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④ 연속진공건조(CVD)와 제오드레이션

    입력 : 2025.08.04 16:21:42

  • ▶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사진설명

    브로스의 원료가 되는 걸 이 동네에선 엑기스라고 부른다. 자연 원료로부터 맛 성분을 추출해 농축한 액체인데 농심의 계열사인 농심태경이 제조한다. 본사가 신대방동 농심 캠퍼스에 있는데 라면 제조와 관련해서는 거의 한 몸이라고 보면 된다. 농심태경에서 만든 엑기스가 안성공장으로 입고되면 별도의 저장탱크에 보관된다. 결국 이 엑기스를 건조해서 분말로 만들어야 한다. 그 작업을 담당하는 설비가 연속진공건조기(CVD;Continuous Vacuum Dryer)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진공 상태에서 연속해서 말린다는 뜻인데, 은색의 큰 원통형 모양이다. 그 안을 보면 노즐에서 짜낸 엑기스가 마치 큰 구렁이가 구불구불 기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건조된다. 당초 수분이 약 50%인 걸 약 20%로 농축한 뒤 그걸 다시 건조하는데 최종적으로 나올 때 보면 말랑말랑하던 것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걸 분쇄하면 가루가 되는데 이게 브로스다. 브로스가 만들어지면 사일로(Silo)에 보관한다. 이게 라면 스프의 핵심, 분말화된 육수다. 물론 육수만으로 제대로 된 맛을 낼 수는 없다. 양념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런 원료를 제조하는 것은 대부분 협력업체의 몫이다. 가정집으로 치자면 육수인 브로스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본인이 주방에서 제조하고 파, 마늘, 양파, 당근 같은 양념이 되는 스프 원료는 마트나 시장 가서 사는 개념이다. 이는 외부에서 분말로 제조되기 때문에 들어오는 대로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사용할 때쯤 돼서 사일로로 들어간다. 공장 투어는 이 창고부터 시작되며 기온은 30도 이하, 습도는 50% 이하로 관리된다.

    창고를 지나면 본격적인 스프 제조 공정을 보게 되는데 직경 1.8m, 길이 11m의 스테인리스 원통을 만나게 된다. 가로로 누워 있는 이 건조설비는 모두 6대가 있다. 3대는 그냥 CVD, 나머지 3대는 제올라이트(Zeolite, 줄여서 Zeo) CVD이다. 여기서 약 50분간 수분 제거 작업을 거치면 분말이 되는데 문제가 하나 있다. 액체 상태의 스프를 고체로 건조하려면 열을 가해야 하는데 열을 가하면 향이 빠져나간다. 수분만 빠져나가면 좋으련만 화학적으로 그렇게 안 된다. 이걸 해결한 게 제오 CVD다. 제올라이트(Zeolite)는 그리스어로 끓는다는 뜻의 zeo, 돌이라는 의미의 lite가 합쳐진 말로 한자어로는 비석(沸石)이다. 구멍 숭숭 뚫린 돌인데 여름철에 습기를 빨아들이는 특징이 있어 유럽에서 벽돌 재료로 많이 쓰였다. 여기서 착안한 공법이다. 액상 상태의 원료를 건조할 때 손실되는 향기 성분을 흡착한 뒤 재생해 본연의 향기를 원료에 다시 돌려주는 역할을 한다. 2007년 농심이 세계 최초로 라면 제조에 도입한 설비로 제오 CVD를 사용할 경우 물 끓는 온도가 대폭 낮아진다. 그만큼 향을 많이 보관할 수 있다는 얘기. 비등점이 섭씨 1.89도. 통상 진공 상태에서 열을 가하면 비등점이 낮아진다. 압력을 낮추면 물 끓는 온도도 낮아지는 이치다. 일반 CVD에서의 끓는점은 섭씨 16도 정도다.

    안성 스프공장이 준공된 건 1982년 4월. 7년 만에 CVD 설비를 도입했는데 이 설비에 제오드레이션(Zeodration) 공법을 적용한 건 그로부터도 18년이나 지난 뒤였다. 김진구 상무는 “꽤 오래 전에는 공정마다 분말 스프들이 날려서 종업원들이 작업하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바닥에도 붉은 스프 가루들로 지저분했는데 연속진공설비를 들여오면서 이런 점들이 개선됐다”면서 “무엇보다도 수율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새로운 설비에 더해 모든 재료를 과학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보다 저렴한 가격의 라면을 제공하게 됐다”며 “제오 CVD는 이 모든 것의 화룡점정에 해당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설비를 라면 이름으로 정한 제품이 나온 것은 CVD에 대한 농심의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CVD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판매했다. 여기서 C는 칼슘, V는 비타민, D는 생선에 많이 함유된 불포화지방산으로 머리가 좋아진다고 소문난 DHA. 비록 CVD 설비와는 의미가 다르지만 이렇게 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했다.

    대작, 안성탕면과 신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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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공장에서 안성탕면이 나온 건 1983년 9월. 스프 공장이 준공된 후 1년 5개월 만이었다. 안성은 우시장으로 유명한 대표적 도시다. 장날만 되면 인근 진천이나 장호원 등지에서 소를 몰고 와 거래한다. 그러다 보니 소뼈나 내장 등 부산물을 재료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 설렁탕집, 곰탕집, 내장탕집 등등. 율촌이 5일간 김 전 소장이 거주하던 사택에서 머물렀을 때도 아침마다 식사하러 간 곳이 지금도 영업 중인 안일옥이라는 설렁탕집이었다. 김 전 소장은 1983년 봄, 일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율촌과 차를 같이 타고 공장으로 가던 중에 우시장 얘기를 하자 듣고 있던 율촌은 “안성은 탕류 문화구먼”이라고 맞장구치면서 “그럼 된장을 넣으면 맛이 좀 더 나아지지 않나. 그것 좀 연구해보지” 하고 지시를 내렸다. 옛날 시골 장마당에서 맛볼 수 있던 우거지 장국의 맛을 재현하는 신개념 라면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몇 차례 실험 결과 생된장보다는 분말된장이 더 맛을 낼 수 있었다. 이름도 안성의 탕류 문화를 그대로 살려 안성탕면으로 정했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탤런트 강부자 씨를 모델로 썼다.

    당시 라면은 120g에 100원을 받았다. 원가가 도저히 맞지 않았다. 100원을 받아서는 손해가 났다. 그래서 150원으로 올릴까 생각했는데 서민 음식을 50%나 올릴 수가 없었다. 폭리를 취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정한 가격이 120원. 그 가격엔 잔돈 거스르기 힘들다는 영업부의 원성이 있었으나 그대로 밀어붙였다. 안성탕면이 인기를 끌자 경쟁사들이 또 유사품을 내놨다. ‘서울탕’ ‘호남탕’ ‘영남탕’ 하는 식으로. 그러나 이번만은 안 됐다. 그 이유는 스프 전용공장 때문이었다. 초창기 농심 라면의 시장점유율은 8%. 안성탕면 출시 후 1984년 점유율은 40%로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3월 농심은 1등 기업을 누르고 정상에 오르게 된다. 회사를 세운 지 20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2년 후 농심의 최대 히트작인 매울 신(辛) ‘신라면’이 나왔다. 농심 직원들 사이에서는 ‘신안너짜’라는 말이 있다. 신라면, 안성탕면, 너구리, 짜파게티다. 이게 소위 4대 천왕인데, 신라면의 매출이 나머지 3개를 합친 것보다도 많으니 농심 하면 역시 신라면이다.

    사실 안성탕면으로 기세등등이었지만 이후의 신제품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율촌은 안성탕면을 넘어서는 대작을 꿈꿨다. 확실하게 고급화된 프리미엄 안성탕면. 김 전 소장이 술회하듯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못 잤던 때”였다. 그러던 중 율촌의 머리를 때린 아이디어는 ‘매운맛’이었다. 김 소장을 불렀다.

    “김치도 매운맛이 기본이고 찌개나 탕도 매운맛이 있어야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그냥 매운맛이 아니라 고추의 매운맛을 살린 라면으로 연구해 보면 어때.”

    김 소장은 곧바로 직원들을 소집해 “지금까지 하던 연구 올 스톱이다. 우리 한번 매운 라면 도전해보자”고 의지를 불태웠다. 고춧가루로 매운맛을 살리려다 보니 고추 본연의 풋내가 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해결책을 찾았다. 고춧가루를 기본으로 해 향신 양념을 함께 기름에 볶아내는 다진양념, 즉 다대기였다.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소고기해장국 맛의 라면이 탄생했다.

    “와 이리 맵노? 그래도 맛은 좋네.”

    시제품을 시식해본 율촌의 첫 반응이었다. 임원들을 소집한 시식회가 열렸다. 합격. 상품명은 ‘다대기라면’이었다. 그걸 율촌이 신라면으로 바꿨다. 본인의 성씨를 쓰는 데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종친회는 내가 막아볼테니 그리 하자. 디자인도 새빨간 색으로 하고 한자로 매울 신(辛) 자를 더 크게 쓰자”고 제안했다.

    신라면은 출시 5년이 되는 1991년에 국내 라면 시장 1위 브랜드로 등극한다. 60년이 넘는 한국 라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라면은 단 3개뿐이다. 첫 번째 라면인 삼양라면,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안성탕면, 1991년부터 현재까지는 신라면. 무려 35년간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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