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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권주가를 부르는 봄날
기사입력 2018.04.12 17: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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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창한 봄날, 오늘은 어디 술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몇 년 전 인터넷에 블로그라는 것을 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이따금 어디에 발표도 하지 않을 짧은 글을 써 거기에 한 편, 두 편 모아 놓았습니다. 자잘한 일상 얘기도 하고, 읽은 책 얘기도 하고, 살아온 얘기도 하고, 풍경 얘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 얘기도 했습니다. 가끔 블로그를 방문해 와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혼자 쓰는 이야기 중에 술 이야기가 빠질 리 없었지요.

어제는 누구와 마셨다, 또 내일엔 누구와 마신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냥 술에 얽힌 이야기도 합니다. 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전에 가졌던 기분 좋은 술자리, 또 오래 기억에 남는 술자리와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이야기도 했습니다. 술 이야기를 매일 한 게 아니라 아주 이따금 하는데도 전체적으로 술 이야기가 넘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한 달 바뀔 때마다 <이달의 권주가>라는 글을 별다른 형식 없이 쓰게 되었습니다. 옛날 풍류객들처럼 직접 권주가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매월 초에 술맛 나는 시 한편을 계절과 연관해서 골라 올렸습니다.

마침 4월이 되어 올린 권주가는 스물한 살 무렵 대학에 들어가 이제 막 술맛을 알게 되던 시절 이런 저런 동아리의 신입생환영회 같은 자리에서 소주 한잔과 함께 늘 읊었던 김소월의 시 <바람과 봄>이었습니다.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

작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

바람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 부는 봄,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전체를 읊어도 짧은 시인데 그중에 앞에 세 줄은 빼고 뒤의 두 줄만 읊습니다. 아마 그렇게 읊었던 것은 시 전체를 다 외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뒤의 두 줄이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다시 읊어 보아도 그렇습니다.



봄이라 바람이라 이 내 몸에는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스물한 살 때부터 봄만 되면 술잔 앞에 놓고 딱 이 구절만 읊었습니다. 시 한 구절에 술 한 잔.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도 장소 불문하고 어디서든 봄만 되면 술 한잔할 때마다 이 구절을 외워 읊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엄청 마신 것도 같은데, 양보다는 술과 함께 시 한 수 읊는 분위기를 좋아했던 같습니다.

게다가 이 시는 또 저녁 술보다는 낮술에 제격입니다. 내 가슴 흔들리는 바람은 저녁 바람이 아니라 오후 늦게 꽃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지요. 그저 단순히 한 줄 읊고는 소주 한 잔이거나 막걸리 한 잔을 마시는 것이지요. 누구는 자기가 마신 술잔, 꽃 뜯어 놓고 마셨다고 했던가요, 산가지 꺾어 놓고 마셨다고 했던가요. 그러나 젊은 시절 함께 어울리던 나와 친구들은 잔을 세어 가며 마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봄이라 바람이라, 풀꾹, 이내 몸에는 풀꾹, 꽃이라 술잔이라 하며 우노라, 풀꾹…



1970~1980년대 암울했던 학원 분위기 때문이었을까요? 마시다 보면 때로는 이렇게 딸꾹질까지 해대며 ‘무진장’ 마실 때도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때로 그 ‘무진장’의 봄이 그 시절 무진장의 치기와 함께 그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시절은 나의 생애에 다시 오지 않는, 봄의 바람처럼 지나간 시간이겠지요.

학교 다닐 때는 김소월의 <봄과 바람>을 그렇게 읊었고,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직장 회식 같은 데서는 읊지 않고, 틈틈이 연락해서 만나는 옛 시절의 친구와 선후배들, 그리고 함께 문학공부를 하던 작가지망생과 시인지망생 친구들이 모이면 또 봄이라 바람이라 풀꾹, 하면서 마셔 댔던 거지요.

그런 친구 가운데 권혁소라는 시인이 있고, 이 시인의 <어제 불던 봄바람>이라는 시를 또 김소월의 시와 함께 대구 삼아 읊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문학동아리 사람끼리 모여 학교 앞에 권혁소 시인의 누나가 운영하는 ‘풍차’라는 찻집에 가서 밤이 이슥하도록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시와 소설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어제 불던 봄바람>은 그 시절에 쓰여진 시입니다.

형, 나 취했어 몹시

하지만 알 수 있어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시방 무덤에 살고

그렇게 수없는 무덤 헤어날 수 없었던

옹졸한 취기의 밤

형, 난 계속 취하겠어

완벽하게 헤어나기 위하여



산엔 아직 눈꽃이 하얗고

사월에 부는 높새바람이

대관령을 쓸고 지나간다.




지금도 나는 봄마다 몇 차례 대관령과 강릉을 갑니다. 대관령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대관령으로 가서, 거기에서 배낭을 메고 풍력발전기들이 줄지어 서 있는 선자령 풍차길에 오릅니다. 4월이어도 대관령은 흰 눈에 덮여 있습니다. 때로는 그 눈이 5월까지도 갑니다. 눈 속에 노란 복수초가 피어나고, 바람꽃이 피어나고, 노루귀가 피어나고, 분홍색 자태를 자랑하는 얼레지가 피어납니다.

그곳에 가서 하루 종일 산길을 걸은 다음 하산해서 강릉의 어느 조그만 술집에서 저녁 뒤풀이로 막걸리 한 잔 주고받으며 소월의 <바람과 봄>을 지나간 내 청춘과 함께 읊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엔 젊은 시절부터 함께 문학공부를 하여 나의 동기 같고 아우 같은 권혁소 시인의 <어제 불던 봄바람>을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분위기 잡고 읊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의 봄은 매년 대관령 봄의 눈 산을 밟은 다음 그래야 지나가는 듯합니다. 특히나 그 친구의 시 <어제 불던 봄바람>의 마지막 연 ‘산엔 아직 눈꽃이 하얗고 / 사월에 부는 높새바람이 / 대관령을 쓸고 지나간다’를 아직 눈꽃이 하얀 산을 바라보며 읊을 때면 선자령 풍차길을 오르는 동안 맞이했던 높새바람이 내 가슴을 쓸고 지나갑니다.


소설가 이순원 1957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상, 남촌문학상, 녹색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말을 찾아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은비령> <삿포로의 여인> 등을 썼다.

[사진 류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1호 (2018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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