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강릉 선교장 | 나눔과 상생을 실천한 대장원

    입력 : 2025.07.22 15:02:34

  • 선교장 전경
    선교장 전경

    강릉 선교장은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집이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사는 집이 보이고, 집을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진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집안에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도 하나의 인격체라고 인식하여 집과 사람을 하나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선교장의 역사는 선교장이라는 건축물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선교장에 살았던 사람의 역사이다.

    선교장의 색깔은 푸른색이다. 뒷산이 푸르고, 집 앞의 호수가 푸르고, 사람들의 마음이 푸르다. 선교장 뒷산에는 수백년을 지켜온 노송들이 가득하다. 노송들은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선교장 앞은 맑고 푸른 경포호수였다. 그래서 선교장(船橋莊)은 배를 타고 건너다니는 집, 곧 배다리집이 되었다. 푸른 산과 푸른 호수 속에서 살아온 선교장 사람들은 마음이 푸르다.

    선교장에는 향기가 있다. 솔향과 연향, 그리고 사람의 향기이다. 솔향은 강릉의 향기이다. 소나무는 강릉을 대표하는 나무이다. 선교장 뒷산에 멋들어지게 자리한 소나무에서 언제나 강릉의 향기인 솔향이 가슴 가득히 밀려온다. 연향은 배다리골의 향기이다. 여름이면 활래정 연못에는 우아한 자태의 연꽃이 핀다. 연꽃에서 흐르는 은은한 향기는 배다리골을 가득 채워 넘치게 한다. 사람의 향기는 선교장의 향기이다. 따사로운 인심에서 나오는 선교장 사람들의 향기는 솔향, 연향과 어울려 선교장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선교장을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
    선교장을 굽어보고 있는 소나무

    선교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반 상류 주택이다. 선교장은 전형적인 양반 상류 주택이면서 규모가 전국에서 가장 크다. 현재 남아 있는 본채의 규모는 건물 9동에 총 102칸이며, 건평은 318평에 이른다. 배다리골에 있었던 부속건물과 별채, 초가까지 포함하면 선교장은 대략 300칸에 이르는 대장원이었다.

    선교장은 단순한 주택이 아니라 장원(莊園)이었다. 장원은 경제적으로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상응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이에 걸맞은 건축적 공간을 소유하고 있을 때 장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선교장은 경제적으로 만석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많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사대부이면서 지역별로 설치된 곡물창고와 수백명에 달하는 소작인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교장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당대의 정치 실세들, 심지어 외교사절들과 교류하였다. 문화적으로는 당시 최고의 예술가들과 풍류를 즐기면서 이들이 남긴 시·서·화를 소장하고 감상하였다.

    활래정
    활래정

    선교장은 건축적으로 대규모의 다양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장은 가족을 위한 살림 공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방문하는 손님과 친족을 위한 접객 공간,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들이 거주하는 초가 등 대규모의 장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쪽의 안채 및 동별당과 서별당이 가족을 위한 공간이라면, 열화당, 활래정, 방해정 등은 전국에서 모여드는 손님과 식객을 접대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특히 열화당(悅話堂) 영역은 공식적인 접객장소인 동시에 수많은 손님들끼리 교류하는 장소였다. 열화당은 선교장주가 머무는 사랑채인 동시에 최고 위층 손님을 접대하던 공관이다. 그리고 활래정(活來亭)은 주인과 친분이 두터운 손님들만의 접객장소였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도 엄격하였으며, 그 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한편 배다리골에 설정된 이 공간과는 별도로 경포호수 옆에 마련된 방해정(放海亭)은 장기체류하는 귀한 손님들과 가족들을 위한 일종의 별장이었다.

    활래정 주련과 현판
    활래정 주련과 현판
    달밤의 활래정
    달밤의 활래정

    열화당
    열화당

    선교장은 실리경영, 상생경영, 나눔경영 등 그들만의 경영 철학이 있었다. 선교장은 양반이라는 명분보다는 경제적 이익이라는 실리를 선택하였다.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논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제적 논리를 바탕으로 대장원을 경영하였다. 선교장은 과욕을 경계하며 공생의 원칙에 따라 상생경영을 하였다. 철저하게 인정(人情)을 바탕으로 소작인(小作人)과 공생(共生)하며, 이웃과 공생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선교장을 만석꾼의 대장원으로 성장시킨 이후(李垕)는 자손들에게 바른 방법으로 재산을 일으켜 그것을 나눌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즉 ‘사람들이 재산을 일으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에 따르면 일어나고 도리에 거스르면 망한다. 사람이 나누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나눌 것이다. 만약 하늘이 나눈다면 먼저 화를 내릴 것이다’라며 스스로 나누어 공생할 것을 강조하였다.

    행랑채
    행랑채

    선교장은 공공의 이익이 곧 선교장의 이익이라는 인식에서 공익을 우선하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근대학교인 동진학교(東進學校)를 설립하였으며, 한일 합방 이후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자연 재해로 지역 주민이 고통을 받으면 창고에 있는 수천석의 쌀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이의범(李宜凡)은 통천군수로 재직하면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선교장 창고에 있는 수천석의 쌀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중앙정부의 진휼 재원이 이미 바닥난 상황에서 이의구는 자신의 개인 창고를 열어 지역 빈민을 구제하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그 명성은 마침내 선교장을 ‘통천댁’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선교장의 전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 예술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선교장을 전국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선교장은 전국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풍류 문화의 중심지였다. 선교장은 관동팔경의 중심에 있었다. 선교장 바로 옆에 경포호수와 동해바다가 있고,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인 경포대가 있었다. 그리고 선교장은 지리적으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금강산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대관령을 넘어와 일단 선교장에서 잠시 쉬면서 금강산으로 가는 여러 가지 편의를 선교장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선교장에 머물렀던 시인 묵객들의 풍류는 시와 글씨 그림의 형태로 남아 있다.

    대문의 담장
    대문의 담장

    선교장은 독서, 저술, 출판의 가장 모범적인 책 문화를 실천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선비들이 해야 할 일은 책을 독서하고, 저술하고, 출판하는 것이었다. 선교장은 강원도 최고의 장서가로, 일반인들에게 개방함으로써 학문과 문화의 공간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대를 이어 문집과 저서를 저술하고 출판하였다. 특히 선교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석판인쇄기를 구입하여 설치하고 기술자를 고용하여 활래정에서 직접 인쇄 발간하였다. 이 같은 선교장의 출판 문화는 열화당 출판사로 계승된다.

    선교장에는 전통적인 차 문화와 독특한 손맛의 음식이 있었다. 활래정(活來亭)은 차실을 따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다정(茶亭)으로 그곳에서 마시는 연꽃차는 맛과 멋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선교장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에 대한 내훈(內訓)이 있었다. 첫째, 음식을 만들 때는 예술품을 창조하듯 하라는 것이다. 둘째, 정성된 마음과 제철의 재료, 음식에 맞는 그릇으로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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