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中 반도체 전쟁에 낀 한국, 중국과 격차 벌릴 기회… 지원 확대가 관건

    입력 : 2022.12.12 14:49:29

  • 데이터가 있는 곳엔 반도체가 있다. TV와 스마트폰, 컴퓨터, 자동차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에 반도체가 들어간다. 반도체를 ‘산업의 쌀’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1970년대 이후 반도체 산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주도해왔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강국이고, 한국은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앞서있다. 대만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장비 등에서 우위에 있다.

    이같이 미국과 아시아가 주도하는 반도체 산업 구조에 반발해온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G2인 중국은 일찌감치 ‘반도체 독립’을 선언하고 전방위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지원해왔다. 미국과 중국 간 패권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기술 경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반도체를 두고 양국의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반도체 공급난은 전 세계 제조업을 강타했고, 이는 미국이 중국의 성장을 더욱더 견제하는 이유가 됐다. 미중 갈등 속에서 메모리 반도체 선두주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정학적 리스크도 커져가는 상황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백악관에서 총 2800억달러(약 365조68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용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8월 백악관에서 총 2800억달러(약 365조6800억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지원용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대중국 제재 본격화하는 미국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10월 중국 반도체 산업의 싹을 자르기 위한 초강력 대중(對中) 수출 통제 조치를 내놨다. 반도체 기술을 야금야금 키워온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미 상무부는 인공지능(AI)과 슈퍼컴퓨터 등에 쓰이는 고성능 컴퓨팅 반도체뿐만 아니라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기술 판매를 사실상 금지했다. 노골적으로 중국을 대상으로 수출 통제 조치를 취한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화웨이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제재를 가했으나, 반도체 산업 전반에서 수출 통제를 하는 건 처음이다. 미 상무부는 “중국이 첨단 컴퓨팅 칩을 확보하고 슈퍼컴퓨터와 첨단 반도체를 개발·유지하는 능력을 제한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수출 통제 조치를 살펴보면, 우선 미국 기업이 ▲18㎚(10억 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핀펫 기술 등을 사용한 14㎚ 이하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장비·기술을 중국에 판매하려면 정부 허가가 필수다. 중국 기업 소유의 중국 내 생산 시설에 판매할 경우 ‘거부 추정 원칙’에 따라 수출이 금지된다.

    슈퍼컴퓨터와 AI에 들어가는 첨단 반도체 역시 수출 통제 대상이다. 연산 능력 100페타플롭스(1초당 1000조 번의 연산 처리가 가능한 컴퓨터 성능 단위) 이상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모든 제품을 수출하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 상무부는 ‘해외 직접생산 규칙(FDPR)’을 대중국 수출 통제 조치에 적용했다. 미국이 아닌 제3국 기업이 만든 반도체라도 미국 장비를 썼을 경우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기업들이 빠르게 중국에서 발을 빼고 있다. 애플은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에서 낸드를 구매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 당초 애플은 아이폰에 필요한 낸드의 40%를 YMTC에서 조달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중국 내 미 반도체 인력들의 이탈도 이어지고 있다. 국적이 미국인 사람이 중국 반도체 개발을 지원하거나 현지 공장에서 제한하는 내용이 이번 규제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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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동맹국들의 중국 견제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최근 독일은 반도체 기업 엘모스 생산시설과 반도체 설비업체 ERS일렉트로닉스 등 자국 반도체 업체 2곳의 중국 매각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놨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독일은 반도체와 같은 중요 산업 분야에서 독일과 유럽의 기술·경제적 주권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앞으로도 독일 내 중요 기반 시설이나 첨단 기업에 대한 중국 투자는 더 높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당초 독일 정부는 두 기업의 중국 매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국내외 비판에 결정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수출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반도체 자립’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 10월 16일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개막식 업무보고에서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자립, 자강 실현을 가속화하고 국가 전략의 수요를 지향점으로 삼아 과학기술 난관 돌파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의 이 같은 발언을 두고 외신들은 미국 수출 금지 조치에 맞서 중국이 ‘반도체 전쟁’을 선언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블룸버그는 “시 주석 연설은 바이든 대통령 도전에서 승리할 준비가 됐다는 의미”라고 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국 광둥성 선전시는 반도체 산업 발전 계획안을 내놨다. 선전에 있는 반도체 기업이 생산시설을 개조할 때 설비당 최대 15억위안의 보조금을 주는 내용이다. 전기료는 60%, 물 사용료는 50%씩 각각 지원된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최근 독일을 방문해 현지 직원들에게 미 서부 애리조나주에 있는 공장에서 반도체를 조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는 최근 독일을 방문해 현지 직원들에게 미 서부 애리조나주에 있는 공장에서 반도체를 조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1년간 제재 피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한국 반도체 기업은 일단 이번 수출 통제 조치를 비껴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 내 생산공장이 있어서 원칙적으로 미국 수출 규제에서 별도 심사를 적용받아야 한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전체 낸드의 40%를,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다롄에서 D램의 50%, 낸드의 30%를 각각 생산한다.

    하지만 미 행정부는 대중국 조치 직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해 유예 조치를 내렸다. 1년간 미국 정부의 별도 허가 없이 장비를 수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중국에서 반도체 제품 생산을 지속할 수 있도록 미국과 원만하게 협의가 됐다”며 “앞으로도 정부와 함께 미 상무부와 긴밀히 협의해 중국 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우려도 나온다. 예외가 허용되더라도 예전보다 절차가 까다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탓이다. 게다가 유예 조치일 뿐 이후 허가 기준을 어떻게 할지는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중국 제조시설을 최신화할 필요가 있다. SK하이닉스는 증국 우시에 D램 공장을 두고 있는데, 당초 우시에 EUV 노광장비를 반입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중국 시안 공장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한다. 삼성은 시안에 3기 공장 투자 계획도 밝힌 바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넓힐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결국 미국 반도체 기업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미 세계 메모리 반도체 3위인 마이크론은 뉴욕에 1000억달러(약 134조원)를 들여 첨단 메모리 메가팹을 세운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파운드리 사업 재개를 발표한 인텔은 최근 오하이오주에 200억달러(약 26조8600억원)를 투자해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김용균·최세중 국가예산정책처 분석관은 “미국 반도체법으로 인해 미국 내 반도체 산업 투자 활성화와 국내 기업들의 수혜도 기대된다”면서도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제조기반을 강화하고 있어 반도체 산업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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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자립 나선 EU·일본

    반도체가 ‘경제안보’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해외 각국도 반도체 자립을 위해 총대를 멨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월 ‘EU 반도체칩법’을 발의했고, 연내 통과를 앞두고 있다.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에 대응하고 미국·아시아 반도체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다. 독일 등 유럽은 자동차 업계를 강타한 반도체 공급난에 반도체 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페트 알트마이어 독일 경제장관은 폭스바겐과 BMW 등 자국 자동차 업체들의 요구에 왕 메이화 대만 경제부장관에게 직접 “반도체 공급을 확대해 달라”고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유럽연합의 반도체칩법이 시행되면 민관 합동으로 430억유로(약 60조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반도체 설계·생산 등 유럽 반도체 산업에 돈이 지원된다.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20% 이상을 달성하고, 최첨단 공정의 반도체 기술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일본은 최근 반도체 강국이라는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은 최근 내년도 2차 추가경정예산을 승인하며, 이 중 1조3000억엔(약 12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전력 반도체의 필수 부품인 실리콘웨이퍼와 차세대 반도체에 쓰이는 탄화규소를 확보하기 위한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나왔다. 일본에 공장을 신축하기로 한 대만 TSMC와 낸드플래시 3위 업체인 일본 키오시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도 자금을 지원받는다.

    중국 장쑤성 우시에서 가동 중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내부 전경.
    중국 장쑤성 우시에서 가동 중인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내부 전경.

    일본 내 유수 기업들이 모여 반도체 회사도 설립했다.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키옥시아, NTT,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8개사는 최근 차세대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Rapidus)’를 세웠다. 라피더스는 슈퍼컴퓨터와 AI 등에 사용할 첨단 반도체를 양산한다. 일본 정부 역시 라피더스에 700억엔(약 6647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우선 라피더스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경쟁하는 2㎚ 미만 차세대 반도체를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장비와 소재에선 앞서있지만, 첨단 반도체 개발·양산엔 세계 시장에서 뒤처져 있다.

    [이새하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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