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챙기는 마음과 포용적 문화

    입력 : 2025.09.03 16:07:35

  • ‘공유 하우스’는 여러 사람이 집 하나를 마련해서 함께 거주하면서 개인 침실은 각자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거실, 부엌 등 공동 공간을 나누어 쓰는 주거 형태를 말한다. 주거비를 줄이려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2013년경부터 빠르게 확산하기 시작해 2019년에 1020가구, 2025년 현재 7300가구를 넘어섰다. 하지만 가족같이 강한 유대로 묶이지 않은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작은 일에도 서로 다투고 대립하고 상처받기 일쑤다.

    이서수 작가의 단편소설 <빛과 빗금>(소설집 <초록 땀>에 수록)은 화자인 ‘나’(민정)가 친구 혜지가 마련한 공유 하우스 ‘미미소’에 들어가면서 생겨난 갈등 양상을 다룬다. 미미소(美味少)는 “아름다운 집을 만들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되도록 적게 쓰며 살자”라는 뜻으로, 친한 친구들 몇 사람이 돈을 모아서 설립했다.

    그러나 “어떤 회사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발그레한 분홍빛이던 “안색”이 “회색 묘비”처럼 변할 수도 있듯, 어떤 집에서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 빛깔도 변화한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려 배달 음식도, 인터넷 쇼핑도 전면 금지된 이 이상적인 공동체도 분열을 피하지 못했다. 12·3 내란사태를 두고, 구성원 넷 중 두 사람 생각이 완연히 갈려서 혜지는 여의도로, 은희는 광화문으로 나가 각자 깃발을 들어 올린 것이다. 정치적 갈등 탓에 남친과 헤어져 평화를 얻으려 이 집에 합류한 민정으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작가는 어떤 깃발을 들어야 할지 마음을 못 정한 ‘회색인’ 민정의 눈을 통해 집단적 분열의 양태들을 살핀다. 민정의 본가에서는 대구 출신의 보수적 아버지와 광주 출신의 진보적 어머니가 아웅다웅하고, 남친 승주는 같이 여의도로 가지 않는다며 민정을 윽박지르고, 승주 집에선 아버지가 ‘빨갱이’ 아들을 향해 책을 내던지고, 미미소에선 혜지와 은희가 원수처럼 수시로 다툰다. 게다가 민정의 창문 밖에서는 광화문에 다녀온 ‘노답 아줌마’가 한밤중에 예의 없이 소리를 지르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거듭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소음과 소란으로 가득한 불편한 집들은 현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다.

    분열된 이들이 다시 삶을 공유하고 어울려서 평온을 돌려받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작가는 그 답을 정의나 정당성에서 찾지 않는다. 그 대신 ‘멀쩡하게’ 생긴 이들, 즉 사적으로 친구에게 다정하고 타인에게 사려 깊은 사람들이 공적으로 서로 힐난하고 비난하는 시대를 ‘무사히 함께 건널’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거듭 묻는다. “민정씨,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죠?”

    이 어색한 공동체를 접합하는 힘은 ‘챙기기’다. 솔미는 그 상징이다. 솔미 역시 민정처럼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 냉소적인 민정과 달리, 솔미는 느긋하고 둥글둥글하다. 그녀는 각각 다른 데 시위 나가는 혜지와 은희를 위해 핫팩과 보온병을 챙긴다. “친구들 챙겨 주는 게 왜 창피해?” “없다니까요, 편 같은 거. 나는 쟤들을 사랑해요.”

    함께 공간을 공유한다고 저절로 집이 되진 않는다. 거주 공간을 뜻하는 집(house)은 함께 삶을 나누는 집(home)과 다르다. 주택 연구자인 구기환에 따르면, 공유 하우스는 물리 공간을 나누는 걸 넘어서서 “거주자 간의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적 연결을 회복하며, 궁극적으로 밥을 같이 먹는 고유의 유대감을 가진 식구(食口)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온전한 집으로 변한다. 집(house)을 집(home)으로 바꾸는 마음의 자질이 ‘챙김’이다.

    한여름에 홀로 시위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을 보면,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먼저 ‘가여움’부터 느껴야 한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냉소하고 판단”하면서 자기 이득만 챙기려고 한다. 승주의 열두 살 조카는 삼촌도, 할아버지도 ‘그냥’ 사랑한다. 한밤중에 골목에서 전화하는 ‘노답 아줌마’는 자신과 입장 다른 딸이 정성 들여 만든 깃발을 차마 못 버리고 자기 깃발과 함께 들고 있다. 정치가 아니라 이 순진한 사랑의 마음이 삭막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나 빛이 비칠 때, 거기서 색을 먼저 읽으려고 하거나, 이를 기준으로 억지로 빗금을 그으려 할 때 공동체는 망가진다. 세월호에서, 이태원에서 집단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고 거기서 색부터 읽는 자들이 사회를 파괴한다. 작가는 경고한다. 서로를 챙기는 마음이 없을 때, “아름다운 집은 서로 적대하는 삭막한 집으로, 함께 음식 해 먹는 집은 사람을 외식으로 내모는 집으로 변”한다고. 문제는 어떻게 사회 전체에 챙기는 마음을 널리 퍼뜨려 함께 살림하는 집을 이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마이클 모리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의 <집단 본능>(부키 펴냄)에 따르면, 인류는 챙기는 마음, 즉 신뢰와 연대의 능력을 타고난다. 어린아이도 가까운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성향(동료 본능)이 있고, 존경받는 사람의 행동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영웅 본능)가 있으며, 전통을 계승하고 집단 기억을 중시하는 마음(조상 본능)이 있다. 이들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동체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사회적 규범을 부여하며, 대규모 협력을 만들어 낸다.

    인류의 역사는 챙기는 마음을 충분히 함양하지 못한 채외집단을 적대하고, 고립적인 삶을 고수하는 집단은 서서히 약해지는 한편, 남을 포용하는 힘이 있는 집단은 숱한 고난과 위기를 이겨내고 생존과 번영을 이룩했음을 거듭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우리 안엔 이미 생각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전통을 이룩하고, 협력을 만드는 다양한 방식이 널리 퍼져 있다.

    모리스에 따르면, 공동체에서 ‘내 편 네 편’ 현상이 심화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정보 단절과 감정 갈등이다. 상대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적대에 호소하고 갈등을 증폭하는 언어가 분출할 때, 공동체는 분열된다. 이런 분열과 단절을 넘어서려면, 무엇보다 포용적 선례를 구체적 행동양식으로 만들어 퍼뜨리고, 꾸준한 대화를 거쳐 지속 가능한 사회 규칙을 확립해야 한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은 낡은 전통에 얽매여 창의적 경기를 펼치지 못하는 대표팀 선수들을 바꾸기 위해 경기 중 서로 반말을 하게 하는 등 선후배 간 소통과 협력을 장려하는 몇 가지 행동 양식을 퍼뜨려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목표를 공유하며, 피드백을 개방함으로써 의견 충돌이 아이디어 교환의 장으로 바뀌면 집단 갈등은 오히려 창의의 동력이 된다.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허용하고, 실패를 포용하며, 책임을 함께 나누고, 비판을 수용하는 집단에서만 혁신이 지속되면서 온갖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

    그 출발은 챙기는 마음이다. 이서수는 말한다. “우리에겐 각자 다르게 힘들었던 과거와 비슷하게 힘든 현재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서로를 잘 몰랐다.” 타자의 고통에 정직하게 감응하고, 솔직하게 말 건네며, 슬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포용력은 우리에게 함께 삶을 나누는 집(home)을 돌려준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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