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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명품 와인이야기] 생테밀리옹의 새로운 맹주 ‘샤토 피자크’
입력 : 2022.10.14 15: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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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판 미쉐린 가이드로 불리는 보르도 그랑크뤼 와인 등급, 그중에서도 10년마다 갱신하는 생테밀리옹 지역 와인의 등급이 지난 9월 8일 발표되었다. 1등급 내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지난 2012년 발표와 달리, 이번 발표에서는 ‘샤토 피자크(Chateau Figeac)’만이 1등급 B에서 1등급 A로 승격되었다. 2012년, 지역 사회에서의 위상이 샤토 피자크보다 높지 않았던 경쟁자 ‘샤토 파비’와 ‘샤토 안젤뤼스’가 승격하는 쓰라림을 겪은 이후, 와신상담 끝에 10년 만에 지역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쉐린 가이드가 뛰어난 식당에 별을 부여하는 것처럼 생테밀리옹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와인으로 선정된 와인들은 우리말로 ‘급이 되는 와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클라세(Classe)’라는 표현을 사용할 자격을 받게 된다. 클라세 와인들은 다시 ‘1등급 A’ ‘1등급 B’ 그리고 평범한 ‘클라세 와인’으로 구분된다. 레스토랑 입구에 부착된 미쉐린의 별이 미식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처럼, 와인 레이블에 쓰인 ‘클라세’라는 글자는 와인 애호가들의 마음을 매우 진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의 영향력은 긍정적인 면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 모두 막강해서 와인 가격뿐만 아니라 포도밭의 가격,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와이너리 주인의 평판에까지 변화를 가져온다. 등급을 평가하는 기준은 50%는 와인 시음, 그 다음으로는 명성과 기술, 테루아 등이라고 하지만 이런 기준들은 수치화하기에는 주관적인 요소들이 강해서 등급에서 떨어져 큰 피해를 본 와이너리 주인들이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와이너리 샤토 피자크
같은 자료에 의하면 샤토 피자크의 가격은 지난 3년간 47%나 상승했다고 하니 이번 2022년 발표에 샤토 피자크가 가장 높은 등급으로 승격되는 것은 와인 전문가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샤토 피자크는 샤토 오존과 함께 보르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와이너리 중 하나다. 샤토 피자크라는 이름은 기원후 2세기경 이곳을 소유하였던 피제아쿠스(Figeacus) 가문의 이름에서 기원한다.
샤토 피자크가 보르도 와인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리는 인근의 유명 와인 양조장들이 모두 18세기 이후 샤토 피자크에서 떨어져 나온 곳이라는 점이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200㏊의 포도밭을 일구었던 샤토 피자크의 주인이 도박에 빠져 판을 잃을 때마다 조금씩 떼어다 판 포도밭들이 샤토 슈발 블랑이 되고, 페트뤼스가 되고 샤토 레벙질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샤토 피자크의 포도밭은 50㏊가 조금 넘는, 과거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규모에 불과하다.
보르도의 유명 와이너리들이 세컨드 와인을 시작한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이니, 티에르의 개혁이 얼마나 앞서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샤토 피자크는 2000년대 초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티에리 마농쿠르가 사망한 후 가족 내부의 어려운 소송 과정을 거친 이후, 2013년에 세계적인 양조가 미셸 롤랑을 컨설턴트로 선임하면서 혁신과 재도약을 이루게 된다.
다른 생테밀리옹 와인들이 메를로 위주의 와인이라면 자갈이 많은 토양의 샤토 피자크는 상대적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블렌딩한다. 과거의 샤토 피자크가 부드럽지만 오래 숙성해야 그 맛을 드러내는 와인이었다면, 현재의 샤토 피자크는 더욱 진하지만 어리게 마셔도 가치가 드러나는 현대적인 와인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과거의 샤토 피자크에 대한 깊은 향수를 가지고 있다. 오래 숙성한 샤토 피자크는 강건함 속에 부드러움을 갖춘 멋진 신사 같은 와인이다.
[이민우 와인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5호 (202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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