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닷컴버블 연상케 하는 AI버블 팩트 체크 “AI가 만든 황금선, ‘죽음의 선’과 겹치다”

    입력 : 2025.08.12 10: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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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증시가 다시 한 번 뜨겁다. 인공지능(AI)을 앞세운 기술주의 광풍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시장을 이끌고 있다. 단지 상승 속도나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묘한 기시감이 감돈다. 마치 1999년 말, 닷컴버블의 정점에서 목격했던 광경을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이 시장을 감싼다.

    빌 스미드, 미국 가치투자의 대부로 불리는 인물은 7월 19일 투자자 서한에서 “지금 우리는 ‘죽음의 선(Line of Death)’ 위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제시한 차트는 S&P500의 인플레이션 조정 지수를 기반으로 한다. 1966년, 2000년, 그리고 2025년. 세 개의 고점은 기묘하게도 하나의 직선 위에 놓여 있다. 앞선 두 번의 정점 이후 시장은 각각 -65%의 급락을 경험했고, 새로운 고점을 회복하기까지 27년, 1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 증시는 다시 그 선 위에 도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제 시장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의 AI 주도 랠리는 닷컴버블의 재림인가, 아니면 진짜 펀더멘털의 진화인가. 역사적 패턴과 현재의 경제 현실 사이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세 번째 터치’의 경고… 차트가 말하는 진실

    스미드캐피탈이 공유한 차트는 단순히 시각적 자료가 아니다. 그 안에는 지난 60년간 증시가 반복해 온 흥망성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66년 ‘Nifty Fifty’로 불렸던 고평가 성장주 붐은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의 직격탄을 맞고 붕괴했다. 시장은 무려 16년간 고점을 돌파하지 못한 채 ‘잃어버린 세월’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2000년, 인터넷이라는 혁신 기술이 모든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믿음 아래 닷컴주가 폭등했다. 그러나 실적 없는 성장에 대한 의문이 번지면서 시장은 다시 한번 붕괴했고, S&P500은 회복까지 1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미드는 이 역사적 선례에 현재 시장을 대입한다. 그리고 “세 번째 터치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적 저항이 아니라, 구조적 과열 가능성”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는 “차트가 정확히 ‘언제’ 조정이 올지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현시점에서 인플레이션, 소비, 실업률 등 거시 지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S&P500은 향후 10년간 낮은 수익률에 갇힐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여전히 엇갈리는 월가의 시선

    이번 강세장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챗GPT의 등장 이후 생성형 AI는 산업 전반에 걸쳐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다. AI 반도체를 설계하는 엔비디아는 최근 시가총액 4조달러를 돌파했고,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세븐’은 전체 시장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흐름은 과거 닷컴 시기를 떠오르게 한다. 당시에도 인터넷은 기술적 혁명이었고, ‘닷컴’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주가가 몇 배로 치솟았다. 그러나 실적은 미비했고, 기업들은 수익이 아닌 ‘트래픽’과 ‘시장 선점’을 명분 삼아 적자를 쌓아갔다. 결국 시장은 그 허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했다.

    지금은 다를까. 토르스텐 슬록 아폴로글로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S&P500 상위 10개 기업의 12개월 선행 PER은 30배에 육박한다”며 “이는 2000년 닷컴 정점 당시의 25배보다도 높은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AI 기업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현실을 앞질렀다”며 “이번 랠리는 기술적 거품이자, 역사상 가장 고평가된 시장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반면 존 히긴스 캐피털 이코노미스트는 “AI 관련 주가 상승은 실적 기반이 분명하다”며 “2000년과 달리 기업이익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생산성과 효율성 개선도 눈에 띄게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는 고밸류 구간이지만, 버블이라기보다는 펀더멘털의 반영”이라고 반박했다.

    엔비디아는 시가총액 4조달러를 돌파하며 AI랠리의 대장주로 거듭났다. 사진은 젠슨황 CEO가 제3회 중국국제공급망촉진박람회에서 참가자들과 반갑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엔비디아는 시가총액 4조달러를 돌파하며 AI랠리의 대장주로 거듭났다. 사진은 젠슨황 CEO가 제3회 중국국제공급망촉진박람회에서 참가자들과 반갑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문제는 밸류에이션만이 아니다. 시장은 현재 구조적 혼란 속에 있다. 기술주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반면, 실물 경기는 둔화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고용과 소비는 기대 이하로 나타났고, 이에 연준의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김성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러한 상황을 “위험한 디커플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AI 산업이 실물 경기와 무관하게 성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통화완화까지 더해질 경우 자산 가격은 급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1998년 LTCM 사태 직후에도 시장 주도 산업과 경기가 따로 놀았고, 이후 IT버블이 절정으로 치달았다”며 “지금이 바로 그 시기와 유사한 구조”라고 분석했다.

    특히 김 연구원은 최근 시장의 흐름이 기관투자자에서 개인투자자로 이동하면서 투기성 강한 매수세가 뚜렷해졌다고 경고한다. “지난 1년간 미국 개인은 1조 500억달러를 순매수했고, 증시 내 개인 비중은 닷컴 이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29년 대공황, 2000년 닷컴 붕괴, 그리고 2021년 팬데믹 직후에도 신용거래와 개인의 매수세가 과열 구간에서 정점을 찍은 바 있다. “개인 투자자는 상승세에 한 번 올라타면 긴축 신호나 고밸류에도 개의치 않고 매수를 지속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버핏의 침묵과 뜨거운 IPO 시장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은 2000억달러에 가까운 현금을 여전히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닷컴버블 당시에도 공격적 매수를 자제하며 “이해할 수 없는 비즈니스에 돈을 넣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보수적 태도는 버블 정점에선 비난받았지만, 붕괴 이후 그는 압도적인 수익률로 귀환했다.

    빌 스미드는 “버핏이 지금 현금을 쌓아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장이 언젠가 무너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진짜 투자자는 유행이 아닌, 가격과 가치를 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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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IPO 시장은 뜨겁기만 하다. AI, 양자컴퓨팅, SMR(소형모듈원자로) 등 미래 산업에 속한 기업들이 상장과 동시에 수 배의 주가 상승을 기록했다. 써클 인터넷, 보이저 테크놀로지 등 일부 종목은 상장 첫날 10배 가까운 급등을 보였고, 이후 롤러코스터 장세를 만드는 모습이다. 이런 극단적 변동성은 ‘과열의 전조’라는 지적도 있다. 닉 콜래스 데이터트렉 공동 창업자는 “현재 시장은 1999년과 같은 기대를 내재하고 있다”며 “밸류에이션이 이 수준을 유지하려면, 향후 모든 일이 낙관적으로만 흘러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은의 진단… “美 자산, 과도하진 않다”

    이처럼 과열과 경고가 교차하는 가운데, 한국은행은 비교적 냉정한 진단을 내놨다. 최근 ‘미 자산시장 평가 및 글로벌 투자자금 재편 가능성 점검’ 보고서에서 한은은 “미국 주식과 채권 자산은 일부 고평가 리스크가 있으나, 펀더멘털과 괴리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S&P500의 선행 PER은 22배 수준으로, 과거 40년 평균(15.8)이나 최근 10년 평균(18.6)을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AI로 대표되는 성장주의 실적 기대를 반영한 결과이며, 과거 버블 수준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은은 “유동성, 수용성, 안정성 측면에서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부재하며, 글로벌 자금은 미국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국채 시장과 관련해선 “관세정책 불확실성, 재정적자 증가에도 미국 국채의 유동성과 신뢰도는 여전히 강하다”며 시장 전반이 흔들릴 가능성은 작다고 평가했다.

    ‘서학개미’의 귀환 가능성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한은은 “단기적으로 일부 환류가 있을 수는 있으나, 미국 증시 규모와 위상으로 볼 때 장기적 자금 이탈은 어렵다”고 밝혔다.

    현실은 언제나 과거의 반복 속에서 미래로 나아간다. 닷컴버블도, 금융위기도, 팬데믹도 모두 ‘처음 겪는 위기’였지만, 그 본질은 시장의 심리가 만든 과열과 냉각의 사이클이었다.

    AI라는 혁신은 분명 시대를 바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든 것을 사도 된다’는 면허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죽음의 선’ 위에서 다시 한 번 시장의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기술이 바꾸는 세계에 감탄하되, 숫자가 말하는 현실에 눈을 감아선 안 된다.

    결국 시장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가격이 적절한가?” 그에 대한 대답은 늘 투자자의 몫이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9호 (2025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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