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한국경제가 ‘트럼프 쇼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글로벌금융시장에서 채권금리가 치솟고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면서 국내시장에서 대출금리와 채권금리가 요동치고 있다. 트럼프발 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트럼플레이션’ 우려에 전 세계 채권값이 폭락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쇼크는 금융시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수출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은 미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면 충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당장 한미FTA 재협상, 주한미군 주둔 분담금 증액 등의 압력이 거세질 것으로 보여 한국의 경제와 외교·안보가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Part Ⅰ| 금리 환율불안·한미FTA 재협상·방위비 추가부담…
악재 쏟아지는데 컨트롤타워는 실종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연설에서 “미국을 우선하겠지만 모든 국가를 공정하게 대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정책기조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당선으로 인한 퍼펙트스톰은 속도의 문제일 뿐 한국으로선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트럼프발 위기가 코앞에 닥쳐올 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한국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정부와 국민이 모두 패닉상태에 빠져있다. 임기 말 레임덕 현상까지 겹치면서 국정 컨트롤타워가 작동을 멈췄다. 일본은 아베 수상이 발 빠르게 트럼프 당선자를 만나 현안을 논의했는데 한국은 국정공백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트럼프 쇼크에 최순실 국정농단까지 그야말로 내우외환으로 한국호는 ‘시계 제로’의 항로에 내몰리고 있다.
▷한미FTA 재협상·환율절상압력 등 보호무역 거세진다
트럼프는 지난 10월 22일 펜실베이니아주 케티즈버그 유세에서 “취임 첫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재협상을 선언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가 이날 내놓았던 취임 100일 구상에서도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가 결국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이 같은 미국 우선의 보호무역은 현실로 다가오게 됐다. 우리나라도 중국·독일·일본·멕시코에 이어 다섯 번째로 대미 무역흑자가 많은 나라인 만큼 미국 우선 보호무역정책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됐다. 한미자유무역협상(FTA)의 철회나 재협상과 같은 심각한 상황까지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가 대선기간 내내 “한미FTA로 인해 한국에 대한 무역적자가 두 배로 늘었고, 미국 내 일자리가 10만 개나 사라졌다”며 협상폐기 또는 재협상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실제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할 경우 우리나라는 응할 수밖에 없다. 협정문에 따르면 상대국이 재협상을 요구할 때 이에 응해야 하며 이를 6개월 이상 거부하면 상대국은 일방적으로 FTA협정을 폐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미FTA 재협상으로 양허정지가 이뤄지면 내년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수출손실이 총 269억달러에 달하고 일자리 24만 개가 사라질 것으로 추정됐다. 수출한국의 입지가 흔들릴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 불 보듯 훤하다.
이 같은 상황이 되지 않도록 통상당국은 한미FTA가 미국과 한국 두 나라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미국 정부와 국회에 적극 알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유세기간 동안 표를 얻기 위해 초강력 대책을 쏟아냈지만 실제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 그대로 정책을 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회복이 지연되고 실업률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공격적인 통상정책을 펼 것은 확실시되고 있다. 한미FTA의 철회나 재협상과 같은 강력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더라도 반덤핑이나 상계관계 같은 무역제한 조치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미수출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정밀한 정책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글로벌 환율전쟁이 본격화될 경우 우리나라도 치명적인 타격이 우려된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경우 중국도 자국 산업보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환율전쟁이 발발하고 무역장벽이 높아질 경우 글로벌 교육과 소비 투자 모두 위축돼 미국과 중국시장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는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트럼프정부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대미무역 흑자규모가 크다는 점을 들어 환율 절상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이미 종합무역법과 교역촉진법에 따라 지난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중국·일본·독일·대만 등 대미무역 흑자가 큰 나라를 관찰대상국으로 분류한 바 있다. 한 단계 높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다양한 경로로 무역제재를 받게 된다. 한국은 환율조작국 지정요건 3개 가운데 이미 2개에 해당되고 있어 국내총생산(GDP) 대비 순매수비중이 2%를 초과하는 요건만 해당되면 바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된다.
▷미국발 금리인상에 금융·외환시장 충격
트럼프 당선자는 지난 11월 9일 당선수락연설에서 유세기간 중 공개했단 1조달러 인프라 투자계획을 재확인했다. 기존 통화완화정책을 지양하고 대규모 재정투입을 통한 성장정책을 펴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저금리를 유지한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통화정책 노선도 바뀔 수 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당장 요동을 쳤다. 달러화는 강세를 나타냈고 세계 각국의 채권값은 큰 폭으로 하락했다. 트럼프의 확장적 재정정책은 시장금리 상승으로 이어져 미국발 금리인상 충격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미국은 이미 12월 중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한 상태여서 미국발 금리인상 충격은 한층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마지파텔 웰스파고펀드매니지먼트 매니저는 파이낸셜타임즈(FT)에 “트럼프 당선 이후 채권시장은 상전벽해가 됐다”며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았고 지난 35년간 이어온 금리하락 사이클도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쇼크로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자 한국은행이 개입에 나섰다. 한국은행은 지난 11월 21일 공개시장 운영을 목적으로 국고채 1조2700억원어치를 직접 매입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은행의 시장개입에도 불구하고 채권시장의 불안심리는 진정되지 않았다. 국고채 3년물과 10년물은 각각 1.1bp, 1.2bp 하락했지만 5년물과 20년물은 각각 0.2bp, 1.4bp 오르는 등 혼조세를 보였다. 한은의 시장개입 물량이 없었던 국고채 30년물과 50년물은 2.9bp나 뛰었고 통화안정채권 91일물과 양도성예금증서(CD)도 상승세를 지속했다.
금융시장 불안을 틈타 은행의 주택담보대출금리도 폭등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11월 16일 현재 KEB하나은행의 대표적인 고정금리주택담보대출상품인 KEB하나혼합금리모기지론(5년고정혼합형)의 대출금리가 5.18%에 달했다. 이는 2014년 1월 이후 2년10개월 내 가장 높은 금리수준이다.
증권업계는 금리상승의 원인이 ‘트럼플레이션’을 우려하는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것이어서 상승압력이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금리가 급작스럽게 상승할 경우 가계부채발 위기의 뇌관이 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가계부채는 올해 말 1300조원 돌파가 예상될 만큼 눈덩이처럼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어 가뜩이나 경기침체로 고전하고 있는 한국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금리상승은 부동산시장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정부의 주택대출 옥죄기에다 금리상승까지 겹쳐 주택시장이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주한미군철수·방위비 추가분담 요구 한미동맹 심판대에 오르나
트럼프정부가 대선공약대로 주한미군 주둔용 방위분담금을 늘리라고 요구하고 대북강경노선을 택할 경우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대북리스크가 커지면서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고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 전쟁위험이 높아지는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다.
트럼프는 지난 5월 CNN인터뷰에서 “한국이 주한미군 인적비용의 50%를 부담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50%라고? 100% 부담은 왜 안되느냐”고 반문했다. 트럼프는 미국이 더 이상 세계경찰 역할을 하지 않을 테니 각국은 자국의 안보를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다. 물론 트럼프가 실제 대통령에 취임한 후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극한 처방을 내리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도 당선이 확정된 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한미동맹을 강화하자”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화답하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굳건하고 강력한 방위태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가 선거유세기간 동안 “한국의 방위분담이 터무니없이 적다”며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과 비교하면 한발 물러선 모습이다.
하지만 트럼프정부가 주한미군의 방위비 추가분담금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지난해 약 9200억원의 분담금을 지불했다. 물가상승률에 연동해 협정이 만료되는 2018년이면 1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분담금을 늘리면 한 해에 2조~3조원의 분담금을 떠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은 2018년에 향후 5개년 협상을 하고 그 결과를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적용한다.
한반도 핵무장론도 넘어야 할 산이다. 트럼프는 지난 3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은) 언젠가는 논의되어야 한다”며 “미국이 지금처럼 약해진다면 한국은 내가 언급하지 않더라도 핵무장을 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인 비핵화와는 정면 배치되는 주장이다. 트럼프가 이 같은 입장을 계속 견지한다면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도 다시 논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대신 한국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면 한반도가 남북한 사이에 공포의 균형이 만들어지게 된다.
트럼프 당선자는 대선유세 기간 중에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격의 없는 직접 대회를 할 가능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6월 애틀란타 유세에서 “김정은과 회의테이블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북핵문제를)협상하겠다”고 말했다. 기업가 출신인 트럼프 당선자가 북핵문제와 남북한문제를 경제와 비용의 측면에서 접근할 경우 대담한 대북 접근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한미핵심 군사현안 중 하나인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조기에 한국으로 넘길 가능성도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분담금 문제로 주한미군 철수까지 시사한 이상 전작권 전환문제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제사령탑 중심 시나리오별 대응플랜 마련해야
세계경제가 트럼프 쇼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지만 한국은 최순실 국정농단에 따른 정치파행으로 경제리더십이 사실상 붕괴돼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경제 원로들은 “경제사령탑을 중심으로 경제부처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트럼프 시대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런 리더십이 없다”며 “새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얼어붙은 기업의 투자심리와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를 녹여 경제를 정상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 경제 원로는 “미국의 보호무역강화에 대비해 최대한 빨리 미국과의 대화채널을 열어 FTA를 비롯한 통상현안에 대한 양국의 시각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감세정책과 금리인상은 이미 예고된 사안인 만큼 그에 맞춰 대응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미FTA가 미국에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것은 미국 기업의 한국 내 활동에 불필요한 규제가 많기 때문”이라며 “규제개혁과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할 경우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트럼프의 경제 공약은 감세정책과 확장적 재정지출을 함께 내세우는 등 엇갈리는 부문이 많다”며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을 한다고 당장 한국경제가 무너지지는 않는 만큼 상세한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도 아직 불투명한 만큼 명확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북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자의 대북정책은 예측불가에 가깝다”며 “외교당국은 다양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