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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서거 200주년 맞는 E.T.A. 호프만, 음악가를 꿈꾸었던 법관의 이중생활
입력 : 2022.03.04 17: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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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 시즌을 준비하면서 ‘기념해’를 맞는 음악가들을 체크해보곤 한다. 애호가로서의 순수한 호기심 차원이기도 하지만, 각종 강의와 칼럼에서 다룰 만한 주제를 찾기 위한 직업적인 이유가 크다. 올해 기념해를 맞는 주요 작곡가로는 우선 러시아의 알렉산더 스크랴빈(탄생 150주년), 벨기에의 세자르 프랑크(탄생 200주년), 영국의 본 윌리엄스(탄생 150주년), 그리스의 야니스 크세나키스(탄생 100주년) 등이 있다. 프란츠 슈베르트(탄생 225주년), 펠릭스 멘델스존(서거 175주년), 요하네스 브람스(서거 125주년)처럼 보다 친숙한 이름들도 눈에 띄지만,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25년 주기로 기념해를 챙기는 일은 좀 어색하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시기에 맞춰 이벤트성으로 한두 번 정도 다뤄볼 만한 음악가들은 있어도 재작년의 ‘베토벤’처럼 한 해 전체를 아우를 만한 거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주목하게 된 인물이 독일의 ‘E.T.A.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이다.
오는 6월 25일에 서거 200주기를 맞는 호프만은 소설가로 훨씬 더 유명하지만, 분명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는 밤베르크와 드레스덴에서 지휘자로 일했고, 작곡가로서 기악, 성악, 극음악을 아우르며 수십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무대미술가,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음악작품들 가운데 지속적인 관심을 받은 곡은 거의 없지만, 최대 성공작인 오페라 <운디네>는 한때 큰 인기를 끌면서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발전에 기여했다. 아울러 그의 환상소설들은 낭만주의 시대 이래 여러 작곡가들의 영감을 자극하여 걸출한 명작들을 탄생시켰다.E.T.A. 호프만의 자화상. 사진 위키피디아.
호프만의 인생 여정은 법관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순탄치 않았다. 베를린을 거쳐 폴란드의 지방도시 포젠에서 법관시보로 근무할 때는 사육제 기간에 유력인사들을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그렸다가 물의를 빚어 벽지인 플로크로 좌천되었는가 하면, 바르샤바로 발령받아 누렸던 안정된 생활은 나폴레옹 군대의 프로이센 침공으로 채 3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호프만은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니다 가족과 지인들이 부상이나 죽음을 당하는 고초를 겪는다.
한편 나폴레옹 군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하면서 실직한 호프만은 이참에 예술가 겸 작가로 진로를 변경하기로 결심한다. 1807년 여름,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는 궁핍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여섯 개의 찬가’를 비롯한 작곡을 시도했고, 그 이듬해 가을에는 극장 매니저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밤베르크로 이주했다. 밤베르크는 그에게 영광과 좌절을 나란히 안겨준 애증의 도시였다. 밤베르크 시절에 그는 훗날 그에게 결정적인 명성을 안겨준 첫 단편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라이프치히의 유력 신문에 평론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비평 중에서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운명 교향곡)’을 극적인 이미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며 열광적으로 찬미한 글은 특히 유명하다. 반면에 밤베르크에서 지휘자로 일하려던 계획은 극장 감독과의 갈등 속에서 무산되었고 대신 그는 무대연출가, 장식가, 극작가로서의 직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성악 레슨을 해주던 열다섯 살 소녀 율리아 마르크를 향해 (유부남이면서도) 연정을 불태우다 실연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잠시 지휘자로 활동하던 호프만은 나폴레옹이 패망하자 베를린으로 돌아가 다시 관직에 몸담는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8호 (2022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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