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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형 기자의 트렌드가 된 브랜드] 파네라이 | 伊 디자인과 스위스 기술력의 이색 결합
입력 : 2022.09.13 15: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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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명품시계 업계는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다. 보복소비 열풍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고, MZ세대라는 새로운 소비군이 등장하며 천군만마를 얻었다. 팬데믹으로 억눌린 소비심리가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등 명품 패션 브랜드뿐 아니라 롤렉스, 오메가, IWC, 리차드밀 등 고급 시계로 향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위드 코로나 시대 이후 해외여행이 현재보다 더 자유로워진다면 시계를 비롯한 명품 업계에 또 다른 성장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모델에 따라 수억원대에 이르는 명품시계 판매량이 늘어난 배경은 앞서 밝혔듯 보복소비와 MZ세대의 유입으로 요약된다. 우선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보복소비 수요가 평소 쉽게 살 수 없는 고가 상품으로 몰렸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결혼식이나 신혼여행이 여의치 않자 결혼 예물로 눈을 돌렸다. 롤렉스의 오픈런이 이어진 이유 중 하나다.
MZ세대가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한 것도 반가운 상황이다. 이른바 플렉스(Flex) 문화가 확산하고 리셀(Resell) 시장에서 일부 브랜드의 중고 가격이 상승하며 재테크의 일환으로 주목받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같은 기간 현대백화점의 명품시계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6%, 신세계백화점의 명품시계·주얼리 매출은 31%, 갤러리아백화점은 38% 증가했다. 시계의 경우, 명품이지만 대중에게 덜 알려진 브랜드를 찾는 경향도 생겨났다.
백화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알려진 브랜드보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취향을 담은 브랜드들의 성장이 눈에 띈다”며 “명품시계의 경우 새로운 모델이라도 국내 시장에 한정적으로 수입되다보니 그에 따른 희소성도 한몫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위스 뉘샤텔에 자리한 파네라이 매뉴팩처.
파네라이 측 관계자는 “숫자를 밝힐 순 없지만 지난해 국내에 오프라인 매장이 늘고 온라인을 통한 이커머스 판매량도 늘면서 매출 성장 등 활발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며 “특히 고객 중 Z세대 비중이 높아져 올해는 지난해 대비 14%나 상승했다”고 전했다.
파네라이 시계는 우아하고 대담하고 독특하다. 파네라이의 상징성은 이탈리아 디자인과 스위스 시계 장인정신의 독특한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가족 기업으로 시작한 파네라이는 전 세계에 수많은 ‘파네리스티(Paneristi·파네라이 시계 애호가)’를 양산하며 매년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고 있다.
1950년에 개발한 루미노르.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어두운 바닷속에서도 시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계를 원했고, 파네라이는 아연황화물과 라듐브롬화물을 혼합한 ‘라디오미르’란 야광물질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2월, 이 시계를 착용한 이탈리아 해군 특전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해군 전함과 구축함들을 침몰시키며 파네라이란 이름도 서서히 존재를 알리게 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파네라이는 계속해서 이탈리아 해군에 시계를 납품했다. 1940년대 이후 러그(케이스와 시곗줄을 잇는 부분)를 케이스와 일체형으로 만드는 등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고, 1950년에는 라디오미르보다 사이즈가 크고 크라운을 가드로 감싸 방수기능을 높인 ‘루미노르(Luminor)’를 선보였는데, 이 또한 라디오미르를 대체하는 야광물질의 이름에서 따온 모델명이었다. 이 루미노르 시계의 크라운 모양이 현재 파네라이 시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네라이 시계를 착용한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
브랜드 인지도가 넓어진 건 1972년 창립자의 증손자 주세페 파네라이가 세상을 떠나고 엔지니어였던 디노 제이(Dino Zei)가 회사를 인수한 후 1993년 일반인용 시계를 생산하면서부터다. 냉전 장벽이 무너지고 군사용 시계 수요가 줄면서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이후 1997년 현 리치몬트 그룹의 전신인 방돔 그룹에 인수된 파네라이는 이듬해 전 세계로 진출하며 2002년 스위스 뉘샤텔 지방에 생산시설을 설립하게 된다. 2005년엔 자체 개발한 무브먼트 P.2000을 출시했고, 현재 후속작을 발표하며 자사 무브먼트의 비중을 끌어올리고 있다.
2014년 스위스 뉘샤텔에 새로운 생산 공장을 마련한 파네라이는 이곳에서 시계와 무브먼트 개발, 생산, 조립, 품질관리 등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8일간 파워리저브 기능을 갖춘 무브먼트 P.5000 칼리버와 분산 진동추가 장착된 자동 무브먼트 P.4000 칼리버가 이곳에서 출시됐다. 홍보와 생산 개발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본사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자리했다.
이탈리아 해군에 납품하던 파네라이의 수심계와 나침반.
파네라이를 대표하는 컬렉션은 단연 ‘라디오미르’와 ‘루미노르’다. 매년 새로운 소재와 컬러, 무브먼트와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는데,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소재와 기능을 갖춘 모델의 출현이 파네리스티를 양산하는 이유이자 브랜드의 강점이다. 여기에 최근 트렌드를 앞서가는 경영전략도 업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일례로 최근 출시한 ‘파네라이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Panerai Submersible QuarantaQuattro) e스틸™’은 지속가능성 목표의 중요성을 인식한 모델 중 하나다. 제품의 총 중량 137g 중 52%에 해당하는 72g이 재활용 소재로 만들어졌다. 섭머저블 라인은 정확한 잠수 시간 계산을 위해 장착된 단방향 회전 베젤, 최대 수심 300m 방수 기능, 슈퍼-루미노바 마감 처리로 높은 가독성 등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나 전문 다이버들에게 필요한 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다. 파네라이는 이번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 e스틸™ 시리즈에 두 가지 새로운 시도를 적용했다. 제품에 처음으로 폴리시드 세라믹 소재를 사용했고, 단방향 베젤에 하이 글로시 디테일을 적용한 것도 처음이다.
창립자 지오바니 파네라이.
▶성과·사회공헌 등 공개돼야 국내 수입 업계의 한 관계자는 “명품 업계의 ESG 경영과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관대한 수용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며 “하지만 트렌드에 개방적인 데 반해 성과 공개나 사회적 공헌 면에선 여전히 폐쇄적인, 이중성이 개선돼야 할 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파네라이는 2019년 섭머저블 스페셜 에디션 구입 고객에게 프랑스 프리다이버 기욤 네리와의 훈련 기회를 제공하는 ‘익스피리언스 에디션’을 발표한 바 있다. 위대한 유산을 보존한다는 취지에서 파네라이는 스코틀랜드의 보트 제작자 윌리엄 피페가 디자인한 1936년산 클래식 요트 ‘에일린(Eilean)’을 구입해 복원했고, 올해 이 보트에서 영감을 얻은 시계 ‘라디오미르 에일린 익스피리언스’ 50개를 한정판으로 출시했다. 시계를 구입한 50명은 아말피 해안을 따라 지중해를 항해하는 여행의 기회도 누릴 수 있는데, 이와 함께 프랑스 NFT 플랫폼인 아리아니(Arianee)를 통해 확인 가능한 NFT로 소유권을 확인할 수 있다.
파네라이 섭머저블 쿼란타콰트로 e스틸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파네리스티’
파네라이 시계 마니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커뮤니티를 일컫는 말이다. 2000년부터 형성된 이 커뮤니티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지역별로 간간이 오프라인 모임도 진행한다. 공식적으로 회원 수가 집계되진 않았지만 전 세계에 수만 명이 활동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파네리스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4호 (2022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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