르게 키우고 시장 확장에 나서면서 경쟁은 한층 격화되고 있다. 공급자가 늘어나면 단가 협상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HBM의 수익성 하락 압박은 최근 삼성전자 실적 발표에서도 드러났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HBM3E 공급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수익성에 부담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으로 해석됐다.

    HBM은 기존 D램 대비 가격이 3~5배 높음에도 불구하고 AI 수요 덕에 ‘없어서 못 파는 메모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경쟁사들의 증설이 이어지면서 단가 방어가 점점 힘들어지는 구조적 변화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객사들은 성능과 안정성 못지않게 가격 협상력을 중시하고, 공급자들은 프리미엄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 효율, 수율 안정성 같은 기술적 차별화에 더 집중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결국 HBM 시장은 앞으로 ‘성능 경쟁’과 ‘가격 경쟁’이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 HBM이 프리미엄 지위를 지킬 수 있을지, 새로운 조정 국면에 들어갈지는 향후 2~3년간의 투자와 고객사 협상에서 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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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IC이 주도하는 수요의 새 동력

    HBM 수요를 이끌어온 주역은 지금까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였다. AI 학습과 추론 시장을 사실상 장악한 엔비디아의 GPU가 HBM 채택을 확산시킨 덕에 ‘HBM=GPU 메모리’라는 공식이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시장 구도는 서서히 바뀌고 있다. AI 전용 ASIC(Application Specific Integrated Circuit)가 GPU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흐름이 가속하면서 HBM 수요의 새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6년에는 ASIC 기반 AI 칩에서의 HBM 채택량이 전년 대비 82%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GPU 수요 증가율을 웃도는 수치다.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들이 비용 절감과 효율 극대화를 이유로 GPU 대신 자체 설계한 ASIC 칩을 늘리면서 나타나는 변화로 풀이된다. 구글의 TPU, 아마존의 트레이니엄, 마이크로소프트와 오픈AI의 협력 칩 등 맞춤형 프로세서가 대표적이다.

    GPU는 범용성이 장점이지만 전력 소모가 크고 가격이 비싸다. 반면 ASIC은 특정 연산에 최적화돼 있어 속도와 효율이 GPU를 앞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초거대 AI 모델 학습과 추론 과정에서 낮은 전력 대비 높은 성능을 원하는 빅테크 기업들의 요구와 맞물려 채택이 늘고 있다.

    ASIC 채택이 늘어나면, HBM의 역할도 달라질 전망이다. 단순히 GPU 보조 메모리가 아니라, ASIC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시장 판도도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엔비디아의

    H100, B100 같은 GPU 수요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의 공급 협상력을 좌우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대형 클라우드 기업들이 직접 ASIC을 설계해 파운드리에 위탁생산하고 동시에 HBM 공급사와 별도 계약을 맺는 구조가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GPU 제조사 중심이던 수급 구조가 클라우드 기업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가격 협상력이 더욱 고객사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거론된다. GPU 시절에는 엔비디아가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모리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라우드 업체들이 다수의 파운드리와 메모리 업체를 경쟁시킨다면, HBM 단가 압박은 훨씬 더 거세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5월 대만 타이베이 난강 전시관에서 개최된 ‘컴퓨텍스 2025’에서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전시된 HBM에 사인을 남겼다. <사진 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5월 대만 타이베이 난강 전시관에서 개최된 ‘컴퓨텍스 2025’에서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전시된 HBM에 사인을 남겼다. <사진 연합뉴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단순한 위협만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온다. ASIC이 GPU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수요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효과를 내면서 특정 기업 의존도가 줄고 HBM 전반의 수요 기반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공급자 입장에서는 GPU에 이어 ASIC까지 고객 맞춤 요구가 늘어나면서, 제품 차별화와 커스터마이즈 역량을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결국 HBM 시장은 GPU라는 단일 축에서 ASIC이라는 새로운 축이 더해지는 다원화 단계에 진입할 전망이다. 이 변화는 단기적으로는 가격 협상 압박을 키우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수요 기반을 확장하고 기술 경쟁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HBM4가 답…프리미엄 지킨다

    HBM 시장이 단가 압박과 공급 과잉 우려에 직면하면서, 업계가 내세우는 해법은 첫째도 둘째도 ‘기술’이다. 특히 차세대 HBM4가 프리미엄 지위를 방어할 마지막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HBM4는 HBM3E 대비 대역폭이 약 2배 넓어지고 전력 효율도 20% 이상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데이터 전송 속도는 최대 2TB/s에 달하며, 적층 층수는 최대 12단까지 구현된다.

    엔비디아, AMD, 인텔 등 주요 고객사들이 이미 HBM4 설계에 맞춘 차세대 GPU와 ASIC 로드맵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HBM4는 단순히 성능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AI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핵심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트렌드포스는 보고서에서 HBM4가 등장하면 가격 압박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제품군이 다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성능 격차가 크기 때문에, 고객사들이 낮은 가격만으로 공급사를 고르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특히 AI 모델이 커지고 전력 효율 요구가 높아질수록, 검증된 HBM4 공급 능력이 구매 결정의 핵심 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연혁_SK하이닉스 뉴스룸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연혁_SK하이닉스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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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하이닉스는 이미 세계 최초로 HBM4 샘플을 출하했다고 발표했고, 내년 본격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HBM4에서는 수율 안정성과 전력 효율을 무기로 다시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6세대(1c) D램 개발을 마무리하며 HBM4 대응 기반을 확보했다. 마이크론도 북미 고객을 중심으로 HBM4 설계 승인을 확보해 입지를 넓히려 하고 있다.

    문제는 수율과 안정성이다. HBM4은 적층 구조가 복잡해 미세 공정에서 불량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수율 확보가 곧 수익성과 직결된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각사는 단순히 ‘빠른 양산’보다는 안정적인 생산 체계를 먼저 시장에 보여주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고객사 입장에서도 단가보다 공급 안정성과 품질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HBM4 경쟁은 가격이 아니라 기술로 승부가 갈릴 것”이라며 “성능과 효율, 그리고 공급 역량에서 차이를 보여야만 프리미엄 지위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HBM4는 공급 과잉 국면에서도 시장이 ‘양산 경쟁’이 아닌 품질 경쟁의 단계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다른 관계자는 “결국 HBM4는 메모리 업계가 직면한 프리미엄 방어전의 시험대로 볼수 있다”고 말했다.

    AI 폭증 속 공급 과잉 우려도

    HBM 시장에는 공급 과잉과 가격 조정 우려가 따라붙지만, 장기적인 그림은 여전히 성장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AI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단기적인 가격 변동에도 불구하고 전체 시장은 꾸준히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발표에서 AI 메모리 시장이 2030년까지 연평균 30%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AI 모델이 대규모로 커지고, 학습뿐 아니라 추론 단계에서도 고대역폭 메모리 채택이 늘어나면서 시장 규모는 수천억달러대로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엔비디아뿐 아니라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클라우드 기업이 자체 AI 칩을 내놓는 것도 이런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가격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은 지속 제기된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 과정을 오히려 산업 구조가 성숙하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과거 D램 시장이 단가 경쟁을 거치며 ‘규모의 경제’와 ‘기술 차별화’라는 두 축으로 재편됐던 것처럼, HBM 시장도 같은 궤적을 밟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고객사들이 단가만 보던 단계에서 벗어나, 성능·전력 효율·공급 안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따지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의미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 마이크론은 이미 차세대 HBM4 이후 로드맵까지 제시하며 장기 경쟁 구도를 준비하고 있다”며 “단순히 생산량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파운드리·클라우드 업체와 협력해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확장하면서 특히 고객사와 공동 개발을 강화해 수요 변동에 유연하게 대응하려는 전략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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