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③ 브로스, 브로스, 브로스…

    입력 : 2025.08.04 15:36:46

  • ▶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스프공장은 경기도 안성시 신소현동에 위치해 있다. 스프 전문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농심이 만드는 모든 스프가 여기서 생산된다고 보면 된다. 라면 1등이 농심이니 스프 전용 공장도 세계에서 가장 큰 건 당연하다. 정규봉 안성 생산1팀장은 “다른 공장이 멈추면 그 공장에서만 생산되는 제품이 나오지 않지만 이곳 안성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라면 전 제품 생산이 중단된다”고 말한다. 안성에서 만든 스프가 구미 등 다른 공장으로 가서 라면 생산 공정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규모라고는 하지만 철강, 원전, 석유화학 등 다른 중화학 공업 공장에 비해서는 아담하기 그지없다. 부지가 1만5546평, 건평은 1만3665평. 광양에 있는 포스코 제철소에 비하면 400분의 1도 채 안 되는 규모이다. 여기서 하루 1000만식 분량의 스프가 생산된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장 자체가 첨단의 느낌이 나는 것도 아니고, 흥미를 유발하는 독특한 설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이나 외국인들의 견학도 드문 편이다. 통상 공장 견학을 가면 작은 기념품 같은 걸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곳에선 스프를 줄 수도 없고, 그래서인지 일반 견학자들을 위한 특별한 보행로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래도 단언컨대 농심의 핵심은 스프공장이다. 최근 율촌의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둘째 딸 윤경 씨의 남편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짧게 만난 적이 있는데, 마침 농심 공장 얘기가 나왔다. 나는 구미 공장을 치켜세웠다. “라면공장이 뭐 별거 있겠느냐”는 마음으로 가봤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산에서부터 물류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무인 자동화 시스템이 구축된 지능형 공장이었다. 전체 길이 138m의 일직선 공정. 맨 처음에 라면 원료인 밀가루를 담는 사일로에서 맨 마지막 마트에 진열돼 있는 그 봉지라면이 레일을 따라 나올 때까지 정확하게 30분. 밀가루 반죽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8분이니 실제 라면 만드는 시간은 12분이다. 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누르는 압연 공정을 거쳐 면을 꾸불꾸불하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면을 끓이고 튀기고 식힌 뒤 스프를 동봉해 포장을 완료해 출고한다.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영국 공영방송인 BBC가 <슈퍼팩토리의 비밀>이란 특별 다큐멘터리로 이 구미 라면공장을 소개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서 회장은 고개를 저으면서 “농심은 스프공장을 봐야 한다”면서 “나는 그 거대한 원통 믹서기에 직접 들어가보기도 했다”고 말한다. 딱 거기까지만. 더 이상의 스포일러는 없었다. 나의 농심 취재는 사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서 회장의 말 때문에 시작했다.

    사진설명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지난 6월 27일 공장 투어 일정을 잡았다. 여담이지만 취재는 좀 여유를 갖고 진행하고자 했는데, 이날 마침 이재명 대통령이 급하게 언론사 대표들과의 만찬 일정을 잡는 바람에 아쉽게도 일정을 좀 단축했다. 그러고는 추후 반나절을 더 투입해 취재를 보완하기로 했다.

    이날 공장 투어를 담당한 분은 김진구 공장장(상무)과 정규봉 생산1팀장이었다. 전에 구미 공장 투어를 진행한 이병학 사장(당시는 전무)도 그랬지만 김 상무 역시 생산라인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었다. 그는 공장 투어를 진행하기에 앞서 한마디 한다. “여기가 농심의 맛을 책임지는 심장부입니다. 맛집 가면 주방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오늘 특별히 보여주는 겁니다”라고. 생색내는 듯한 발언이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위생을 강조하는 곳이다 보니 공장에 들어가려면 다소 귀찮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일단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은 뒤 1회용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에어 샤워기에서 먼지를 제거한 다음 손을 세척하고 건조하고 소독한다.

    스프라는 게 기본적으로 자연 재료인 농수산물을 농축시켜 건조한 뒤 여기에 소금, 설탕, 조미료 등을 혼합해 만든다. 이 스프를 면과 함께 끓는 물에 넣으면 스프의 풍미가 면에 스며들고 국물로 복원돼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농수산물과 같은 생물 재료가 지닌 고유의 맛과 향을 구현하느냐가 좋은 스프를 만드는 관건이고 이 원리를 공장에서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따라 제품은 차별화된다.

    뉴욕시 길거리에서 소비자들이 농심 신라면을 즐기고 있다.
    뉴욕시 길거리에서 소비자들이 농심 신라면을 즐기고 있다.

    매운탕이든, 황탯국이든, 미역국이든, 고깃국이든 모든 국물 있는 음식이 그렇듯이 핵심 경쟁력은 육수에 있다.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인데 모(某) 그룹 오너가 용산에서 먹은 생태탕을 잊지 못해 직원에게 조리법을 배워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직원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식당에 가서 생태탕을 시켜 먹곤 했는데 사장이 “아니 이렇게 매일 우리 식당에 와줘서 식사하는 건 고마운 일인데 혹시 무슨 사연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그 직원은 “우리 오너가 그 생태탕 만드는 법 알아서 오라 했다”고 고백했다. 그랬더니 사장은 “영업 비밀인데 그걸 어떻게 가르쳐주냐”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직원은 그 뒤로도 그 식당에서 계속 생태탕을 먹었는데, 두 달 정도가 지난 어느날 사장이 다가와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왜 안 물어보시나?”

    “물어보면 뭐합니까, 가르쳐주지 않을 텐데.”

    그러자 사장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하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거 닭 육수야.”

    라면은 맹물에 끓이기 때문에 육수가 따로 없다. 그 육수 맛을 스프가 낸다. 그게 기본이다. 즉, 육수에 재료를 넣는데 이걸 하나의 스프가 담당한다. 건더기 스프도 있긴 하나 기본적으로는 분말 스프가 핵심 역할을 한다. 그 육수를 분말로 만든 것. 이 동네에서는 브로스(Broth)라 부르는 스프의 기본 중의 기본. 거기에 맛의 비밀이 담겨있다. 원래 Broth는 프랑스어의 ‘Brouet’에서 유래했는데 끓인 고기, 뼈, 뿌리채소, 또는 해물을 이용해 국물 기반의 요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고기를 기본으로 하면 고기 브로스, 해물은 해물 브로스, 야채는 야채 브로스. 통상 이 세 가지가 기본이다.

    과거엔 브로스를 무쇠솥에서 만들었다. 무쇠솥에 소고기와 소뼈 등과 함께 무, 양파, 당근 같은 기초 재료(원물이라고 한다) 등을 가공해 넣고 고아서 우려낸 육수를 생산한 뒤 그걸 건조시켜 분말로 만들면 우리가 봉지라면에 들어있는 스프가 된다. 정규봉 팀장이 말한다.

    “브로스, 브로스, 브로스, 라면에 있어 브로스는 신(神)입니다.”

    브로스의 핵심은 간장

    스프의 핵심이라는 브로스. 그 브로스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간장이다. 농심이 보유하고 있는 브로스는 모두 11종이다. 라면 봉지 뒷면을 보면 여러 가지 성분이 나열돼 있는데 그중 주로 ‘베이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면 그게 바로 브로스다. 예를 들어 신라면을 보면 ‘소고기맛베이스’라고 적혀 있는데 이게 신라면의 브로스다. 소고기, 간장, 표고버섯 등을 활용해 깊고 담백하고 감칠맛을 낸다. 안성탕면의 경우는 ‘양념장베이스’. 기본적으로 안성탕면은 된장이 핵심이나 이는 볶음 된장으로 커버하고 브로스는 양조간장과 소고기간장, 그리고 각종 정미성분을 혼합해 만든다.

    식품공학적으로 간장은 제조 공법에 따라 5가지로 분류된다. 간장이란 게 간단히 말하면 식물(동물도 있지만)의 단백질 성분을 분해시켜 제조한 액상 조미료로 주성분은 아미노산, 펩타이드다. 분해 방법에 따라 간장의 종류가 나뉘는데 크게는 양조간장과 산분해장이 있다. 양조간장은 일본에서 넘어온 것으로 우리가 흔히 왜간장이라 부르는 것이다. 콩이나 소맥 밀가루(밀에도 글루텐이란 단백질이 있다)를 미생물을 이용해 발효시켜 만든다. 통상 6개월 정도 걸린다. 산분해간장은 산(HCl)으로 식물성 단백질을 가수분해(Hydrolyze)해서 얻는다. 독일에서 개발된 기술로 양조간장에 비해 제조 시간이 짧다. 빠르면 몇 시간, 길어도 수일 내로 공정을 마칠 수 있다. 이 둘은 확연하게 다른 특징을 지닌다. 양조간장은 오랜 시간 발효하기 때문에 복합적인 향미가 난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비싸다. 양조간장의 원가가 100이라면 산분해간장은 60 정도 된다. 가격이 싸다고 해서 산분해간장이 맛이 없고 품질이 떨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산분해간장은 발효 향은 없지만 짠맛이 확실하고 구수한 스프에 잘 어울린다. 적용하는 용도도 달라 양조간장은 일반식품에, 산분해간장은 인스턴트 식품에 주로 사용된다. 그래서 라면 스프는 산분해간장을 사용한다. 물론 양조간장이라고 쓰지 말란 법은 없다. 가격은 오히려 부차적인 이슈다. 양조간장은 가공적성이 떨어진다. 즉, 가공 공정에 잘 맞지 않는다. 가공 후 나온 제품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인데, 열을 가할 경우 향이 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머지 3개는 조선간장, 효소분해간장, 혼합간장이다. 조선간장은 옛날 시골에서 소금물을 담은 항아리에 메주를 넣고 숙성을 시켜 만드는데 고체는 된장이 되고 액체는 간장이 된다. 우리가 흔히 국간장, 시골간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효소분해간장은 산(HCl) 대신 효소로 분해한 간장이고, 혼합간장은 두 가지 이상의 간장을 혼합해 만든 것인데 산분해간장에 양조간장 1%만 섞어도 혼합간장이라 부른다.

    사진설명

    김 전 소장은 안성공장 가동 초기에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숨도 안 쉬고 ‘간장’이라고 말한다 “전문적으로는 HVP(Hydrolyzed Vegetable Protein) 라인의 조건을 잡는 것이 가장 까다롭습니다. 흔히 간장은 맛은 온도와 pH(수소이온농도로 용액의 산성 또는 염기성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에 의해 좌우됩니다. pH가 7보다 낮으면 산성, 7보다 높으면 알칼리성인데 이 수치가 얼마가 적절한지는 대강 알려져 있습니다. 양조간장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미생물에 의해 pH가 정해지는데 그 정도에 따라 오차가 납니다. 그런데 산분해간장은 목표로 하는 pH에 맞출 수가 있는 것이죠. 그 조건을 잡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온도인데 간장 맛이 가장 좋게 나오는 온도도 대강 알려져 있습니다. 최적의 간장을 만드는 데 연구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농심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스프개발 연구직원은 40여 명. 이들은 브로스와는 별도로 양념이 되는 기초 재료(원물)의 종류와 배합 비율을 정한다. 예를 들어 신라면에 들어가는 원물은 ▲소고기 ▲돼지고기 ▲고추 ▲후추 ▲파 ▲마늘 ▲양파 ▲청경채 ▲표고버섯 등이고 안성탕면에 들어가는 원물은 ▲닭고기 ▲계란 ▲우유 ▲우거지 ▲미역 등이다. 윤상혁 농심 글로벌 R&D 부문장은 “각각의 라면에 약 25가지의 원물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정작 중요한 건 배합 비율. 이건 철저하게 대외비로 관리한다. 흔히 연구소에서 생산 파트로 내려 보내주는 원물의 종류와 그 배합 비율은 ‘처방전’의 형태로 발부된다. 처방전을 보면 대강 짐작되는 것도 있다. 손으로 작성한 과거 처방전을 보면 예를 들어 BP는 Black Pepper, 즉 후추고 DG는 된장이다. 윤 부문장은 “처방전은 개발자 이외는 접근할 수 없다”면서 “종이 문서로는 아예 발급을 못하도록 보안 시스템으로 막고 있다”고 말한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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