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지적 호기심이 인공지능을 이긴다

    입력 : 2025.07.17 11:07:09

  •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정답이 넘치는 시대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애써 머리를 굴리거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을 불러내 가볍게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생명의 신비에서 우주의 비밀에 이르는 모든 지식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스마트폰 화면의 작은 네모 창은 질문만 넣으면 순식간에 답을 꺼내주는 ‘만능 지식 자판기’처럼 느껴진다. 인공지능을 ‘궁극의 정답 생성기’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만은 않다. 물론, 그럴듯한 답변 속에 숱한 오류가 숨어 있어 실제 이용엔 조심해야 하나, 몇 년 사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어서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정보의 눈부신 풍요와 누구나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은 역으로 우리 마음에 짙은 어둠도 드리운다. 탐색과 학습, 사색과 경험, 실험과 관찰을 거치지 않고, 답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기 쉽다. 머리로 생각하고 몸으로 부닥쳐 직접 얻어내지 않은 답은 머릿속에 남지도, 몸에 달라붙어 체화되지도 않는다. 이를 ‘구글 효과’ 또는 ‘디지털 기억상실’이라고 한다. 검색 엔진을 사용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읽고 나고 곧장 잊어버리는 현상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면, 아내나 아이, 부모나 친구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한다. 별도의 탐색 과정 없이 답을 떠먹이는 인공지능의 효과는 더욱더 극심하다. 탐색과 발견의 과정이 소멸하고, 도전적이고 창조적 시도가 사라지면서 수동적 태도가 고착된다. 스스로 묻고 답을 얻어가는 지성의 고투는 증발하고, 확실한 정리나 깔끔한 요약을 바라고 갈구하는 ‘정답 소비자’만 늘어난다. 무엇보다 다면적 모색, 비판적 탐구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나는 ‘뜻밖의 발견’이 아예 사라진다. 이런 정보 환경은 인간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을 무디게 한다.

    호기심은 아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의 차이, 즉 미지에 끌리고 무지를 자각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이 마음이 지적 성취의 씨앗이자 창의성의 뿌리이다. 미국 심리학자 수전 엥겔의 <호기심의 두 얼굴>(더퀘스트)에 따르면, 호기심이 넘치는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걸 배운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호기심을 일으킬 때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낯선 것에 끌리고 신기한 걸 좋아하고 새로운 걸 탐색하는 마음이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문학과 예술을 일으켰다. 호기심은 인간다움의 열쇠이자, 인류 문명의 기본 동력이다. 호기심을 잃어버린 사회에선 탐구는 약해지고, 배움은 사라진다.

    다행히 인간은 모두 호기심을 타고난다. 갓난아기는 돌이 지나기도 전에 주변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만지고 흔들고 입에 넣고 냄새 맡으면서 사물들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맛이 나는지, 무슨 소리를 내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내려고 부단히 애쓴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했는가’에 관심을 품고 말을 떼자마자 어른들에게 쉴 틈 없이 “왜, 어떻게” 묻기 시작한다. 인류는 천부적인 ‘정보 탐식가’인 셈이다.

    사진설명

    <큐리어스>(을유문화사)에서 영국 작가 이언 레슬리는 호기심을 ‘다양성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 두 가지로 나눈다. 다양성 호기심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흥미를 보이는 성질로, 어린아이들이 주로 느끼는 호기심이다. 아직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감탄하고, 충동적으로 이리저리 대상을 옮겨가면서, 세상이 주는 자극에 반응하여 떠오르는 질문을 닥치는 대로 던져 댄다.

    그러나 다양성 호기심은 자칫 무의미하고 산만하게 끝날 수 있다. “아이가 호기심을 따르게만 두면 놀랍고 현명하고 지적인 발견의 여정을 스스로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한 질문, 지식의 발견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질문은 주의력 결핍을 촉진하고 좌절감만 늘릴 뿐이다. 이는 억지로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만큼이나 아이의 정신적 발달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이의 질문에 짜증 내지 않고, 좋은 답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쏟아지는 정보를 무작위로 폭식할 때, 우리 뇌는 이 산만한 아이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다.

    지적 호기심은 여기저기 기웃대던 마음에 탐구의 구체적 목표가 생기면서 싹트는 호기심이다. 이는 “더 깊이 있고, 더 큰 노력이 필요하고, 더 방향성 있는” 호기심이다. 다양성 호기심이 지적 호기심으로 바뀌려면, 자신의 무지를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 알고 싶은 어떤 주제에 대해 잘 알면, 내가 아직 무얼 모르는지도 알게 된다. 동시에 앎과 무지 사이의 차이를 좁히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선다. “지적 호기심은 앎의 격차에서 나온다.” 이는 지금 내가 모르는 것을, 나아가 인류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기어이 알려고 하는 열망이다.

    지적 호기심은 쉽게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뇌는 바탕 지식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나, “너무 많이 알아서 모르는 게 없다고 여기는 주제”에 관해선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보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더 깊고 더 넓게 질문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호기심은 배경지식을 먹고 자란다. 스마트폰을 만들려면 컴퓨터와 전화기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과 같다. 체화한 지식이 모자라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얕은 호기심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의 격차는 결국 지성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세상은 점차 “호기심 있는 사람과 앎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나뉘고 있다.”

    지적 호기심을 작동시키려면, 한눈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자주 던져야 한다. 질문만 하면 순식간에 그럴듯한 답을 쏟아내는 인공지능은 깊은 호기심을 증발시킨다. 인공지능은 호기심과 노력, 질문과 지적 탐험 사이의 연결을 끊는다. 인공지능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라도 답을 줄 수 있겠지만 무엇을 더 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못한다. 정보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꼭 호기심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레슬리에 따르면, “좋은 호기심은 미스터리에 뿌리를 내린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세상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를 넉넉하게 쌓은 사람의 세상은 미스터리가 넘쳐난다. 수수께끼는 항상 질문에 부합하는 답이 있으나, 미스터리는 정해진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수께끼의 답은 검색하면 곧장 얻을 수 있으나, 미스터리의 답은 오랜 탐구와 위험한 시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답하는 인공지능은 미스터리를 수수께끼로 바꾸지만, 무엇이든 의심하면서 아직 보지 못한 가능성과 더 나은 앎을 추구하는 호기심은 수수께끼를 미스터리로 바꾼다.

    미국 정보문화 사상가 케빈 켈리는 이야기한다. “기계는 답하기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질문하기 위해 존재한다.” 먼저 겸손히 바보 되기를 택하고, 끝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 안에서 무지를 생성하는 삶은 행복하다. 인공지능이 보편화하는 시대일수록, 필요한 지식의 체화에 더욱 힘쓰고, 지적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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