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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경기 이끄는 독일 대규모 경기부양책에 방산·은행·에너지株 ‘쑥’
입력 : 2025.05.13 15: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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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뒤셀도르프의 라인메탈 본사에 있는 로고. <자료: AFP 연합뉴스>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이 대규모 경기 부양을 추진하면서 증시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독일 대표 주가지수인 닥스(DAX) 지수는 올해 들어 7% 넘게 오르며 유럽 증시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방산과 금융주의 강세가 눈에 띈다.
4월 16일(현지시간) 기준 닥스 지수는 올해 들어 7.04%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가 10.30% 내리고 나스닥 지수가 15.55% 하락한 것과 대조된다. 코스피 지수가 2.98% 올라 선방한 것과 비교해도 독일 증시는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닥스 지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 상장된 시가총액 상위 40개 기업으로 구성되며, 산업·자동차·금융·화학 등 다양한 업종이 포함돼 있다. 이 외에도 중형주 중심의 MDAX는 올 들어 5.65% 오르며 상승 흐름을 타고 있다.
닥스 지수는 유로스톡스50(2.00%), 프랑스 CAC 40(-0.69%), 영국 FTSE 100(1.26%) 등 유럽 주요 지수도 크게 앞질렀다.
독일 기업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도 우수한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블랙록의 ‘아이셰어즈 MSCI 독일’ ETF는 연초 대비 16.97% 올랐다. 이 ETF는 MSCI 독일 지수를 추종하며 정보기술, 산업재, 금융, 통신, 소재, 소비재 등 다양한 업종에 투자한다.
닥스 지수를 추종하는 ‘글로벌 X 닥스 독일’ ETF는 같은 기간 16.53% 상승했다. 국내에 상장된 ‘KIWOOM 독일DAX’ ETF도 13.49% 올랐다. 이 상품 역시 닥스 지수를 추종하며 SAP(15.58%), 지멘스(9.05%), 알리안츠(8.60%), 도이치텔레콤(7.40%), 에어버스(5.38%) 등을 구성종목으로 한다.
유럽 방위비 확대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선 방산주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방위산업·산업용 기어박스 전문 기업인 렌크는 연초 대비 175.75% 급등했다. 유럽 최대 종합 방산기업인 라인메탈은 올해들어 140.29% 상승했다. 철강·산업 엔지니어링 기업이지만 잠수함과 해양 방산 장비 사업을 영위하는 티센크루프는 137.88% 뛰었다. 군용 레이더 시스템과 전자전 장비를 공급하는 헨솔트는 같은 기간 93.56%의 수익률을 냈다.
이 같은 강세는 유럽 전역에서 국방비 지출이 급증한 데 따른 결과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인해 유럽 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기준인 GDP의 2% 이상을 국방비로 편성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방산 수출 심사 절차를 완화하고, 우방국에 대한 수출 승인 비율을 대폭 높이는 점도 방산주 상승에 기여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일 라인메탈의 생산라인에 있는 레오파르트2 전차. <자료: AFP 연합뉴스> 라인메탈은 전차, 장갑차, 포탄 생산 분야에서 유럽 내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대규모 수출 계약을 연이어 체결했다. 유럽 국가들의 국방 예산이 확대되면서 렌크의 군용 변속기·구동 시스템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지난해 말 기준 렌크의 수주 잔액은 50억유로(약 8조 637억원)에 달한다. 렌크는 지난 3월 독일 중형주 지수인 MDAX에 편입되면서 기관 투자자들의 유입이 확대됐다. 티센크루프는 잠수함과 해양 무기 시스템을 중심으로 수주가 늘고 있다. 헨솔트는 레이더·전자전 장비 분야에서 NATO 회원국들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실적이 급증하고 있다.
재정 확대, ECB 금리 인하독일의 금융주도 증시 상승을 견인했다.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상업은 행인 코메르츠방크는 올해 들어 49.27% 급등했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치방크도 25.09% 올랐다. 보험사인 알리안츠와 뮤닉리는 같은 기간 각각 17.37%, 20.41% 상승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올해 세 차례 금리 인하를 단행한 데 이어 추가 인하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경기 성장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ECB는 지난해에만 금리를 네 차례 내린 바 있다. 금리 인하는 일반적으로 은행주에 부정적이지만, 기업 대출이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코메르츠방크와 도이치방크 주가가 상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코메르츠방크는 기업금융 부문 강화와 함께 디지털 전환 투자를 통해 지난해 말 실적이 개선됐고 올해도 성장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도이치방크는 글로벌 자산운용, 투자은행 부문 확대를 통해 수익원을 다각화하고 있다.
독일 정부의 재정 확대 움직임도 금융주 주가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 정부의 재정 확대가 시중 유동성을 늘리는 역할을 하면서, 보험·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금융주 투자 비중도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독일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전례없는 재정 지출을 단행하고 있다. 독일 의회는 최근 10년간 1조 유로(약 1590조원) 규모의 국방·인프라 투자 계획을 승인했다. 이 중 국방 예산은 1000억유로 규모로, 기존보다 2배 이상 확대됐다. 나머지 재정은 철도·도로 등 교통 인프라 현대화, 반도체·배터리·AI 등 전략 산업 육성,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재생에너지 및 수소 인프라 확대 등에 쓰일 예정이다.
증시 상승세 업종 전반으로 확산독일 증시 상승은 에너지, 헬스케어, 통신 등 주요 업종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유럽 최대 규모의 에너지 기업 중 하나인 이온은 올해 들어 34.95% 상승했다. 이온은 전력·가스 유통, 에너지 인프라 솔루션, 에너지 소매 등의 사업을 영위하는데, 유럽 각국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 따라 전력망 투자와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수요가 증가하면서 주가가 크게 뛰었다.
에너지 기업인 RWE도 같은 기간 19.24% 올랐다. RWE는 화력, 원자력 발전뿐만 아니라 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과 에너지 트레이딩·저장·공급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지난해 말 호실적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 3월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RWE 지분 약 5%를 확보하고 자사주 매입 확대 등 적극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요구하면서, 추가적인 주가 부양 기대감이 형성됐다.
재생에너지와 전력 인프라 사업을 영위하는 지멘스에너지는 15.26% 상승했다. 지멘스에너지는 풍력·태양광과 전력망 인프라 투자 확대의 수혜를 받고 있으며, 특히 수소 인프라 구축 관련 유럽 정부의 보조금 정책에 힘입어 중장기 성장성이 부각되고 있다.
건설자재 기업인 하이델베르크 머티리얼즈는 올 들어 37.58% 급등했다. 이 회사는 시멘트, 골재, 레미콘, 아스팔트 등 건설에 필요한 자재를 공급한다. 독일 정부가 발표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건설·인프라 투자 확대를 촉진하면서 하이델베르크 머티리얼즈와 같은 건축자재 기업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통신·인프라 기업인 도이치텔레콤은 10.59% 올랐다. 미국 자회사인 ‘T-모바일 US’가 호실적을 보였으며, 미국 내 5G 보급 확대와 함께 가입자 수 증가가 이어지고 있다. 독일 본사의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배당 여력 확대로 이어지며 투자 매력도가 높아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 <자료: EPA 연합뉴스> 헬스케어 기업 프레제니우스는 17.98% 올랐다.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 등 바이오시밀러 신약이 유럽·미국 시장으로 출시되면서 산업이 성장할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약·화학 업체 바이엘 주가는 올해 들어 8.50% 올랐다. 바이엘은 신약 파이프라인 확대와 함께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에 나서고 있다.
특히 면역질환, 항암제, 농업용 바이오 제품 분야에서 긍정적인 임상데이터가 나오면서 투자자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시장 긍정 전망 속 “美통상마찰 주의”글로벌 투자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은 독일 증시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캐피탈그룹은 올해 닥스 지수를 구성하는 독일 기업의 주당순이익(EPS)이 10.5%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며, 유럽 주요국 중 가장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크리스토프 오메 ODDO BHF 시니어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5000억유로 규모의 인프라 투자 패키지는 독일 경제 회복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절호의 투자 기회”라며 “효과가 단기적으로는 바로 나타나지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내년부터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0.5~1.4%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DAX, MDAX, SDAX 지수의 EPS가 각각 10%, 35.3%, 49.5% 성장할 것”이라며 “장기 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수익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독일 증시의 강세는 유럽 전역의 투자심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이 본격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면서, 프랑스·이탈리아 등 주요 국가에서도 유사한 재정 확대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유럽 증시는 그동안 미국 증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상태였던 만큼, 반등 여력이 크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유로스톡스50 지수도 최근 상승폭을 확대하고 있다.
유럽 방산주들이 대거 오르며 방산 업체 주가를 추종하는 ‘스톡스 유럽 토탈마켓 항공우주·방산 지수(SXPARO)’는 올 들어 20.87% 올랐다.
다만 독일 증시의 강세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정학적·통상적 변수를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2기 미 행정부 출범 이후 발생한 미국과 유럽 간 통상 마찰은 독일 기업에 부담 요인이다. 자동차, 정밀기계, 화학 제품 등 독일의 수출 주력 산업이 직접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4월 2일 트럼프 행정부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연합(EU)에 20%의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한 후 이를 90일간 유예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철강·알루미늄 25% 관세, 자동차 25% 관세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가 장기화될 경우, 독일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이 훼손될 수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특히 BMW, 폭스바겐, 지멘스 등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대형 제조업체들은 중장기 리스크에 직면하게 된다.
이밖에도 ECB가 당초 예고한 추가 금리 인하를 보류하거나 연내 인플레이션이 재확산해 금리 동결·인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경우 독일 증시의 상승세가 둔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유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