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부서진다. 해안 절벽에 놓인 나무 데크, 그 아래서 파도가 잘게 흩어졌다. 고개 들어 시선을 멀리하면 왼편에 광안대교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수평선 위로 거대한 선박이 한 손에 잡힌다. 맑은 날이면 대마도가 희미하게 드러난다는 포토 스폿에 서니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잠깐, 이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삼삼오오 오가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 사람, 아시아 사람, 유럽 사람, 북미 사람, 중동 사람, 아프리카 사람까지 위아더 월드가 따로 없다. 괜스레 뿌듯한 마음에 가벼워진 발걸음…. 동생말 전망대에서 오륙도 해맞이 공원까지, 부산을 찾은 이들이 이기대 해안산책로에 선 이유는 뭘까.
이 길, 사실 오랫동안 해상 간첩 침투를 막기 위한 군사 작전 지역이었다. 출입이 통제된 건 당연한 일. 지난 1993년에 무료로 개방된 후 부산 시민의 일상이자 외국인 여행자들의 버킷 리스트 코스로 떠오르며 지금은 한 해 수십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여기서 잠깐, 그런데 이기대(二妓臺)는 무슨 뜻일까. 경상도 좌수사 이형하가 기록한 지리지 <동래영지>에 이와 관련된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영성을 함락한 왜군이 이곳에서 축하 술판을 벌였고, 의로운 기녀 두명이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그러니까 이기대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항거의 기억을 품은 고유명사다.
2005년부터 산책로 조성이 본격화된 이 길은 지질학적 가치도 국가 차원에서 공인됐다. 2013년에 이기대 일대가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공식 지정되며 태종대, 오륙도와 함께 부산의 대표 지질 명소로 이름을 올렸다. 돌개구멍(마린포트홀)이라 불리는 원형 웅덩이, 해식동굴, 화산탄이 박힌 절벽, 붉은 한자로 새긴 ‘이기대(二妓臺)’ 각석까지, 4.7㎞에 이르는 산책로 곳곳이 지질학 교과서의 현장판이다. 약 8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 안산암질 용암이 분출하며 형성된 화산각력암과 응회질 퇴적암이 오랜 세월 파도의 침식을 받아 깎이며 지금의 극적인 해안 절벽을 만들어냈다.
코스의 시작점은 동생말 전망대다. ‘동쪽 산의 끝’이란 이름 그대로 장산봉(224m) 자락이 동쪽 바다로 뻗어나가 끝나는 자리에 세워진 전망대다. 해발 고도는 높지 않지만 시야가로막는 구조물이 없어 180도에 가까운 파노라마 조망이 펼쳐진다. 광안대교의 아치와 마린시티의 고층 빌딩군이 왼편에 가득하고, 그 뒤로 해운대 동백섬의 녹색 윤곽이 이어진다. ‘낭만 가득한 이기대 동생말 전망대’라는 문구의 조형물이 이곳의 명물인데, 노을이 물드는 시간대가 되면 이 앞에서 셔터를 누르려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서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망원경도 여러 대 설치돼 광안대교의 세부 구조나 오륙도의 섬 형태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산책로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출발하면 오륙도까지 내리막길 비중이 높아 비교적 쉽게 걸을 수 있다. 반대 방향인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출발하면 초반부터 가파른 구간을 만나게 된다. 현지인들이 동생말에서 출발하라고 권하는 이유다.
해안 절벽 위로 이어지는 나무 데크 구간은 총 4개의 구름다리를 안고 있다. 127m의 현수교 구조로 이어진 구름다리는 바람이 강한 날엔 살짝 흔들린다. 너른 바다를 앞에 두고 조성된 야외 전망 광장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다. 바위 이곳저곳에 둥글게 파인 돌개구멍이 흩어져 있는데, 파도에 밀려온 작은 돌들이 바위의 갈라진 틈에 맴돌며 수천 년간 파낸 구멍이다. 신기한 듯 한참을 내려다보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는 지질 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산책로 중간 지점에는 꽤 널찍한 공간을 갖춘 이기대 어울마당이 자리했다. 행사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는데,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 부산 야경의 배경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어울마당을 지나면 해안 절벽이 보다 극적인 형태로 이어지며 화산탄이 박힌 절벽면과 붉은 각석이 새겨진 이기대 이름의 현판이 등장한다.
농바위 구간은 이 길에서 가장 날것의 풍경을 간직한 지점이다. 넓은 해식대지 위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늘어서고, 파식대지 곁으로 파도가 거침없이 밀려든다. 깨끗한 수질 덕분에 부산에서 손꼽히는 낚시 포인트이기도 하다.
긴 걸음(4.7㎞) 끝에 도착한 오륙도 해맞이공원은 산책로의 끝이라기엔 부여된 역할이 깊고 넓다.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770㎞ 해파랑길(동해안 코스)의 공식 출발점이자 1463㎞ 남파랑길의 시작점이다. 두 개의 국가대표 둘레길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곳이 바로 오륙도 해맞이공원이다. 그리고 이 공원의 하이라이트는 오륙도 스카이워크다. 2012년 9월 착공해 2013년 10월 18일 개장한 이 유리
전망대는 부산 최초의 공중보행로로 기록돼 있다. 옛 지명인 ‘승두말(잘록개)’에 세워진 이 구조물은 35m 해안 절벽 위에 철제빔을 설치하고 유리판 24개를 말발굽형으로 이어 놓은 15m의 투명 다리다. 스카이워크 위에 서면 오륙도의 여섯 개 섬이 코앞에 펼쳐진다. <동래부지>에 기록된 대로 동쪽에서 보면 여섯 개, 서쪽에서 보면 다섯 개로 보인다는 오륙도의 이름값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다. U자형 구조물 중간에 서면 양쪽으로 바다가 열리고, 맑은 날 오전에는 일본 쓰시마섬까지 눈에 들어온다.
조명이 켜지는 밤 시간대 이기대 산책로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어울마당까지 1260m 구간에 설치된 경관 조명 ‘판타지아’가 일몰 시각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되는데, 낮 동안의 거칠고 날것의 질감이 몽환적인 분위기의 야간산책로로 바뀐다. 덕분에 이 구간은 부산의 야간 관광 명소 목록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광안대교의 야경과 이기대 판타지아 조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이 코스의 독보적인 강점이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야경을 감상하며 잠시 머문 뒤 조명이 켜진 산책로를 걸어 어울마당까지 내려오는 게 요즘 뜨고 있는 SNS 추천 코스다.
[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