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로버트 해리스 <콘클라베> vs 에드워드 버거 <콘클라베>

    입력 : 2025.08.19 18:00:17

  • 신은 사건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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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클라베>는 2016년 출간된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영화적 상상력과 신학적 성찰을 덧입힌 영화입니다.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추기경의 모습은 대중이 흔히 기대하는 경건한 신앙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저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었지요. 성직자들의 세계를 냉혹할 정도로 묘사한 <콘클라베>는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골든글로브, 크리틱스초이스 등 유수 영화상을 석권하며 새로운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이 때문에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 소설도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원작 <콘클라베>와 영화 <콘클라베>는 어떻게 다를까요. 또 소설 속에 표현된 서사적 긴장은 영화에서 어떻게 변주 됐을까요. 두 작품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작품의 주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교황의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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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클라베>는 교황이 돌연 사망하며 시작됩니다. 사인은 심장질환이었습니다. 바티칸 교황청의 최고좌가 공석이 되자, 주인공인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베우 레이프 파인스)은 새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인 콘클라베의 단장이 되어 전 세계에서 집결한 추기경들의 선거를 총괄합니다.

    로렌스 단장은 자신의 친구이자 선대 교황과 사상적으로도 가까웠던 벨리니 추기경이 차기 교황이 돼야 한다고 확신하지만 벨리니의 경쟁자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의 선봉에 선 트랑블레 추기경, 보수 가톨릭으로의 회귀를 주장한 테데스코 추기경, ‘최초의 흑인 교황’ 타이틀이 예상되는 아데예미 추기경이 그들이었지요. 투표가 진행되면서 세력들 간의 암투가 서서히 베일을 벗습니다. 로렌스 단장은 교황 후보들의 성추문과 성직매매, 나아가 아집과 독선의 더께를 하나씩 벗겨냅니다.

    그 결과, 결국 콘클라베 당일까지 다른 추기경들이 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선종한 전임 교황이 비밀리에 임명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주재 추기경’ 베니테스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반전은 숨어 있었지요. 베니테스는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유전자도 함께 가진, 인터섹스(Intersex·생물학적으로 남녀 특성을 모두 가져 성을 특정할 수 없음을 의미)였습니다. 영화 <콘클라베>와 소설 <콘클라베>는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소설이 영화로 바뀌면서 의미가 꽤 깊어진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체스판’입니다. 로렌스 단장과 그의 친구 벨리니 추기경은 선대 교황이 남긴 체스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벨리니는 전임 교황과 자주 체스를 뒀던 사이였고, 그래서 돌아가신 교황을 오래 추억하고자 체스판을 자신이 가져가도 좋은지 이야기합니다. 로렌스는 벨리니와 선대 교황의 우애를 알기에 흔쾌히 그의 뜻에 동의하지요. 체스판은 소설에 이렇게 묘사됐습니다. ‘말은 체스판 중앙에 어지럽게 모여 있었는데, 흡사 난해한 정쟁에 얽혀 영원히 풀지 못할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24쪽)

    소설의 문구를 기억한다면, 영화 <콘클라베>에 체스판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게 됩니다. 교황이 자신의 선종 후 차기 교황이 누가 될지를 생전에 설계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자 복선인 것이지요. 선임 교황의 전략가적인 면모가 드러내고, 작품 속에서 펼쳐진 교황 선출의 난맥상, 승패가 명확히 나뉠 권력 게임을 예고합니다. 그런데 영화엔 소설에 없는 대사 한 줄이 추가됐습니다. 로렌스가 벨리니에게, 교황과의 체스에서 승자는 주로 누구였느냐고 묻자 벨리니는 “늘 교황이 이겼지. 그분은 항상 여덟 수는 앞서셨어(He was always 8 steps ahead)”라고 답합니다. 이 대사는 소설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8수’일까요?

    체스판은 가로 8칸, 세로 8칸으로 만들어진 ‘사각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략게임입니다. 교황이 8수 앞을 내다볼 정도로 체스에 능했다는 건, 게임으로서의 체스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나아가 한 판의 거대한 체스로서의 콘클라베, 성스러운 전장(戰場)을 로렌스 단장이 지배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뿐일까요. 신학적으로는 숫자 7이 완전수이고(‘7일의 창조’), 숫자 8은 새롭게 펼쳐진 이후의 세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전임 교황은 자신이 사망한 이후 가톨릭의 운명이 걸린 콘클라베에서 누가 승자가 돼야 하는지를 이미 내다보고 있음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요. 영화 <콘클라베>가 걸작으로 호평받은 이유는 소설 <콘클라베>의 주어진 설정을 이처럼 한 단계 넘어서려는 디테일에 있을 겁니다.

    인간의 언어, 신의 언어

    총 380페이지의 장편소설이 두 시간 분량의 영화로 압축되면서 중요한 내용이 협소하게 표현된 지점도 있습니다. 바로 라틴어의 문제입니다. 콘클라베 회의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유력후보인 테데스코 추기경은 “모든 미사는 앞으로 라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테데스코는 붕괴 직전인 가톨릭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고 복원하려면 ‘이전 세계관의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가톨릭 성직자들이 라틴어를 아무도 쓰지 않는 언어, 즉 사어(死語)라고 비판했고 그 결과 이제 각국 언어로 미사를 드리게 됐는데, 그건 가톨릭의 본질에서 어긋나는 일이다. 라틴어 사용으로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고 테데스코는 말합니다. 테데스코 추기경의 주장은, 영화만 보면 그의 보수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장치로만 기능합니다. 하지만 원작 <콘클라베>를 유심히 읽어보면 테데스코가 자꾸 거론하는 라틴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1962년, 자유주의자들이 사어를 버리고 보다 쉽게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죠? 의사소통만 더 어렵게 되지 않았나요? (중략) 라틴어를 포기하면 결국 로마를 포기하는 겁니다. 명심하세요.”(104쪽)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테데스코 추기경은 사실 ‘5개 국어’에 능통한 인물입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동시에 모순적인 선택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알면서도 아무도 쓰지 않는 라틴어를 사용해야 하는 테데스코는 결국 ‘모두의 언어를 알고 있지만 누구와도 진심을 다해 소통하려 하려 하진 않는’ 선택을 감행하니까요. 권위적인 언어를 선택해 그 권위를 등에 엎고 신자들 위에 군림하려는 구태 성직자의 표상인 셈이지요. 하지만 영화와 소설 <콘클라베>가 지향하는 언어는 테데스코식 사어가 아닙니다. 유신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이 작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모든 말을 하고 있는 신의 언어’를 은유해내고 있으니까요(흔들리는 물잔, 투표 직전 불어오는 바람 등). 그러므로 ‘테데스코의 언어’(라틴어)와 ‘신의 언어’(침묵 속에서의 발화)는 이 작품 내에서 상호 대립합니다. 환언하자면 테데스코의 언어는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어떤 진심도 없는 말’이고, 보이지 않는 신의 언어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진심이 통하는 말’이 됩니다. 신은 콘클라베 회의에 입장한 적은 없지만 매 순간 표결에 명백히 개입하고 있는 ‘119번째 참여자(추기경 수 118명+1)’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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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뿐일까요. 테데스코는 영화 초반부에서 로렌스 단장에게 라틴어로 말합니다. “아비스수스 아비스숨 인보카트(Abyssus abyssum invocat·심연이 심연을 부른다).” 시편 42장 7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의 발화자인 테데스코가 정작 ‘심연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는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 번의 균열

    <콘클라베>는 보는 관점에 따라 무신론적 입장에서 해석할 수도, 정반대로 유신론적 입장에서 해석도 가능한 작품입니다. 지극히 성스러워야 하는 모임에서 가장 속되고 삿된 정치 협잡이 이뤄진다는 설정은 ‘절대자가 부재하는 종교에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데, 이 질문은 무신론적 시선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신은 철저히 타자(他者)이다. 신은 인간의 언어로는 닿을 수 없지만 사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신학철학자 칼 바르트)란 문장에 기댄다면 교황 후보 아데예미, 트랑블레, 테데스코가 콘클라베에서 차례대로 탈락하고 가장 덜 주목받았던 제3세계 인물인 베니테스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사건’은 신의 개입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콘클라베>에 ‘세 번의 균열’이 시도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거리의 성자’였던 카불 추기경 베니테스가 콘클라베 참가자로 합류하고(1차 균열), 난장판이 된 식당에서 아그네스 수녀가 관례(‘남성 사제들 사이에서 여성은 말할 수 없다’)를 깨고 발언하며(2차 균열), 콘클라베 투표에서 시스티나 성당 창문과 외벽이 부서지는 테러가 발생한다(3차 균열)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제도의 권위와 정당성을 부수고 무너뜨립니다. 결국 소설 <콘클라베>와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 승계를 전면에 내세운 스릴러를 넘어서서 인간 사회가 축적한 낡은 제도에 요구되는 필연적인 변화에 관한 묵직한 사유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김유태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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