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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 후 바로 칼 뽑은 호주, 트럼프 영화관세에 맞선다
입력 : 2025.05.08 10: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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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 생성 이미지 호주가 다시 한번 노동당 정부를 선택했다. 5월 3일 치러진 총선에서 앤서니 알버니지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과반을 확보하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한때 경제 실정 논란과 인플레이션 압박으로 흔들리던 여당이 막판에 표심을 되돌릴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국외 변수 덕분이었다.
바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외국 영화 100% 관세’ 선언이다.
할리우드의 핵심 해외 촬영지이자 세제 혜택을 통해 문화산업을 적극 육성해온 호주는, 트럼프의 이번 조치가 자국 경제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 속에서 빠르게 ‘반(反)트럼프’ 정서로 결집했다.
이번 총선의 표면적인 승리는 노동당이지만, 그 배경에는 영화관세라는 문화 통상 이슈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와 경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외교적 마찰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알버니지 정부는 선거 승리 직후부터 본격적인 산업 방어 전략에 착수했으며, 향후 미국과의 협상뿐 아니라 영화산업 구조 재편에도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발 관세 쇼크’ 문화강국 호주를 깨우다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미국 영화산업은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라며, 해외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에 대해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하루 뒤 “최종 결정은 아직”이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미국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를 동원한 검토가 실제로 진행 중인 만큼 현실화 가능성은 낮지 않다.
그 타격이 가장 먼저 예상되는 나라가 바로 호주다.
호주는 지난 10여년간 마블 유니버스를 비롯한 수많은 할리우드 대작이 촬영된 ‘핵심 기지’다.
시드니 인근에는 세계적 수준의 촬영 스튜디오와 후반 작업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연방정부는 대규모 제작비의 30%를 환급해주는 ‘로케이션 오프셋’ 제도를 운용 중이다.
여기에 각 주 정부가 개별적으로 추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호주는 자연경관과 세제 혜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드문 제작지로 부상해왔다.
최근 개봉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나 ‘혹성탈출: 종의 전쟁’ 등도 호주에서 촬영된 대표작들이다.
이러한 조건 덕분에 영화산업은 단순한 문화의 영역을 넘어 호주의 전략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적 효과도 상당하다.
시드니와 멜버른 지역에서는 영화산업이 연간 수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으며, 부가가치 효과는 수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이 있다.
따라서 트럼프의 영화관세는 단순한 ‘상징적 발언’이 아닌, 호주의 문화경제에 실질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호주 정부는 곧바로 반응했다. 토니 버크 내무부 장관은 “호주 영화산업의 권리를 위해 단호하게 나설 것”이라고 천명했으며, 페니 웡 외교장관은 “우리는 여전히 미국과 훌륭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이번 조치는 협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중시하되, 자국 산업의 ‘생존권’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노동당 재집권의 비결은 ‘문화주권’ 방어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막판까지 고전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한 경제, 중국과의 무역 갈등, 주택 시장 과열 등 누적된 문제로 인해서 지지율이 흔들리던 가운데, 트럼프의 관세 발언은 노동당에게 기회가 됐다.
실제 여론조사 기관 로이 모건은 관세 발언 이후 실시된 조사에서 노동당 지지율이 5% 가까이 상승한 것으로 집계했다.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연합은 “관세 문제는 미국과의 외교적 문제일 뿐, 국내 선거 이슈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반발했지만, 유권자 다수는 “호주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라는 노동당의 경고에 더 귀를 기울였다.
총리로 재선된 앤서니 알버니지는 “호주 국민은 공정과 열망, 기회라는 가치를 선택했다”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로 보기 어렵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상대국 입장에선 곧 ‘우리 경제는 뒷전’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으며, 그 논리가 문화 분야에까지 확장됐을 때 이를 방어할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점을 호주는 이번 선거를 통해 확인했다.
특히 영화산업 종사자뿐 아니라 일반 국민 다수에게도 ‘문화주권’을 지키는 문제가 생존과 연결된다고 각인되면서, 노동당의 메시지는 실질적인 표로 이어졌다.
호주의 다음 수는 무엇인가관세 문제는 아직 불확실성이 크다. 백악관조차 “최종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업계 내부에서도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그러나 호주는 선제적으로 ‘위기관리’를 시작했다. 정부는 ‘스크린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화산업 관련 기관들과 긴급 협의에 돌입했으며, 트럼프 조치에 대비한 ‘시장 다변화’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알버니지 총리는 선거 기간 내내 “재생에너지 기반의 문화 클러스터”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태양광과 풍력을 기반으로 한 ‘그린 스튜디오’를 조성해 장기적으로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이 전략은 ‘친환경’이라는 글로벌 흐름과도 맞닿아 있으며, 유럽이나 아시아의 콘텐츠 기업들과의 공동 제작도 염두에 둔 구조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자국 OTT 플랫폼에 대한 지원이다.
호주는 ‘스탠(STAN)’이나 ‘브리트박스’ 같은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지만,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독자 콘텐츠 생산과 플랫폼 육성에 재정과 정책을 집중할 경우, 호주는 미국 관세에 의존하지 않고도 문화주권을 지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도 시사점은 크다. 콘텐츠 산업은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국가 전략 산업이며, 보호무역 흐름 속에서 언제든 통상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세제 혜택만으로 글로벌 기업을 붙잡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시장 접근성과 파트너십 다변화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알버니지 정부의 대응은 어쩌면 한국 콘텐츠 산업에도 귀중한 실전 길잡이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한 마디가 총선의 향방을 바꾸고, 새로운 정부의 산업 전략을 견인한 지금.
작은 개방경제가 어떻게 자국 산업을 지키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유지할지에 대한 해답은 이제 호주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