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올해 들어 크게 휘청이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공고했던 시장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암호화폐 투자자들의 불안은 향후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먼저 대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암호화폐 신봉론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행동에 나섰다. 일론 머스크는 지난달 기존 보유했던 비트코인의 75%를 매도했다고 공시했다. 약 9억3600만달러. 한화로 1조원이 훌쩍 넘는 규모다. 암호화폐 찬양론자의 배신으로 비트코인 가격은 다음날 흔들렸다. 전날까지 상승세를 보였던 비트코인은 공시 관련 보도 직후 하락세로 돌아서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약 한 달여가 지난 현재,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투자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수차례 비트코인과 도지코인, 그리고 이더리움에 대한 상승론을 펼쳐왔다. 말뿐 아니라 실제 투자로도 이러한 자신의 말을 지원 사격했다. 특히 이러한 암호화폐를 대거 매입하며 팔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1년도 안 돼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국내 증권업계 관계자는 “기업투자의 제1원칙은 기업 경영진의 신뢰인데, 일론 머스크의 경우 테슬라라는 전기차 세계 1위 기업의 CEO임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잃는 행동을 자주 한다”며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수많은 테슬라 투자자들에게도 큰 불안감과 불신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머스크는 이번 암호화폐 처분에 대해 경제위기에 대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조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그는 거시경제에 대해 ‘슈퍼배드 필링’이 든다며 신규 채용 축소 및 기존 인원 정리해고를 단행한 바 있다. 즉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불신이 아닌 회사 운영을 위한 현금 확보 차원에서 움직인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페이스북 모기업인 메타가 전자지갑 서비스 ‘노비(Novi)’를 종료키로 했다.
▶불황기 유동성 확보 차원
그는 이번 암호화폐 정리와 관련해 “현금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불가피한 매각이었다”고 직접 해명했다. 실제 중국 상하이 테슬라 공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가동을 중단했고, 신규 론칭한 베를린 및 텍사스 공장도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지 못한 점 역시 이러한 우려를 키우는 배경 중 하나다. 또한 최근 법적 분쟁으로 번진 트위터 인수 건으로 인해 머스크의 상황은 무척 복잡한 상태다.
이러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때 이런 변수에 대응하기 위한 유동성 확보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그가 그동안 뱉은 이야기· 행동들과 대치되는 현재 상황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그로 인해 수많은 투자자들이 암호화폐에 투자했고, 함께했다는 점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만큼 향후 그의 행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실제 테슬라는 지난해 2월부터 꾸준히 비트코인에 투자해왔다. 15억달러가량을 투자했는데 매입 당시 가격이 3만2000달러 안팎이었다. 그러나 최근 비트코인은 2만달러 벽이 붕괴되는 등 최악의 위기를 이어간 바 있다. 이로 인해 비트코인 보유 시 실현되는 평가 손실을 줄이기 위한 매도에 나섰단 분석도 있다. 분기 실적 보고를 위한 손실 분석을 바로 바로 반영시켜 그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단 계산이다.
머스크는 이번 매각에 대해 의미부여를 축소하며 암호화폐 투자 자체를 접는 것 역시 아니라고 해명했다. 즉 기회가 된다면 다시 비트코인 투자를 늘리고 암호화폐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워낙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잘 바꾸는 그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투자자들의 몫으로 숙제처럼 남아있다.
▶암호화폐 도전 접은 메타
메타버스 투자 확대와 더불어 암호화폐 투자를 늘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메타 역시 최근 일찌감치 암호화폐 시장 도전을 접었다. 메타는 지난 7월 전자지갑 서비스 노비를 종료한다고 밝히며 시장에 충격을 던졌다. 일종의 암호화폐 입출금 전자지갑 서비스인 노비를 9개월 만에 종료하는 메타는 이번이 두 번째 암호화폐 시장으로의 진출 실패다. 지난 2019년 스테이블코인 리브라 발행 계획을 발표했던 메타는 미국 주요 정부기관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1년 만에 출시 계획을 무효화한 바 있다.
가상현실에서 먹고, 입고, 생활하는 메타버스 인프라 구축을 위해 필수적인 통용 화폐, 즉 가상화폐의 중요성은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메타버스 및 암호화폐 서비스의 상용화 시기에 대한 예측이 어려웠단 점이다. 이번 사태 역시 메타버스 시장 확대에 대한 불확실성과 더불어 거시경제 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커지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감하게 암호화폐 투자를 축소하겠다는 방침을 실행한 것이다. 이러한 메타의 결정은 결국 암호화폐 시장 양성화 및 활성화를 더욱 느리게 하는 결정적 요소인 만큼 투자자들의 아쉬움이 커져가는 상황이다.
이에 앞서 1월에는 메타가 정부의 독과점 및 비윤리 투자경영 활동에 대한 점검 결과로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다. 당시 점검 결과를 토대로 부정적인 보도와 정치인들의 비판이 멈추지 않았고, 이에 대해 메타는 관련 기술과 서비스를 2억달러(약 2600억원)에 실버게이트캐피털에 매각하고 백기투항을 하기도 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과감한 투자 목표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방해와 견제로 인해 제대로 실력발휘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 메타 측의 해명이다.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의 훼방으로 암호화폐 진출 자체가 난망한 상황이란 뜻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메타가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사업 축소를 결정한 시점은 최근 급격한 하락으로 암호화폐 시장 전체가 휘청이기 직전이라 테슬라나 기타 암호화폐 판에 깊숙이 들어간 미국 일반 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아크 인베스트를 이끄는 캐시 우드, 국내 대표 게임 업체 넥슨 등이 최근 몇 년간 직접 암호화폐에 대한 긍정론을 펼치며 직접 투자에 나서기도 한 대표적인 거물급 기업이다.
반면 비트코인 시장의 또 하나의 거물급 기업인, 마이클 세일러는 머스크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아예 비트코인 투자에 집중하겠다는 명분으로 최고경영자 직에서 물러나 회장직으로 명함을 바꿨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대신 비트코인에 올인하겠단 것으로 34년이나 이끌었던 회사의 CEO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올 만큼 암호화폐가 매력적인 것인지에 대한 호사가들의 갑론을박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발표문을 통해 “비트코인을 지지하는 이니셔티브에 초점을 맞추겠다”며 사퇴의 변을 밝혔다.
현재 마이크로스트래티지가 보유한 비트코인은 12만9699개. 현재 기준 20억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문제는 역시 평균 매입 단가가 3만700달러란 것이다. 이 역시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왈가왈부 말이 많았던 그의 공격적인 비트코인 투자를 두고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리에 나선 머스크와 달리 세일러는 이에 정면 승부를 택한 셈이다. 아직까지는 그의 판단이 맞는 쪽보다는 틀린 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과연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보면 알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외투자 업계 관계자는 “암호화폐를 단순히 기술적으로 분석해 전망하거나 가격을 예측하기는 여전히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라며 “이러한 시장의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갈지는 전문 투자자들의 예측도 쉽지 않은 만큼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준비 또한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내다봤다.
▶시세는 급등락
이런 와중에 최근 암호화폐의 급등세가 눈에 띄는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둔화 기대감이 반영된 가운데 실물자산이 오르자 암호화폐도 덩달아 수혜를 받는 모양새다. 8월 중순인 11일 기준 비트코인은 이후 20% 상승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물론 연초 대비 비트코인 가격은 사실상 반토막 난 상황이지만 2만달러가 붕괴됐던 불과 최근의 일과 비교했을 때 선전하는 모습이다. 다만 8월 중순 이후 다시 비트코인 가격은 조정에 들어가 현재는 개당 2만1000달러 안팎으로 움직이며 여전히 바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올 상반기에만 비트코인 평가손실이 223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사진 연합뉴스>
특히 이더리움은 8월 11일 기준 1주 사이에 11% 상승하며 좋은 반전을 선보이고 있다. 월간 상승률은 무려 72%로 비트코인보다 3배 이상 가파른 속도로 가격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트코인과 마찬가지로 연초 대비 49% 하락해 있긴 하지만 많이 빠진 만큼 회복 속도가 빨라 투자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이더리움 역시 이러한 가파른 회복세와 별개로 8월 23일 기준 최근 5거래일 동안 다시 12% 넘게 하락하며 조정을 진행 중이다.
암호화폐 업계 관계자는 “최근 암호화폐 시장 안팎으로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진짜 가치를 알아보기 위한 투자자들의 진검승부가 이뤄지고 있는 분위기다”라며 “현재가 바닥을 다지고 반등에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바닥이 출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엇갈리는 만큼 신중하게 시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실물자산이 아닌 가상화폐는 시간이 흐를수록 실물자산의 추이에 동기화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즉 암호화폐 가격 등락의 핵심은 실물자산의 핵심가치와 유사하단 것이다. 결국 현재로선 암호화폐 투자를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완화 후 금융당국의 금리 정책이 어디로 가느냐가 관건이란 뜻이다. 최근 급등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이러한 규제 이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탈중앙화를 외치며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암호화폐는 역설적이게 결국 각 정부의 통화기구의 규제를 얼마나 잘 받느냐가 가격 안정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는 상태다. 이렇다보니 중앙은행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크게 휘청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일론 머스크 같은 개인이 암호화폐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여전히 암호화폐가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나저러나 믿었던 머스크 CEO의 암호화폐 배신은 시장에 큰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암호화폐에는 관심이 없더라도, 그의 말만 믿고 암호화폐에 투자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손해는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 됐다. 과연 비트코인으로 테슬라 모델 Y를 구입하는 그날이 진짜 오기는 할지 여전히 그 궁금증이 커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