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세협상 타결 대해부

    입력 : 2025.08.26 16:07:19

  • 사상 유례 없는 대미투자 카드
    국내 투자 여건 획기적 개선해야
    사진설명

    한·미 관세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

    미국이 부과했던 25%의 상호관세는 일본·유럽연합(EU)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투자와 1000억달러 에너지 수입 등을 대가로 15%로 일괄 인하됐다. 한국은 사상 유례없는 3500억달러(약 470조원) 규모의 대미투자를 약속했다. 협상타결에는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SGA)’라는 구호를 내세워 실효성이 큰 1500억달러 규모의 투자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일본·EU의 협상 결과를 참고해 차별화된 대미 투자 방안을 제시하고, 국내 정서상 수용이 쉽지 않은 쌀과 소고기 수입 확대를 막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도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만,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불확실성을 줄여 어느 정도 시장접근 안정성을 확보한 ‘차선’의 결과를 얻은 것으로 자평하고 있다.

    관세율, 투자, 수입 규모 등에 대해 숫자를 중심으로 큰 틀의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향후 구체적인 후속 조치 과정에서 다시금 갈등이 불거질 공산도 크다. 로이터통신은 “한국은 빠르게 협상에 임해 파국은 피했지만 구조적 개선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실제 관세 협상이 발표 됐을 당시 투자의 ‘규모’는 우리나라와 미국이 같은 목소리를 냈지만 투자로 인한 수익에 대한 배분, 투자금 사용처, 기투자 부분 적용 부분 등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투자수익 부분에 대해서도 미국은 90%를 가져가겠다는 입장이지만 우리 정부는 미국 내 재투자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7월 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이 한·미 관세 합의 소식을 알렸다. <사진 미국 백악관 페이스북>
    7월 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이 한·미 관세 합의 소식을 알렸다. <사진 미국 백악관 페이스북>

    기업들 여력 있나

    우리나라와 미국 간 관세 협상 타결의 핵심인 3500억달러(48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는 당장 기업들 부담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정부가 보증을 해준다고는 하지만 없던 여력을 쥐어짜는 상황은 변하기 어려울 거란 관측에서다.

    일단 우리나라가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달러 규모는 확정적이다. 현재 정부에서는 수출입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가 나서 3500억달러 규모의 펀드를 설정한 이후 이에 대해 직접 대출이나 보증을 해주는 방식이 될 거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 투자에 나서야 하는 기업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데다 3500억달러라는 명목상 투자금을 유치하고 사업성이 떨어진다면 이를 모두 집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당장의 큰 외화 유출 등은 없을 거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펀드 자금 활용을 위해서는 투자금의 5% 이상은 직접 납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500억달러에 대한 투자가 모두 집행된다고 가정하면 175억달러(22조 7000억원)가량은 투자 주체인 기업 등이 대야 하는 셈이다.

    이는 국내에서 가장 투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SK하이닉스의 연간 투자금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를 대미 투자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골고루 분담한다고 가정하면 기업당 연간 평균 투자 지출액이 두 배가량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업계 관계자는 “투자에 당장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 장기적인 시각에서 봐야 하지만 투자 참여는 민간이 주도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라며 “미국 투자를 늘리는 게 미래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환영할 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산업권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자 비용도 문제다. 금리가 낮다고 하더라도 발생하는 이자 등 금융비용 부담은 민간이 짊어져야 한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상장사의 평균 신용등급은 A~BBB 등급 사이에 분포돼 있다. 이들이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할 경우 3.3~5.8%의 금리가 붙는다. 국책기관이 보증에 나설 경우 1.5%포인트가량 금리가 낮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종합하면 1.8~4.3%의 금리가 책정될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는 3500억달러 중 납입자본 5%를 제외한 3325억달러가 조달돼 투자로 이어지면 1.8~4.3%의 이자 부담이 발생한다. 연간으로 따지면 7800억원에서 1조 8500억가량의 금융비용이 추가되는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를 감당할 주체들이 몇 곳 안된다는 점이다. 경기 악화로 인해 이미 빌린 대출 등 차입금에 대한 부담이 커져가면서 투자를 보수적으로 집행하고 있는 와중에 추가 투자에 대한 압박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업권에 따라 다르지만 올해에는 수익성이 악화한 기업들은 이미 빌린 자금에 대한 상환 부담과 투자 부담이 큰 편”이라며 “보수

    적 기조로 투자집행에 나서는 기업들이 많은 상황에서 수익성이 좋은 일부 기업들이 사실상 이번 투자의 총대를 메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라고 봤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바이든 정부 때도 미국 반도체, 이차전지 육성 방침에 따라 많은 투자를 약속했던 부분이 있는데 이 중에서 어느 정도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여부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기술·인력 유출 가능성 커져

    해외투자 확대는 제조업 공동화, 국내 고용·기술 유출, 산업생태계 단절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은 국제통상 질서의 본질적 재편에 대응하는 출발점이다. 대미 투자가 ‘숫자 채우기’나 정부의 보여주기 실적으로만 귀결되지 않도록, 경제안보, 산업 생태계, 국가 경쟁력 관점에서 실질적 성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여전히 살아 있는 한·미 FTA 활용도 한 방안으로 거론된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은 “미국 관세율은 18% 수준으로, 1934년 이후 가장 높다. 한·미 FTA가 무력화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수순이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라면서 “관세 외에는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 보호 관련 등 규제 등은 활용해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제프리 쇼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 펠로우도 “FTA는 보험”이라며 “새로운 관세 체제로 들어서더라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한·미 무역협정을 개선하는 동안에도 무역의 지속적인 성장과 미국 투자를 위한 지원에 기여하는 부분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매우 중요하며, 미국 조선 산업의 재건에도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평택항에 수출용 자동차가 세워져 있다.<사진 연합뉴스>
    경기도 평택항에 수출용 자동차가 세워져 있다.<사진 연합뉴스>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대미 거래에 ‘이행 담보 장치’(스냅백, 조건부 상응 조치, 분쟁조정 패스트트랙 등)를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지화와 재투자 조건, 한국 내 제조·고용 효과, 핵심 원천기술 역내 잔존 등 ‘국가 경제 주권’ 담보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전략적 방안도 요구된다.

    “APEC, CPTPP 적극 활용” 주장도

    방위산업, 인공지능, 우주·사이버안보 등 미래 안보 분야에서 한·미 간 ‘융합형 분업’ 구조를 선제적으로 제안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통상 다변화의 대안으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한중일 FTA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한 전직 통상관료는 “가능한 한 시장수요 감소를 막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면서 한중일 FTA, 한일 경제협력, CPTPP 등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선 오는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기회삼아 CPTPP와 유사한 APEC 자유무역체제를 구축하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대미 수출대국 10대국 중 6개 나라가 APEC 소속 국가들이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기조를 구조적 변화로 규정하며 “관세 25%든 50%든 낮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 기업은 관세 부담을 감당할지 아니면 미국 내 생산기지 이전으로 대응할지 결단해야 한다”며 “트럼프의 재산업화 전략은 노동력 부족과 이민정책 제약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소 3~4년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단기 변수가 아니라 장기전으로 인식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명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결국 살아생전 경험하지 못한 고관세 시대가 상당 기간 갈 수 있다”며 “정말 비상의 시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상장 기업 영업이익률이 평균 8%에 불과한데, 수 십 퍼센트(%)의 관세를 물면 우리 기업은 상당히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비용 절감 다변화는 물론이고 기술 경쟁력, 대체 불가능한 상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면서 “정부도 정말 비상의 지원을 해야 하는 시기”라며 “정말 적극적인 규제 완화, 노동 유연성 제고 등 제조업이 국내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0호 (2025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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