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물감 하나로 다시 쓴 세상, 이현안이 그려내는 한낮의 꿈

    입력 : 2025.08.21 10:06:41

  • 이현안 작가
    이현안 작가

    파주의 한 작업실. 겨울 햇살이 들어오고, 캔버스 위엔 고개를 숙인 인물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색은 검정 하나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화면은 단조롭지 않다. 오히려 무수한 농담과 온도가 번진다.

    이현안 작가는 말한다. “흰색 안료를 쓰지 않으면 명도는 오히려 살아나고, 채도는 떨어지지 않아요. 맑은 그림을 얻으려면 흰색을 버려야 합니다.”

    이현안은 올해로 66세. 그는 경남 마산 바닷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바다와 함께 보냈고, 17세에 밀양 표충사에서의 시간을 지나 서울 동국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파주에 정착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는 한낮의 꿈”처럼 느껴진다. 색을 제거한 흑백 화면이지만, 그 안엔 무수한 이미지들이 살아 숨 쉰다. 바람 부는 들판, 제주 돌담길, 창가에 누워 긴 편지를 읽는 여인의 모습. 그 장면들은 어쩐지 우리가 본 적 있는 듯 익숙하지만,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풍경처럼 낯설다. “그림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야기를 쓰듯 그리긴 하지만, 답이 정해진 서사는 아니죠. 보는 사람이 각자 자기 기억과 겹쳐서 채워 넣어야 완성되는 그림입니다.”

    장의 그림에 담긴 수십 장의 드로잉
    RHEE HYUNAN. 2019. 제주 행원환해장성길. 162X97cm. oil on canvas
    RHEE HYUNAN. 2019. 제주 행원환해장성길. 162X97cm. oil on canvas

    “100호짜리 작품도 일주일이면 그릴 수 있어요.” 그의 말은 능숙함에서 비롯된 자신감 같았지만, 그 앞에 붙는 전제가 있었다. “내용을 완전히 결정했다면요.”

    이현안의 작업에서 ‘그리기’는 마지막 단계다.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그림에 담을 이야기와 구도, 분위기를 완성하는 ‘설계 작업’이다. 50장, 60장의 드로잉이 한 장의 캔버스를 위한 초안으로 버려지기도 한다. 목탄으로 스케치한 밑그림을 한참 동안 세워두고 바라보다가, 마음이 결정되지 않으면 다시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한다.

    “목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요. 그러니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캔버스를 처음부터 만들 수밖에 없죠.”

    그는 일반 시중에서 파는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는다. 직접 천을 씌우고, 아교 대신 독자적으로 배합한 안료를 바른다. “시중 캔버스는 물감이 흘러내려요. 또 흰색을 칠한 바탕에 검정을 얹으면 번쩍이는 광택이 생깁니다. 저는 광택을 없애야 깊은 공간감이 나와요.”

    물감은 검은색 한 가지뿐. 흰 부분은 물감이 지나가지 않은 바탕 그대로다. 덧칠도 없다. “붓이 지나가면 수정이 불가능하니, 그 흰 공간은 처음부터 정확히 남겨야 해요.” 그는 이 까다로운 방식이 오히려 “이미지의 맑음”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익숙한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점
    RHEE hyunan. 2024. long letter. 91x116cm. oil on canvas
    RHEE hyunan. 2024. long letter. 91x116cm. oil on canvas

    올해 3월,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 ‘백일몽(Day Dreaming)’은 작가의 세계를 명확하게 드러낸 전시였다. “모든 현재는 현재인 순간 곧바로 과거가 되고, 우리는 대부분 과거의 기억으로 살아가요. 예술이란 그 기억과 현실의 교차점에서 생겨나는 거죠.” 이현안의 화면에는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고, 서사가 있다. 작은 단편소설처럼 한 장 한 장의 이야기들이 쌓여간다. 들판에서 개를 바라보는 소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걷는 남녀, 침대에 누워 한 장의 편지를 읽는 젊은 여성. 이 장면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픽션이다.

    상상 속에서 건축된 장면이지만, 각자의 현실에 포개어지며 스며든다. 제주 돌담길은 모로코의 골목을 닮았고,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본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지중해 시골의 흰 벽, 바닷가의 소리, 10대 시절 동네 누나들의 옷 무늬… 그런 기억들이 제 안에서 발효되어 지금의 그림이 됩니다.”

    그는 이야기의 단서를 현실에서 가져온다.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여행지에서의 한 장면, 영화 속 한 컷. 하지만 그것들은 그대로 재현되지 않는다. 재편집되고, 축소되거나 확대되고, 의도된 낯섦을 입은 채 다시 캔버스에 놓인다.

    예술, 그리고 그 너머의 질문

    화가로서 그는 이미 40년 가까운 경력을 쌓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금호미술관 등 주요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외 아트페어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매 작업이 어렵다고 말한다.

    “열 장이 잘 그려졌어도, 한 장이 잘 안 풀리면 재능을 의심하게 돼요. 그리고 그 한 장이 꽤 오래 가슴에 남아요.” 매번 실패의 공포와 싸워야 하는 작업은 그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사람, 동물, 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결국 그림의 주인공이에요.”

    그의 작품은 이제 단지 회화가 아니다. 서사, 질감, 시간, 그리고 기억이 켜켜이 쌓인 복합적인 텍스트에 가깝다. 보는 이의 감상을 전제로 하기에, 그 누구도 쉽게 해석할 수 없지만, 그 누구에게도 막히지 않는다.

    올해 9월에 열리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박지훈 기자 · 사진 류준희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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