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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기자의 非상장기업 원석 찾기] BHSN | 계약서부터 법무까지 AI 앨리비가 도와드려요
입력 : 2025.05.21 17: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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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계약서 하나 검토하는 데 며칠을 날렸는지 모르겠어요.”
법무팀 자체가 없는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한숨이다. 특히 글로벌 계약의 경우 초안을 만들고, 영어 문장을 번역하고, 수정안을 주고받으며, 마지막으로 체결본 PDF까지 보관하려면 사람의 시간은 순식간에 고갈된다. 2020년 봄, 서울의 한 작은 사무실에서 출발한 BHSN(비에이치에스엔)은 이러한 기업의 불편함에 집중했다.
문서가 곧 비즈니스’라는 단순한 명제를 붙잡고 서류를 읽고 쓰는 시간을 혁신하자는 비전과 함께 비즈니스 리걸AI 솔루션 ‘앨리비(allibee)’를 세상에 내놨다. 그로부터 5년, 앨리비는 이제 CJ제일제당·한화솔루션·애경케미칼 등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을 고객 리스트에 올렸다. 올해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인 여러 후보 기업군들도 확보했다. 단순한 법률 대행 서비스가 아닌 법률·컴플라이언스·전략 부서를 동시에 지원하는 ‘AI 동료’로 진화하고 있다.
서류 더미를 읽는 AI 어떻게 탄생했나앨리비의 시작점은 창업자 임정근 대표가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이다. 대형 로펌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계약서를 살펴야 했던 그는 서너 줄짜리 조항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실무자들이 비슷한 계약서를 찾아내 용어를 비교하고, 판례를 들춰본 뒤 수정안을 작성해야 했다. 임 대표가 시작한 BHSN은 2022년 자체 언어모델 ‘BHSN‑BERT’를 발표하며 토대를 다졌다. 곧이어 ‘법률 특화 거대언어모델(Legal LLM)’을 공개했고, 문장을 단순 예측하는 수준을 넘어 긴 문서에서 핵심 쟁점을 추론해 내는 ‘리걸 롱시퀀스’ 기법을 접목했다. 여기에 특정 문장을 인용하며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검색증강생성(RAG)을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앨리비는 사용자가 올린 계약서·정책자료·내부 보고서를 수 초 만에 분석하고, 질문을 받으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변호사 같은 AI가 됐다.
글자에서 데이터로, Legal OCR의 한 수하나의 PDF 계약서는 겉보기와 달리 ‘이미지’ 형태인 경우가 많다. 사람이 읽기엔 문제가 없지만, 컴퓨터가 내용을 이해하려면 글자를 일일이 인식해야 한다. BHSN은 2024년 ‘인공지능과 OCR을 이용한 계약서 텍스트 추출 시스템’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이 기술은 표·각주·도장을 포함한 복잡한 서식을 자동으로 분리하고, 조항 번호까지 그대로 보존해 디지털 텍스트를 만들어 준다. 덕분에 사용자는 서류 스캔본을 드래그 한 번으로 앨리비에 올려 즉시 검색·분석을 시작할 수 있다. 이 ‘리걸OCR’은 단순 인식률을 넘어, 추출한 텍스트를 조항 단위로 구획해 이후 AI 분석 속도까지 높인다. 기업으로선 종이 문서 체결본이 ‘죽은 데이터’가 아니라, 분쟁 예방과 리스크 통제를 위한 살아 있는 자산으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앨리비의 한 관계자는 “회사의 근본 가치는 ‘조각난 업무 흐름을 한 화면에 묶었다’라는 데 있다”라며 “계약서 초안 작성, 내부 협업, 결재, 체결 후 이행 모니터링까지 흩어져 있던 단계가 하나의 타임라인에 그려진다”라고 설명했다.
사용자는 준비 중인 계약 건을 클릭하면 AI가 자동 생성한 ‘주의 조항’ 알림을 확인하고, 사내 기준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 수정할 수 있다. 체결 이후에도 일정이 다가오면 AI가 먼저 임박한 변동사항을 알려 준다.
임정근 BHSN 대표 계약만 챙기면 안 된다. 소송 진행 상황, 외부 로펌과의 교신, 예상 법무 비용까지 관리해야 비로소 리스크 전반이 눈에 들어온다. BHSN은 이를 위해 ‘기업 법무 솔루션’ 모듈을 추가했다. 앨리비 측은 이에 대해 “법률 특화 추론(Reasoning) 과정을 구현해 법률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구조화된 토론을 진행해 비즈니스 현안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근거와 함께 제시하는 것이 서비스 강점”이라며 “제약, 건설, 금융, IT 등의 주요 산업 분야의 전문 용어를 학습해 다양한 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알토스벤처스는 2023년 8월 60억원을 베팅한 뒤 1년 7개월 만인 2025년 3월 다시 100억원을 투자했다. 한국산업은행과 우리금융캐피탈까지 참여하면서 누적 투자액은 160억원에 달했다. 벤처캐피털 업계에서 “기술적으로 어렵고, 시장 수요가 명확하며, 이미 실사용 사례까지 확보한 드문 스타트업”이라는 평가가 따르는 이유다. 올해 BHSN은 비즈니스 리걸AI 솔루션 ‘앨리비’의 인지도 제고와 시장 확대에 집중할 계획이며, 핵심 AI 기술을 고도화해 솔루션의 활용 범위와 기업 및 공공기관 협업 등을 늘려나갈 전망이다. 또한 서비스 상용화를 목적으로한 브랜딩 강화는 물론 하반기부터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시장 공략을 위한 글로벌 서비스도 본격화한다.
이를 위해 자체 법률특화 AI 기술을 고도화하고 마케팅 활동을 확대해 앨리비의 기술력과 브랜딩을 강화할 전망이다. 임정근 BHSN 대표는 “AI 전환(AX)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업 업무 형태 및 방향성에도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라면서 “차별화된 기술력과 서비스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발판을 마련하겠다”라고 전했다.
AI의 진짜 경쟁력은 ‘사람과 함께 배우는 방식’앨리비를 구동하는 모델은 방대한 계약서·판례·행정규칙·보고서를 먼저 학습시킨 뒤, 실제 변호사들이 피드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재훈련된다. 그것이 ‘RLHF’, 즉 사람이 선정한 답변을 보상으로 삼아 AI가 스스로 올바른 문장을 찾아가도록 하는 절차다. BHSN 내부에는 ‘알파 테스터’로 불리는 변호사 그룹이 상주해 매주 수천 건의 Q&A를 검증한다. AI가 틀리면 정답을 입력해 다시 가르치고, 과도한 법률 해석을 시도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세운다. 이 인간‑기계 혼합 학습이 결국 BHSN의 진입장벽이다.
앨리비 관계자는 “현재 국문 번역이 가능하며, 계약서 내에서 드래그만으로 필요한 부분을 즉시 번역해준다”라며 “또한 영문 계약서의 복잡한 법률 조항과 법적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분석한다. 앞으로 글로벌 서비스 확대와 함께 적용 언어를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업 계약 문화가 닮은 일본은 BHSN이 꼽는 1차 해외시장이다. 일본 기업 역시 수많은 하청·하도급 계약을 종이로 체결해 왔고, ‘도장 문화’가 여전히 강해 디지털 전환이 더딘 편이다. BHSN은 이미 일본 법령 데이터와 주요 판례를 모델에 학습시켰다. 하반기 현지 파일럿 서비스에 들어가면 “AI가 도장 찍힌 종이를 읽어 주는” 경험을 선보일 예정이다. 더 나아가 베트남·중국 판례와 가이드라인도 앨리비의 데이터베이스에 담겼다. 한국 기업의 현지 법무 리스크를 한글로 질의해 바로 답을 얻을 수 있으니, 해외법무팀에도 매력적인 무기다. 다만 AI가 낸 해설은 결국 ‘조언’일 뿐 최종 의사결정은 인간이 내린다. 사내 변호사들은 AI가 만든 초안을 다시 읽고, 회사의 위험 선호도나 거래 상대방의 특성을 반영해 손질해야 한다. 앨리비가 ‘완성본’을 준다기보다, 계약서 작성 시간을 단축해 인간이 더 높은 단계의 협상 전략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국 리걸테크의 가치는 ‘기업이 더 빨리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전환 흐름 속에서 계약서와 법률 문서는 마지막 블록으로 남아 있었다. 수많은 스타트업이 전자결재·문서관리 솔루션을 내놓았지만, 법률 전문성이 빠진 채 ‘업로드만 편해진’ 수준에 머무르기 일쑤였다. BHSN이 국내 최초로 ‘법률 특화 AI’를 들고 나온 배경이다. AI가 인간이 만드는 규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앨리비의 여정은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가장 실전적인 답변 중 하나다. 만약 계약서 한 장이 서류함 속에서 무형의 데이터로 바뀌고, AI가 그 의미를 해석해 경영진에게 위험을 경고해 준다면, 조직은 더 빠르고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 BHSN이 “AI를 법률문제 해결사로 만들겠다”라는 꿈을 이루어 간다면, 서류더미에 묻힌 직장인의 밤샘은 조금씩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6호 (2025년 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