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냉소와 불신을 넘어 희망을 이룩하는 법

    입력 : 2025.05.19 15: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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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신은 현재 우리 사회를 좀먹는 가장 큰 사회적 질병이다. 극단적 분열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쪼개진 시민들이 서로에게 적대의 말들을 퍼붓는다. 갈등을 들끓게 하고, 증오를 일으키고, 냉혹한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곳곳에서 횡행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유럽 등에서도 타인을 믿는다는 이들이 빠르게 줄고 있다. 2022년 ‘에델만 신용 척도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28개국 중 24개국 국민의 대부분이 타인을 불신하는 성향을 보였다.

    신뢰가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는 유언비어가 날뛰고 거짓이 팽배해 진실을 억누르고, ‘우리 편 편향’이 심해져 대화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붕괴한다. 권위주의가 억압과 폭력, 기만과 책략을 무기 삼아 그 자리에 들어서고, 풍요와 번영이 고갈되어 차별과 불평등이 심해진다. 『희망찬 회의론자』(심심 펴냄)에서 자밀 자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신뢰가 사라진 세계에서 어떻게 희망을 되찾을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냉소라는 심리적 늪에 빠져든다. 냉소는 비아냥대면서 타인을 무시하고, 말꼬리를 물어뜯으면서 사람을 지치게 하는 무례한 태도만은 아니다. 비꼼과 딴지는 냉소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냉소는 상처받은 타인을 위로하고 치유하면서 가볍게 달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아무리 애써도 어차피 변하는 건 하나도 없으니, 마음이라도 잘 추스르라고 속삭이는 사람도 냉소주의자다. 그런 말을 건네는 자는 세상은 바뀌지 않고 타인을 믿을 수 없으니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유혹하는 셈이다.

    코난 도일은 냉소의 본질을 간파하고, 이를 한 인물의 성격에 집약했다. 셜록 홈스의 형 마이크로프트였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보다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나, 평생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았다. 그는 야망도, 정열도 없는 사람으로, 늘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경멸할 뿐이었다. 그처럼 냉소주의자는 인간의 제일 나쁜 측면에 눈을 두는 사람, 우리가 사는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없다고 믿는 사람, 우리가 함께해도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절망하고, 나쁜 사회에 철저히 굴복한다.

    관점은 우리 마음을 특정한 형태로 길들인다. 어떤 기대를 품고 무슨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틀이 달라진다. 자키에 따르면, 냉소주의자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정직하지 않다”라고 본다. 그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남을 돕기 싫어하고, 남이 지켜보거나 남한테 걸리는 게 두려울 때만 정직하게 행동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안 믿기에 그들은 관계에 굶주려 있고, 친구를 안 구하기에 고립의 대가를 치르며, 상대가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하기에 거래마다 큰 비용이 든다. 이런 ‘사회적 영양실조’는 냉소주의자의 삶을 힘겹게 만든다.

    세상살이엔 경험이 이룩하는 지혜보다 똑똑할 수는 없다. 타인을 자주 접하고 대해서 경험이 쌓인 이들은 세상 물정을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좀처럼 호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냉소주의자는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기에 거짓말하는 이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들한테 속을까 두려워하므로 타인을 알 기회를 잃는다. 사실 이들은 영리한 척하는 바보이고, 정직한 체하는 거짓말쟁이이다.

    이들은 협력과 사랑을 디딤돌 삼아 공동체를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활동을 할지라도 방구석 인간처럼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냉소주의자는 인간의 나쁜 점만 보고, 잘못된 가능성에만 주목하기에 조직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기회를 잃는다. 냉소주의는 “어두운 정신의 덫”이다. 냉소주의자가 날뛰는 세상은 갈수록 “더 비열하고, 더 슬프고, 더 병든다.”

    인간 본성을 끔찍한 괴물이라고 상상하는 냉소주의자는 타인을 일절 믿지 않기에 잔뜩 웅크린 채 자기를 챙기기에 급급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은 더욱더 무서운 곳으로 바뀌어 방구석 외톨이로 전락할 뿐이다. 시간은 냉소주의자를 외로움에 사무치는 이들로 만든다. 냉소는 우리 안에 우울증의 씨를 뿌리고,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가져오며, 알코올중독을 유발한다. 냉소주의자는 열심히 애쓰지 않기에 경력이 쌓일수록 재정적 고전을 면치 못하고,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나이 들수록 쉽게 병들고, 일찍 죽는다.

    우리 안에 자리잡은 불신을 이겨내고 냉소를 무찌르려면,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보는 믿음, 즉 희망이 필요하다. 낙관과 희망은 다르다. 낙관은 상황이 무조건 나아지리라 믿는 마음이다. 이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우리가 더 좋은 미래를 이룩하기 위해 굳이 애써야 할 이유를 빼앗는다. 이와 달리 희망은 삶을 곧바로 바꾸어주지는 않으나, 언젠가 실현되리라고 믿는 마음이다.

    그래서 희망하는 사람은 가능성을 믿고, 주어진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들은 부지런히 애쓰면서 가능한 많은 걸 궁리해 삶을 조금씩 미래를 향해 밀어간다. “희망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얼핏 비춰 주면서 이를 위해 싸우라고 부추긴다.” 낙관은 이상적이나, 희망은 실제적이다. 희망은 우리를 “평화를 위해 힘쓰고,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앞장서게 한다. 그래서 희망을 좇아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 삶에 품격을 더하고, 공동체의 존경을 얻는다.

    우리 마음에서 이런 냉소를 몰아내는 방법이 회의주의다. 회의주의는 “증거 없이 주장을 믿지 않는 태도”로, “추정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다. 냉소주의자와 달리, 회의주의자는 타자를 잠정적 사기꾼이나 범죄자로 보는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따져 본다. 그들은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혀 일단 사람을 의심하기보다 타인이 실제로 얼마나 관대하고 믿을 만하며 마음이 열려 있는지를 배우려 애쓴다.

    살펴보면 인간의 본질적 선함을 증명한 사례는 넘쳐난다.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늘 속이려 한다고 믿는 이들을 불러 실제로 그런지 차분히 따져보면 마음속 믿음과 현실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선한지 알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최근 미국의 소도시 첼시의 한 독립서점 이야기가 전 세계에 감동을 주었다. 내부 사정으로 한 블록 밖으로 이사하게 된 이 서점은 곤란에 처했다. 돈도 없고 직원도 없는데, 책 9000권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주민들이 몰려나와 인간 띠를 이루어 이사를 도왔다. 이처럼 아무 대가 없이도 인간에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동정심을 발휘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선하면 초콜릿을 먹을 때만큼이나 강렬한 기쁨을 얻는다. 먼저 후퇴해서 웅크리는 냉소주의자가 되기보다 타인에게 손 내밀어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갈 때 더 나은 삶을 이룩할 수 있다. 자키는 말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긍정적 경험을 집적하는 것이 우리 의식 수준을 높이고 사회적 관계를 음미하는 데 도움을 준다.” 희망의 명령을 좇아 과감히 움직이는 것이 불신에 젖어 갈가리 찢긴 세상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타인을 믿고 선한 의지로 서로 협력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된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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