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욕탕을 성매매업소로 이용했다고?…현대까지 이어진 고대로마의 흔적 [사색(史色)]
입력 : 2023.06.13 21:00:00
-
[사색-26] 그녀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성군이었습니다. 혼란한 상황에서 즉위해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도 그녀는 조국의 이익을 철저히 추구한 실리주의자였습니다. 적들도 그녀의 치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붉은빛이 도는 금발, 검은 눈동자, 생기가 넘치는 얼굴, 170cm를 훌쩍 넘는 키 역시 그녀의 매력을 더해주었지요. 한눈에 봐도 여장부였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영국 국립초상화갤러리 소장품. 작가는 불명.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지근거리의 사람들 평가는 사뭇 달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악취’가 원인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만 목욕하는 성향이 평판을 망가뜨렸지요. 양치질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단 음식은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행여 입에서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지요. 오늘날 치위생학이 증명하듯, 그녀의 이는 썩어갔습니다. 결과는 끔찍한 구취. 영국의 전성기를 이끌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단것을 좋아해 치아가 많이 빠졌다. 비위생적인 데다가 천연두도 앓아 노후에 몰골이 형편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플랑드르 화가 마르커스가 그린 진실한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엘리자베스 1세가 그저 지저분한 사람인 건 아니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목욕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불결이 일종의 시대정신이라고 해야 할까요. 청결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현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역사 속 목욕은 ‘냉탕과 열탕’을 오간 셈이지요.
오늘은 ‘목욕의 역사’를 사색합니다. 태양이 점점 그 열기를 더하는 요즘, 시원한 목욕탕과 살얼음 동동 띄운 식혜가 그리워지는 요즘이어서입니다. 마침 오는 14일은 국제 목욕의 날(International Bath Day)입니다.
폴란드계 프랑스인 화가 장 피에르 노블랭 드 라 구르다인이 그린 공원에서의 목욕. 1785년 작품. “우리는 목욕의 민족”…고대 그리스의 목욕사랑“유레카.”
인류에 가장 많이 알려진 목욕 장면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욕탕에 몸을 담그면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목욕을 즐겼다는 방증입니다.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에도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목욕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지요. 기원전 800년의 기록입니다. 목욕의 욕사가 인류사만큼이나 유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목욕하는 그리스 철학자 아르키메데스를 묘사한 16세기 삽화.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고대 그리스인들은 목욕을 치료의 도구로도 생각했습니다. “찬물과 뜨거운 물에 몸을 차례로 담그면 신체 영양분이 골고루 흡수되고 두통도 해소된다.” 기원전 5세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목욕을 중히 여겼기에, 아기가 태어날 때도 깨끗한 물로 목욕시켰습니다. 일종의 통과 의례처럼 말이지요. 세상을 떠난 이의 육신도 정해진 의식에 따라 깨끗이 씻겼습니다. 그리스인 삶의 시작과 끝에는 목욕이 있었던 것이지요.
고대 그리스 도기에 묘사된 목욕하는 두 여성.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로마의 목욕탕에선 퇴폐의 향기가 난다“목욕이 로마를 무너뜨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목욕을 경외의 느낌에서 바라봤다면, 고대 로마에서 목욕은 쾌락과 연결됩니다. 고대 로마 지도자의 권력 기반은 ‘빵과 서커스’였습니다. 먹을 것과 유흥을 통해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었지요. 이 서커스 중 하나가 목욕이었습니다. 목욕탕이 일종의 성매매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폼페이 교외 목욕탕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에는 외설적인 그림이 많이 그려져있다. 목욕탕이 매춘업소로 이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저작권자=Sailko> 고대 로마인들은 나체로 온수에 들어가서 느끼는 기분 좋은 나른함을 성교와 연관 지었습니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의 한 목욕탕에는 입욕자들의 성교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지요. 당시 목욕탕이 매매춘의 장소였단 걸 방증합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온수욕에 의해 로마는 무너졌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쾌락’만이 지배논리로 군림하는 나라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는 통찰이지요.
영국 바스의 로마식 목욕탕. 서기 1세기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고대 로마는 점령지에 목욕탕을 짓곤 했다. <저작권자=diego(at)delso.photo> 목욕탕이 매춘 장소로 이용된 건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12세기 후반 잉글랜드 헨리 2세는 목욕탕이 집단으로 들어선 서더크 지역을 합법적인 성매매 집결지로 인정하기도 했었지요. 현재 독일에서도 사우나 시설이 성매매 업소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고대로마의 관습이 현재까지 맥을 잇고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 ‘불결’을 신념으로 삼다“더러운 몸은 신앙을 나타내는 상징”
기독교 공인 이후 목욕은 그야말로 ‘철퇴’를 맞습니다. 목욕을 일종의 ‘쾌락’행위로 보아 삼가야 할 행위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철저히 구분한 기독교에서는 인내를 강조했지요. “우리가 숭상해야 할 건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육체에 행복을 주는 쾌락 행위는 ‘죄악’시 한 것이었습니다. 목욕 행위는 몸에 안락함을 주는 행위였기에 용인할 수 없게 되었지요. 고대 로마인들이 목욕탕 내에서 매춘행위를 자주 했던 것 역시 기독교인들의 목욕 배척의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더러운 몸이 신앙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했지만, 나병 환자를 직접 씻어주는 선행을 배풀기도 했다. 그림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리발타가 그린 ‘천사의 음악으로 위로를 받는 성 프란치스코’. 초기 성인들 역시 ‘불결’을 훈장처럼 달고 살았습니다. 여성 성인 아그네스는 30년의 삶 동안 몸의 어느 부분도 씻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잉글랜드의 성인인 고드릭 역시 씻지 않고 예루살렘까지 걸어갔지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더러움을 찬미합니다. 성 제롬은 “온수욕은 여성의 성욕을 불러일으킨다”며 편견을 드러냈습니다.
성 제롬은 온수욕이 성욕을 불러일으켜 죄악을 부른다고 지적했다. 베네치아 화가 지오반니 벨리니가 그린 ‘성 제롬’. 1505년 작품. 중동의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에서 “기독교인 아기는 태어날 때 머리에 물을 붓는데, 이후에는 평생을 씻지 않는다”고 적었을 정도였지요. 타 종교에 대한 경멸이 담긴 용어겠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기독교인들 역시 치료 목적을 위한 아픈 사람의 온수욕이나 수도승들의 주기적 ‘냉수욕’은 간헐적으로 용인했지요.
이슬람의 목욕문화 기독교 문명에 스며들다전쟁은 칼의 대립임과 동시에 문화의 교환입니다. 1090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충돌한 십자군 원정으로 중세 유럽의 목욕 문화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생활한 십자군이 중동식 목욕문화를 경험하면서였습니다. 동방식 목욕탕인 ‘맘’의 등장이었지요.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이 그린 이슬람의 목욕탕. 문화는 물과 같은 속성이어서, 문명 곳곳으로 퍼져 나갔지요. 1292년 파리에 26개 목욕탕이 자리를 잡았을 정도입니다. 14세기 런던에도 18개 목욕탕이 성업 중이었다고 전해지지요. 목욕의 르네상스가 왔다고 선언할 무렵, 그러나 시련은 다시 찾아옵니다. 15세기 유럽을 덮친 흑사병이었습니다.
흑사병, 목욕탕을 폐허로 만들다“죽기 싫으면 부디, 목욕탕을 피하시오”
1347년부터 시작한 유럽 흑사병은 25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왕도 영주도, 교황도 주교도 속수무책이었죠. 1348년 프랑스 필립 6세는 파리대학교 의학부 교수들에게 역병의 원인을 규명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들이 내놓은 방대한 분량의 책이 오피니옹이었습니다. 그들은 토성 목성 화성이 겹치는 날 질병을 일으키는 증기가 공기를 오염시켰다고 주장했죠. 그리고는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를 규정합니다. 바로 목욕이었습니다. 뜨거운 목욕으로 사람의 몸이 축축해지고 피부에 구멍이 열면 역병이 온몸에 쉽게 침투한다고 설명한 겁니다.
대(大) 피터 뷔르겔의 ‘죽음의 승리’. 중세 유럽을 황폐화한 흑사병의 공포를 담았다. 1562년 작품. 1450년 샤를 7세의 주치의 파르는 파리의 목욕탕을 폐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팬데믹이 노래방과 클럽을 문 닫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이 규명한 대로 지저분한 사람일수록 페스트균에 감염되기 더 쉬웠습니다. 목욕탕이 줄어들수록 흑사병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구조였던 것이지요.
17세기 로마의 흑사병 의사 슈나벨 박사의 동판화. 1650년께 작품. 1538년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의 목욕탕을, 1546년에는 헨리 8세가 서더크 지역을 폐쇄했습니다. 시대의 지성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역병이 찾아오는 바람에 목욕탕은 피하는 게 상책인 걸 알았다.” 목욕탕은 다시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냄새나는 군주들… 린넨 셔츠 전성시대유럽의 군주들이 불결의 대왕으로 자리한 배경입니다. 목욕 문화가 전염병 창궐 이후 싹 사라지면서, 이들 역시 물을 경원시했던 것이었지요.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의 세종대왕으로 통하는 앙리4세는 체취로 악명이 높았지요. 그의 아들 루이 13세는 이런 말을 남겼을 정도입니다. “짐은 선왕을 닮아 겨드랑이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요. 태양왕 루이 14세 역시 씻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셔츠만 입으면 씻을 필요는 없다네 하하.” 린넨 셔츠는 위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사진은 엘리자베스의 신하 플란시스 월싱엄. 이들이 위생을 완전히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포(린넨) 셔츠를 입으면 신체가 깨끗해진다고 여겼습니다. 순백의 아마포 땀과 기름을 모두 흡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그들은 목욕 대신에 셔츠를 매일 갈아입으며 “개운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계몽주의에 위생관념도 깨어나흑사병이 잠잠해지자, 유럽에 다시 목욕 문화가 찾아옵니다. 특히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해수욕이 각광을 받았지요. 철학자 존 로크는 ‘교육론’에서 사내아이의 발을 바닷물에 담그면 몸을 단련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영국인 의사 리처드 러셀 박사는 1750년 바닷물이 수백 가지 질병을 치유한다는 책을 써 큰 성공을 거둡니다.
에드가 드가는 목욕 후 몸을 말리는 여인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목욕이 대중화됐다는 방증. 1890년대 작품.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 목욕의 귀환이었습니다. 1842년 영국에서는 빈민을 배려한 목욕시설도 등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만큼 목욕이 대중에게 필수적이라는 의미였습니다. 1846년에는 목욕탕및 세탁장법이 제정되어 자치도시가 공공의 목적으로 시설을 짓고 관리할 권한을 갖게 됐습니다. 최하급 목욕탕이 2펜스 이상 가격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했지요. 종교가 좌지우지하던 목욕 문화가 계몽주의의 등장으로 부활을 맞이한 셈입니다.
종교에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목욕 문화“그들(고려인)은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고려도경 中)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 개경에 한 달간 머문 뒤 쓴 책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한 대목입니다. 그만큼 고려 사람들이 깨끗이 몸을 씻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고려인들이 얼마나 목욕을 사랑하는지 보여주는 구절이 많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이 흐르는 것을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마치 고대 로마인들의 목욕 사랑을 보는 듯하지요.
불교에서는 목욕을 중요시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에서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이유다. 사진은 고려시대의 불화. 1312년 작품. 기독교가 목욕을 몰아냈듯이 조선시대에서는 유교가 씻는 행위에 변화를 불러옵니다. 유교 사상에서 알몸 전신욕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혼욕과 알몸 노출목욕이 조선에서는 불온한 행위로 간주한 것이지요. 조선시대에는 가옥에 목욕탕이 별도로 없었으며 왕실에서도 나인이 별도로 목욕물을 준비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 사람들은 대신 부분욕을 하곤 했습니다. 낯씻기, 손씻기, 발씻기, 뒷물(항문 씻기), 이닦기, 머리감기가 있었지요. 하루에 꼭 하는 부분욕은 세수, 이닦기, 뒷물이었습니다. 기독교와는 달리 최소한의 위생을 지켰던 것이지요. 전신욕은 연례행사였습니다. 음력 3월 3일, 5월 5일, 6월 15일, 7월 7일,7월 15일 등 늦봄에서 늦여름까지 행해졌다고 하지요. 추울 때 목욕하기 싫은 건 예나 지금이나 진리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전신 목욕 대신 부분욕이 많았다. 그림은 신윤복의 단오풍정. 유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1905년 대중목욕탕이 처음 들어왔을 때 금방 문을 닫았습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벌거벗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해서였지요. 500년 전 고려와 함께 사라진 풍습이 쉽게 부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롯데 신격호 회장 역시 고향 울산에서 대중목욕탕 사업을 하려다 동네 시골 어르신들의 반대로 접었다는 일화가 남아있지요. 그는 그 길로 일본에 가서 굴지의 사업가로 성공합니다. 만약 목욕탕 사업이 자리를 잡았다면 롯데라는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셈이지요.
목욕탕에서 추억에 잠겨보세요끈적한 여름이 막이 올랐습니다.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날, 욕탕에 몸을 담그고 생각에 빠져봅니다. 이 탕은 누군가에겐 욕망의 대상이었고, 어떤 이에겐 저주의 대상이었으며, 또 여러 사람의 추억의 장소였음을요. 저에게 있어 목욕탕은 자상하게 웃으며 등을 밀어주는 아버지, 맥반석 달걀과 함께 먹는 고소한 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입니다.
막스 리버만의 ‘목욕하는 소년들’. 1900년 작품. 개운한 기분, 든든한 배로 아버지 손을 잡고 목욕탕을 나섰던 어린 시절이 아련합니다. 목욕탕에서 새어 나오는 수증기에, 우리네 추억도 역사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네줄요약>
ㅇ고대 그리스인들은 목욕을 숭고한 의미로 즐겼다. 고대로마에서는 목욕문화는 퇴폐와 연결되기도 했다.
ㅇ기독교가 유럽에 자리잡으면서 목욕문화는 쇠퇴했다. 목욕을 쾌락의 일종으로 봤기 때문이다.
ㅇ계몽주의가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위생 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목욕의 부활이었다.
ㅇ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 발달한 목욕문화가 조선시대 유교의 벽에 부딪혔다.
<참고문헌>
ㅇ캐서린 애센버그,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예지, 2010년
ㅇ선화봉사고려도경
ㅇ한은희, 우리선조의 목욕문화, 문화재청, 2013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