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국제정치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각국과 수교조차 여의치 않은 외교 변방이었지만 최근 들어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는 중국의 위세에 눌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미국을 포함해 일본, 유럽연합 등은 사안마다 대만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유럽연합(EU)이 대만을 표기할 때 중화타이베이(Chinese Taipei)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대만의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이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대만을 중국의 일부를 뜻하는 중화타이베이로 불러왔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는 경제 대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눈치를 그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대만은 이런 국제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해 국제사회의 기류와 관련된 입장이 바뀐 것이다.
이 국호 문제는 대만과 중국 사이의 아주 민감한 문제다. 중국은 대만을 하나의 성으로 취급하며, 두 나라는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대만은 오히려 중국 대륙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즉, 국호를 바꾸겠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독립된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천명이나 다름이 없다.
최근 대만 내부에서는 국제사회의 호의적 분위기에 힘입어 국호를 아예 대만공화국으로 바꾸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 헌법을 고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국호 개정 문제가 담길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대만의 독립행보는 계속 강해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중국은 이 같은 대만의 움직임에 대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면서 “대만의 독립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 상원의원들이 미군의 장거리 대형 전략 수송기를 타고 대만 타이베이의 쑹산공항에 도착한 모습.
▶대만의 뒷배는 미국
사실 대만과 중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체급차이가 너무 많이 나 게임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국방비는 대만의 15배 가까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섬나라인 대만이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상 ‘독립’을 외치는 것은 ‘자강’의 노력도 있지만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미국과 대만은 바이든 정부 들어 유례없는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올해 1월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 샤오메이친 주미 대만 대표부 대표가 양국 단교 이후 처음으로 초청돼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4월 크리스 도드 전 상원의원,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차관 등 미 고위인사들의 비공식 대표단 대만 방문, 5월 스콧 버스비 미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 담당 부차관보와 탕펑 대만 정부 디지털 담당 정무위원 등 양국 고위급 인사들의 공개 대화, 6월 현직 미국 연방 상원의원단의 대만 방문 등 양국은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런 거시적 행보 말고도 양국의 달라진 관계는 미시적 관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실상 대만의 미국 외교 공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 대표부의 샤오메이친 대표는 20년 전만 해도 국무부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국무부 인사를 만나기 위해선 국무부 근처 플라자호텔이나 커피숍을 이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무부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샤오메이친 대표는 이를 두고 “양자 간의 공고함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했다.
이처럼 양국의 관계가 밀월의 시대로 접어든 것은 미중 간 갈등 구도에서 높아진 대만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남중국해의 초입에 있는 대만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최전선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남중국해는 대만을 포함해 아세안이 중국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지만, 아세안 국가들의 입장은 대만과 조금 다르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미중의 편들기가 엇갈리지만 대만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더 친미 성향이 강하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은 대중 전선의 아시아 거점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 최근 글로벌 주요 국가들을 끌어들여 반중(反中) 전선 형성에 성공하고 있는 것도 대만의 가치를 더 키우고 있다.
미국은 6월 13일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중국의 신장·홍콩·대만·남중국해 정책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는데,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내용을 담아냈다. 그러면서 G7은 “현상을 바꾸고 긴장을 증가시키는 어떠한 일방적인 시도도 강력히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쉽게 말하면 중국은 대만에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대만·일본·한국 등 전통의 동맹구도를 복원해 내 동아시아에서도 이같은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4월과 5월 잇따라 한일 양국과 정상회담을 열고 성명에 대만 문제를 공식 포함시키며 미국, 한국, 일본의 대중 삼각 공조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런 기류에 힘입어 대만의 차이잉원 정부는 더욱 노골적으로 친미반중 노선을 보이고 있다. 2019년 선거에서 반중 기조를 내세워 재집권에 성공한 차이잉원 총통은 최근 들어 부쩍 주권독립국가 대만으로서의 위치를 강조하고 있다. 본토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국방 노선도 펼치고 있다.
중국을 자극하는 행보도 서슴지 않는다. 6월 4일 톈안먼(천안문) 사태 32주년을 맞아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페이스북에 “우리는 2년 전 오늘 톈안먼광장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젊은이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자유와 민주주의에 자부심을 가진 모든 대만인은 이날을 잊지 않을 것이고 고난에 흔들리지 않으며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에는 중국 자본의 대만 투자를 제한하는 조항을 들어 자국에서 사업을 하는 중국 기업들을 사실상 쫓아내기도 했다.
물론 중국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는다. 외교 경제적 압박은 기본이다.
지난 3월 중국은 검역 문제를 이유로 대만산 파인애플 수입을 전면 중단해 대만 수출에 타격을 줬는데, 집권 민주진보당의 지지 기반인 대만 남부지역 농민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군사적 위협도 지속되고 있다. 중국 군용기가 대만 방공식별 구역에 진입하는 것이 예사고, 대만을 겨냥한 듯한 군사훈련 공개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같은 양국의 갈등에 미국이 빠질 수 없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중국이 대만산 파인애플 수입을 금지하자 트위터에 대만산 말린 파인애플을 먹고 있는 사진을 게재해 대만을 간접적으로 응원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군사적 행보도 마다치 않는다. 6월 미 연방 상원의원단이 대만에 백신을 전달할 당시, 이들의 이동수단은 군용기였다. 미 의원들의 대만 방문 자체에 불쾌감을 가졌던 중국은 이들이 장거리 대형 전략 수송기를 타고 대만에 도착하자 화들짝 놀랐다. 과거에는 주로 무장이 없는 행정 전용기를 이용했다.
사실상 미국의 군사도발로 볼 수 있는 행보인데, 중국을 자극해 자칫 대만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처럼 과감한 행동에 나선 것은 그만큼 중국과의 대결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걱정스런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 양국 간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척 헤이글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은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비공식적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군사적 영역을 넘어서 그 자체로 억제 효과를 가지지만 (중국은)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대만 해협에 대한 통제권 강화를 위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필 데이비슨 전 인도태평양 사령관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6년’이란 시점을 제시하며 “중국이 대만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고 지난 3월 상원 청문회에서 경고했다.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만일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된다면 이는 세계 경제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중의 충돌 가능성은 동아시아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일 양국은 그동안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대만 문제에 관한 공식 언급을 꺼려해 왔지만 바이든 정부가 추진하는 신외교 질서에 동참하기 위해 그동안의 전례를 깨고 있다. 미일, 한미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미일 사이 대만 문제가 공동성명에 명기된 것은 52년 만에 처음이고, 한미가 공동성명에서 대만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불쾌감을 여과 없이 표출하며, 한일 양국을 압박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G7 정상회의 참석 전 정의용 외교부 장관에게 미국 주도의 대중국 압박인 인도·태평양전략을 비난하면서 “잘못된 장단에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우리 대통령의 글로벌 다자외교 무대 참석을 앞두고 사실상 내정간섭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지난 6월 9일 호주, 뉴질랜드, 대만의 방역 정책을 언급하면서 대만을 국가로 지칭하기도 했을 때는 더 격하게 반응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본 지도자가 대만을 국가로 공공연히 칭했다”면서 “중국은 일본의 잘못된 발언에 강렬한 불만을 표시하며 이미 엄정 교섭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왕 대변인은 “세계에 중국은 오직 하나만 있으며 대만은 중국 영토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G7 정상회담 결과에서 보듯이 국제사회는 점점 중국 포위망 구축을 가속화하고 있고 양측의 대치점 온도는 계속 높아만 가고 있다.
6월 13일 발표된 G7 정상회의 공동성명에는 “대만해협 전체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성과 양안(중국과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장려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반도체 강국으로 몸값 더 커져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몸값이 치솟은 것은 올 상반기 촉발된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도 한몫하고 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시대의 본격 도래로 수요가 폭발한 차량용 반도체를 글로벌 공급망이 따라가지 못하면서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TSMC의 가치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도요타, 현대차 등 글로벌 차량 공급업체들은 올 상반기 차량용 반도체를 제때 구하지 못해 차 생산을 일시 중단할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고 TSMC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현재 TSMC뿐만 아니라 대만 파운드리 업체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TSMC만 보더라도 1분기 매출은 129억달러(약 14조5000억원), 영업이익 53억6000만달러(약 6조원)로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TSMC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대비 거의 2배나 커졌다. 문제는 당분간 TSMC 등 대만 파운드리 업체들에 대한 글로벌 의존도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 막 시작된 모빌리티 패러다임의 대전환에 따라 차량용 반도체 수요는 계속 급증할 수밖에 없고, 각국이 자체 공급망을 갖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이는 단기간 내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는 데만 수년은 걸리고, 막대한 자금도 필요하다.
이런 상황은 대만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기술이 자국의 정치 경제의 지렛대가 되는 현 구도를 당분간 고착화시킬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는 “반도체 설비를 만드는 데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반도체 부족현상이 정기적으로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 지정학 전문가는 “세계 경제에서 대만의 역할은 그동안 수면 아래 감춰져 있었는데, 이번 기회로 톡톡히 그 가치가 드러났다”면서 “미중 갈등 구조가 지속되는 한 지정학적 가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만의 입장에서 반도체발 지정학적 가치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또 다른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내 투자와 관련된 행보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TSMC에게 미국 내 투자확대를 요구했는데, TSMC가 이에 호응하는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탐탁지 않은 움직임이다. 이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최대 시장인 중국이 TSMC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당장은 반도체 공급 부족의 수혜를 입고 있을지라도 시장이 정상화됐을 경우 중국에서 외면당한 TSMC가 지금처럴 글로벌 1위를 유지하기 힘들 수도 있다. 무작정 친미 행보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이에 TSMC는 미국 정부의 요구 이후 120억달러 규모의 공장 건설을 짓겠다는 결정을 내려 화답함과 동시에, 올 4월에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이처럼 TSMC가 미중 사이에 줄타기를 하면서까지 균형감을 보이려 하지만 중국은 계속 공격적인 태세다. 특히 반도체발 지정학적 가치는 중국의 경계심을 더욱 높이고 있다.
한 아시아 전문가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 체인에서 TSMC의 전략적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중국 안보정책의 핵심은 대만”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그 이유는 반도체일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대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유무형의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첨단 반도체 공장 설립 계획을 밝힌 TSMC.
물리적 타격은 없었지만 사이버 공격은 이미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대만 사이버 보안 회사인 TeamT5는 “대만의 모든 반도체 산업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실제 2018년 TSMC는 랜섬웨어 공격을 받기도 했다.
현재 미국은 반도체 공급 문제 해결을 두고서도 글로벌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6월 8일 미국의 공급망 차질 대응 전략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반도체 분야 공급망 강화에 있어 동맹 및 파트너와의 협력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의 일환으로 미국은 일본, 대만을 한데 묶는 3삼각 동맹 형식의 반도체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단된 무역투자기본협정 협상을 대만과 재개할 예정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해 “이 협상은 경제무역 의제를 넘어 미국과 대만 간 협력의 상징”이라고 지적했다.
대만과 일본 사이에는 반도체 공장을 짓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TSMC가 일본에도 반도체 공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관련해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16나노미터(㎚, 1㎚는 10억 분의 1m)와 28나노 공정을 도입한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는 계획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TSMC 입장에서 이같은 구도 역시 부담일 수밖에 없어 또 다른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 반도체 업계를 향한 미국의 압박이 언제든 진행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