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에드거 앨런 포의 '안경' 등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엔 ‘안경’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바로 그 화두 사이엔 안경이라는 도구가 존재한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는 비밀을 간직한 장서를 살펴보기 위해 옷소매에서 안경을 조심스레 꺼내 쓴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주인공 트레비스는 주로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슈퍼맨'의 주인공이자 수줍은 기자 클라크 켄트는 안경을 벗어버림으로써 초인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으로 변신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은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의 눈과 섹스 사이의 관계를 밀도 있게 담아낸 대표적인 영화로 손꼽힌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등장하는 니콜 키드먼의 안경은 관음증을 상징하는 소재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의 몸을 볼 수 있다는 해괴한 중국산 투시 안경이 인터넷을 통해 판매된 적이 있었다. 중국에 본사를 둔 한 업체가 한국어로 된 인터넷 쇼핑몰을 개설하고 ‘누드 선글라스’ 판매 광고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수사에 돌입하자 쇼핑몰은 사라졌지만 짧은 기간 수백 명이 구입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과연 ‘투시 안경은 가능한 것일까’에 대해서 수많은 전문가들은 ‘불가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엿보기 심리를 이용한 한판 사기극으로 막을 내렸고, 이 같은 사기극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는 보도는 큰 이슈가 됐다.
눈과 바라보는 사물, 그 사이 대통령의 안경이 언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입에 계속 오르내린 적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안경을 쓰고 모습을 드러낸 건 지난 설 연휴 이후. 백내장 수술을 한 뒤 시력 보호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뒤 인상이 부드러워졌다는 등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긍정적인 쪽으로 흐르자 이제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계속해서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고 한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갈색의 뿔테 안경을, 천안함 희생 장병들을 조문할 때는 엄숙한 분위에 맞춰 검은색 메탈 안경을 착용했고, 어린이날에는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착용했다.
이처럼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늘 화두가 된다. 안경은 보는 것을 담당하는 최전방 도구다. 안경의 일차적인 목적은 잘 보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흐리는 스크린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또한 안경 쓴 이와 외부를 단절시키는 도구로 대표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장식적 의미로만 쓰이기도 한다.
안경을 안경으로 처음 사용한 이는 13세기 유럽의 수도승들로 노안경으로 사용했으며 렌즈는 수정이었다. 안경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독일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를 발명해 독서가 일상이 되면서부터였다.
세계 안경사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로마의 황제 네로다.
그는 검투사들의 싸움을 에메랄드 렌즈를 사용해 관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인 검증 자료는 없지만 럭셔리한 선글라스의 시초라는 설이 유력하다.
안경의 역할과 미학적 의미
이처럼 여러 텍스트와 영화, 광고, 역사 등을 살펴보면 안경에는 상상 외로 많은 역할과 의미가 담겨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에로티시즘과 관음증까지 내포하고 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나 히치콕 감독의 <이창>은 엿보기 심리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한 우체국 직원이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연상의 독신녀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창> 역시 한 사진작가가 맞은편 아파트를 관찰하다 살인사건을 목격하는 것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열차 안의 이방인>, <다이얼 M을 돌려라>에는 안경, 망원경, 쌍안경이 등장해 관객들의 훔쳐보기 욕구를 대신 해소시켜 준다.
특히 학자들의 안경은 혜안과 지식을 상징하지만 광인이나 사악한 자를 표현할 때도 안경은 중요한 소도구가 된다. 안경이라는 광학 기구에는 지식과 혜안의 능력이 연계돼 있다. 많은 영화에서 지식욕에 사로잡혀 금기시된 행위에 몰두하는 미친 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은 진리에 도달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욕망을 일깨우는 학문적인 편집광의 상징으로 자주 표현되곤 한다.
안경 외에 선글라스 역시 다양한 미학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도구다. 선글라스는 햇볕을 가리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숨기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선글라스는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절대적인 익명성에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불투명한 렌즈라는 스크린은 상대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오늘날 안경이 대표하는 중요한 역할은 패션이다. 안경은 손목시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용하는 정밀한 도구인 동시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이다. 때문에 안경은 각자의 얼굴에 어울리면서 복장과도 조화를 고려해야 한다. 여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액세서리가 적은 남성들의 경우 옷이나 넥타이보다도 안경이나 선글라스가 보다 큰 주목을 받는다. 물론 안경이나 선글라스, 고글, 콘택트렌즈 같은 아이웨어 제품들의 첫 번째 기능이 시력 보호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들 제품들이 단순히 시력 보정이나 시력 보호용을 뛰어넘어 패션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보수적인 국내 안경테 시장도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튀지 않는 안경테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3~4년 동안 몰아친 ‘복고풍 뿔테’ 열풍에 이어 올해는 다양한 컬러와 소재의 안경이 유행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세상을 보는 창 vs 진실을 가리는 장애물
일본의 인디 영화 가운데 '안경'이라는 영화가 있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타에코는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무작정 민박집 하마다로 떠난다. 뭔가 여타 민박집과는 다른 그곳…. 타에코를 반가워하긴 하지만 손님이 오는 것은 싫다고 간판을 거의 보이지도 않게 써놓기도 하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아침이에요”를 나긋나긋하게 말해주는 아주머니 사쿠라도 있다. 그리고 아침이면 바닷가에 모여 메르시 체조라는 독특한 체조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라고 괴상하게 생각하던 여주인공도 어느새 그 체조를 따라하게 된다. 이런 괴상함에 지친 타에코는 민박집을 바꾸려고 하지만,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이쯤 되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안경>일까 궁금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타에코는 차를 타고 가다가 안경을 잃어버리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는 굳이 무엇이든 정확히 볼 필요 없이 느긋하게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삶의 여유를 되찾은 것을 뜻하는 상징이다. 괴상한 하마다 사람들의 취미는 바로 사색이었고, 주인공은 사색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안경을 잃어버린 주인공 타에코는 비록 세상은 흐려졌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나게 된다.
안경은 세상을 보는 창이면서 진실을 가리는 걸림돌이 되는, 어찌 보면 모순된 도구다. 안경은 명료함과 흐릿함, 보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그대로의 현실과 걸러진 현실, 쾌락의 향유와 통제 사이를 넘나드는 도구이자 인간의 보고 싶은 욕망을 담아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안경은 영화 '안경'에서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보는 창이자 진실을 가리는 장애물, 또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방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