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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y Walking] 전북 순창 용궐산 하늘길, 잔도 따라 쉬엄쉬엄 오르는 힐링 스폿
입력 : 2024.06.17 17: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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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모레가 정년인데, 아직도 이런 고민을 할 줄은 몰랐어요. 아니다. 자식 걱정은 평생이라 했으니 마인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이라도 있으면 업고 다니겠어요. 요즘엔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다니까.”
2년여 만에 만난 A부장 입에서 “모르겠다” “답답하다” “무섭다”란 말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에 품고 다녔던 그 나름의 울분이었는지 “어떻게 지내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탄이 이어졌다. “같이 상에 앉으면 어느 땐 밥맛이 뚝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자 식당 주인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좌불안석이다. A부장 입에서 먹다 만 밥알과 함께 큰 한숨이 삐져나오는 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2년 전, 지방지사로 발령받아 내려가며 타의적 기러기 아빠가 된 A부장은 올 초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전례 없는 인사 발령에 사내 인사들의 너스레가 이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간, 쓸개 내놓고 버틴 2년이 뿌듯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아들과의 대화가 꽉 막혀버렸다.
“말 안 해도 알 줄 알았지 뭐. 한 달에 많아 봐야 서너 번 집에 들르니 나도 푹 쉬고 싶어서 아들 일에 간섭하지 않았는데, 이젠 매일 보니 이것저것 챙기고 싶은 거예요. 아마 그게 싫었나 봐.”
“원인은 이미 알고 계신가 보네. 잘못했으면 미안하다 사과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그게 힘들어. 저 위해서 더럽고 치사해도 꾹 참고 버티고 있는데…. 이런 생각에 갑자기 욱하는 거야. 어느 땐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 후졌나 싶을 때도 있고…. 그러면 안 되는데 ‘왜 눈을 그렇게 뜨냐’ ‘반갑지 않냐’ 큰소리부터 쳐대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소주 한잔 탁 털어넣고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던 A부장이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초등학생 땐 둘이 여행도 자주 갔는데, 가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고 싶네요. 고3이라 상전이긴 한데, 같이 가자면 가주려나.”
두서없이 오고 간 푸념이 공허했는지 벌컥이며 물 한잔 들이켜는 모습이 왠지 건조했다. 일주일 뒤 마주한 길에서 A부장이 떠올랐다. ‘아, 서로 잡아주고 끌어주며 오르기에 이보다 좋은 길이 있을까’ 싶었다.
순창이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바로 그곳이다. 섬진강을 끼고 전라북도 내륙에 자리한 이곳은 여름 막바지에 메주를 빚어 말린 후 겨울에 고추장을 완성한다. 습지가 많은 분지라 고추장의 발효가 활발해져 여타 지방의 고추장보다 맛이 깊고 색이 곱다고 알려졌다. 그런 이유로 마트의 고추장 코너에는 늘 브랜드명 앞에 순창이란 이름이 선명하다. 마치 브랜드명인 양 열에 아홉은 순창이란 명칭을 달고 있다. 그만큼 순창 하면 고추장이 떠오른달까. 그런데 이 공식, 요즘엔 살짝 달라졌다. MZ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SNS를 살펴보면 #순창 뒤에 #용궐산 #하늘길이 이어진다. 2020년에 첫선을 보인 ‘용궐산 하늘길’ 얘기다. 거대한 암벽 위에 놓인 약 1㎞(1096m)의 잔도(험한 벼랑에 선반처럼 달아서 낸 길)에서 바라본 풍경은 꽉 막힌 속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고 탁 트였다. ‘죽기 전에 꼭 가야할 트레킹 코스’라고 소개한 누군가의 릴스, 괜한 호기가 아니다.
섬진강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길유명세를 탔으니 찾는 이가 많은 건 당연한 일. ‘용궐산 치유의 숲’에서 시작되는 트레킹 코스는 평일에도 찾는 이가 꽤 많다. 넓게 펼쳐진 주차장이 있지만 주말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빽빽하다는 게 주변 상인의 전언이다. 아예 일찍 서두르든지 늦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차를 대고 나설 수 있단다. 숲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은 색이 푸르고 깊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크고 넓은 강이 아니라 산골짜기를 타고 넘는 생기 넘치는 강이다. 매표소에서 표(성인 1인 4000원)를 끊고 입구로 들어서면 하늘길이 시작된다. 고개 들어 산을 올려다보면 거대한 암반에 나무데크로 낸 길이 지그재그로 선반처럼 걸쳐 있다. 어떻게 저런 바위에 길을 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하늘길 코스는 왕복 3.2㎞의 원점회귀코스다. 매표소에서 하늘길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600 여m의 돌계단을 오른 후 1㎞가량 나무데크를 오르면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정자에 닿는다. 비룡정이다. 매표소의 안내원에게 물으니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데 결코 쉽게 봐선 안 된다. 우선 하늘길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이어진 가파른 돌계단부터 버겁다. 작은 돌을 이어 붙인 게 아니라 커다란 바위를 퍼즐처럼 연결해 길을 냈는데, 오를 때나 내려올 때 모두 뛰는 건 금물이다. 최대한 하나하나 심사숙고해서 발을 내딛어야 무릎이나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곳곳의 나뭇가지에는 울긋불긋한 리본이 매달려 있다. 전국 각지의 산악회 표식이다.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비룡정 반질반질한 화강암 위로 오금 저리는 잔도나무데크 계단을 오르다 거대한 암반이 눈에 들어오면 그곳부터가 하늘길의 시작이다. 언뜻 북한산 부럽지 않은 크기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시야도 넓어진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시선을 멀리해도 섬진강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휴대전화 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능으로 이 모습을 담을 수 있을까 싶어 실행해봤지만 눈에 담은 풍경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구도가 잡혔다. 한참 오르막이던 계단이 평평하게 이어지는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앞을 바라다보면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에 앉은 것처럼 하늘 위로 붕 뜬 것 같다. 그러곤 살짝 오금이 저려온다. 슬쩍 내려다보면 푸른 여름 산을 가로지르는 섬진강도 푸른빛이다. 강은 임실군에서 순창군으로 이어진다.
이 길, 혼자서도 좋지만 둘이 오르면 더 좋은 길이다. 서로 손을 빌려가며 올라야 안전하기에 어쩌면 없던 정도 싹틀 수 있는 구간이다. 비룡정에 올라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를 땐 두런두런, 도착지점에선 조용히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트레킹 코스다. 아, 용궐산 치유의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순창5일장이 자리했다. 개장한지 100년이 넘은 이 시장은 순대국이 유명하다. 특히 속이 꽉찬 피순대가 일품이다.
선지와 채소로 속을 채운 피순대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