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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코코넛·바나나·멜론… 열대과일 즐긴 조선의 양반
입력 : 2021.09.06 16: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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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든 생각이지만 15세기 초의 세종대왕은 어떤 과일을 드셨을까? 물론 복숭아, 참외, 감 같은 우리 전통 과일 위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박이나 포도도 먹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주로 외국에서 들여오는 과일이었다. 그렇지만 파인애플, 코코넛, 바나나 같은 열대과일은 절대 맛보지 못했을 것 같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이런 과일을 먹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틀렸다.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도 지금 못지않게 남국의 과일을 즐겼다. 코코넛도 그중 하나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수입자유화 이후 혹은 해외에 나가서야 맛봤던 과일인데 뜻밖에 조선 초 한양에서도 코코넛을 먹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7년(1435년) 중국에서 온 사신이 역관을 시켜 비단 등과 함께 야자(椰子)를 바쳤다고 나온다. 이국적인 과일이었기에 코코넛을 선물로 가져왔던 모양이다. 성종 때의 기록 또한 흥미롭다. 성종 11년(1480년) 지금의 오키나와인 유구국 국왕이 보내 온 토산물 중에 후추 500근, 설탕 100근 등과 함께 야자 10개도 포함되어 있다. 성종 25년에는 아예 야자수 묘목(椰子苗)까지 보냈다. 이 밖에도 코코넛 관련 기록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종합해 보면 명나라는 물론 유구왕국을 비롯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코코넛이 전해졌다. 비단 과일뿐만 아니라 코코넛 껍질 공예품과 코코넛 껍질로 짠 직물과 옷감, 심지어 야자수 묘목까지도 들어왔으니 코코넛 관련 무역이 상상 이상으로 활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워낙 구하기 힘든 열대과일이었을 것이니 임금이나 최고위 관료들 아니면 맛보기는커녕 구경조차 못했을 것 같은데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던 듯싶다.
조선 선비의 코코넛에 대한 지식은 실제 꽤 넓고 깊었다.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야자수는 높고 크며 잎이 길게 생겼는데 참외 같은 씨가 30여 개씩 달린다. 살은 곰 기름처럼 하얗고 맛은 호두와 비슷하다. 장(醬-코코넛워터)은 한 되쯤 들었는데 맑기는 물 같고 달기는 꿀 같다”고 기록했다. 덧붙여 “서역에 인제아(印弟亞)란 나라가 천축국 옆에 있으니 그곳에서 야자수가 많이 자란다”고 했다. 다만 코코넛워터에 대해 “장(醬)이 술과 비슷해 야자주(椰子酒)라고 하지만 맛은 술 같아도 사람이 취하지는 않는다”고 기술했다. 얼핏 주당이 품었던 호기심 같지만 조선시대에는 곡식으로 빚는 술의 가치가 높았으니 코코넛의 경제적 가치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선비들이 열대과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이 뜻밖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신기해 할 것도 아니다. 야자는 중국 광동이나 운남, 대만이나 오키나와 등지에 풍부했으니 어쩌면 낯설어 한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다.
바나나도 마찬가지다. 열대과일인 바나나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야 먹었을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조선의 양반이 바나나를 먹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고 심지어 제사상에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먼저 고려 말 학자 야은 길재에게 바치는 제문이 <동문선>에 실렸는데 여기에 바나나가 보인다. “금오산과 낙동강은 어제와 같은데 선생은 어디에 계시는지. 초황(蕉黃)과 여단(荔丹)을 올리오니 영령이시여, 제물을 거두어 드시기 바랍니다.”
명종 때 기대승의 <고봉집>에도 황초(黃蕉)와 단여(丹荔)를 제사상에 올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초황 또는 황초는 글자 뜻 그대로는 노란 파초 열매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바나나로 추정된다. 초황에 대한 기록은 이 밖에도 문헌에 여러 차례 나온다. 물론 몇 가지 검증해 볼 부분은 있다. 먼저 초황이 진짜 바나나인지 그리고 실제로 제사상에 놓였는지 여부다. 문헌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 바나나를 제물로 올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보다 바나나가 흔했던 중국에서 쓴 글을 그대로 인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물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연산군 때 열대과일인 여지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바나나 역시 운반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의문은 초황(황초)이 바나나였는지 혹은 파초 열매였는지의 여부다. 파초도 열매를 맺는다. 생김새 또한 바나나와 비슷하다. 다만 바나나와 달리 맛이 없어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역으로 바나나 또한 파초의 일종이다. 야생 바나나(학명 Musa Acuminata)와 파초(학명 Musa Basjoo) 모두 파초과 바나나 속의 식물로 옛날에는 구분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이 조선시대 바나나는 19세기 초반에 개발된, 지금과 같은 3배체 씨 없는 바나나가 아니다. 그러니 외견은 파초 열매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 문헌에 나오는 초황은 대부분 식용이다. 18세기 실학자 홍양호는 달콤한 파초 열매인 감초(甘蕉)를 먹으면 소양의 기운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19세기 초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감초는 달콤한 파초라고 했다. 못 먹는 열매를 달콤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더욱 제사상에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황을 파초 열매가 아닌 바나나로 보는 이유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시대에 웬 바나나냐 싶지만 바나나 원산지는 중남미나 아프리카가 아닌 동남아다. 그렇기에 중국 문헌에는 4~6세기 때도 보인다. 그러니 조선에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유구왕국이나 필리핀, 대만 등을 통해 실물이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조선 양반들은 유럽 참외인 멜론도 먹었다. 다만 한반도에 직접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고 중국에 가서 맛보았을 뿐이다. 숙종 때 북경에 다녀 온 김창업이 <연행일기>에 멜론에 대한 글을 남겼다. “박동화가 회회국(回回國) 참외 반쪽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황제에게 진상한 것인데 통역관이 보내 온 것’이라고 했다.”
이어 모양은 호박 같으나 껍질은 푸르고 속은 누르고 붉어서 우리나라의 쇠뿔참외와 같으며 맛은 두꺼운 껍질을 깎아 내고 씹으면 단단하면서도 연하고 깨물면 소리가 나는데 그 맛이 참외보다 기이하지만 지나치게 상쾌하며 많이 먹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정조 1년인 1777년, 청나라에 다녀 온 이갑의 <연행기사>에도 멜론이 보인다. 탑밀국(塔密國)은 서역 서쪽에 있는 나라로 풍속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청나라에 복속돼 왕래가 잦다며 그곳 참외는 크기가 우리 호박 같고 맛이 매우 단데 겨울에도 있다고 적었다. 이 과일은 위구르 땅인 지금의 중국 신강 지역에서 나오는 하미과(哈密瓜)로 머스크멜론의 한 종류다. <연행기사>에 겨울에도 참외가 있다는 기록은 실제 겨울에 멜론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운반과 보존을 위해 탑밀국에서 주로 겨울에 멜론을 운송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청나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탑밀왕국(지금의 하미)은 청에 멜론을 공물로 바치느라 뼈 빠지게 고생했다. 중국에 정복당한 위구르의 불행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뜬금없이 발견한 기록이지만 조선의 양반들도 다양한 열대과일을 먹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또한 열대과일을 통해 바깥 세상에 대한 나름의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물 안 개구리보다 앞섰다.
[윤덕노 음식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2호 (2021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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