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호 게이트’와 관련해 고액의 수임료를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된 C변호사. 비자금 조성혐의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은 L그룹. 이들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것이 있다. 바로 ‘대여금고’다.
대여금고란 은행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보관해 주는 비밀이 보장된 개인금고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고액 자산가들의 비밀금고로 알려진 대여금고. 은행 직원들조차 주인의 사전 동의 없이는 열어볼 수 없다는 그 은밀한 세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 본다.
▶직원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은행의 가장 은밀한 공간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한 시중은행 영업지점은 올해 상반기 소규모 리노베이션 공사를 단행했다. VIP 고객을 위한 전용라운지를 조금 축소하는 대신에 대여금고를 비치할 공간을 더 늘리기 위한 공사였다. 이 지점에는 약 80여 명의 고객이 대여금고를 사용하기 위해 대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는 대여금고 비치 공간은 은행 내부 직원들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가장 은밀한 공간이다.
대여금고는 신용도가 높은 VIP 고객을 대상으로 본인만 사용할 수 있는 금고를 은행이 일정기간 빌려주는 것이다. 대여금고가 최근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비밀보장, 그리고 안정성 때문이다. 4대 시중은행은 6월 말 현재 전국 주요 지점에서 약 48만 개에 달하는 대여금고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신한은행의 경우 전국 780개 지점에서 13만 개를, KB국민은행은 800개 지점에서 12만5000개의 대여금고를 운영 중이다.
이밖에 KEB하나은행이 780개 지점에서 13만6000개를, 우리은행은 720개 지점에서 8만9000개를 각각 운영하고 있다. 이들 4대 시중은행 이외에도 지방은행이나 일부 저축은행도 대여금고를 운영하기 때문에 이들까지 모두 합치면 약 60만 개 정도가 될 것으로 금융계는 추산하고 있다. 이처럼 활성화돼 있는 대여금고지만 은행의 고객이라고 해서 아무나 또는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고 숫자가 은행 지점에 따라 제한적인데다 신용도가 높은 고객 위주로 대여금고를 배정하다 보니 이용이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은행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 예금 잔액이 1억원 이상인 VIP 고객들이 우선권을 부여받는다. 이들 가운데 은행 통장에 5억원 이상을 예치한 고액 자산가들은 대부분 무료로 대여금고를 사용할 수 있다. 또 부유층이 밀집한 은행 지점에서는 금고를 한번 이용하면 좀처럼 계약을 해지하지 않기 때문에 대기 순서에 따라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여금고 속에는…
그렇다면 대여금고에는 어떤 물건을 주로 보관할까? 은행 관계자들에 따르면 가장 많이 보관하는 것은 바로 실물 화폐나 귀금속, 그리고 유가증권과 채권이다.
다이아몬드 반지나 황금열쇠, 값비싼 고서화나 초고가 시계도 대여금고의 단골 손님이라고 은행 직원들은 귀띔한다. 국채, 공사채, 유가증권, 신탁증서 같은 금융관련 서류는 물론이고 각종 계약서나 권리증서를 맡기는 고개들도 적지 않다. 고액 자산가들이 대여금고를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전하게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외여행이나 장기출장 등으로 집을 비울 때는 집안에 둔 귀중품 때문에 늘 좌불안석이었는데 대여금고를 이용한 뒤로는 이런 걱정이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부유층이 적지 않다.
대여금고를 신청할 때는 은행에 비치된 신청서를 작성한 뒤 주민등록증 등 신원 보장이 가능한 증명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책 1~2권이나 서류가 들어가는 소형 서랍식 금고부터 대형 트렁크 사이즈까지 은행마다 다양한 크기의 대여금고를 비치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대여금고는 폭 30㎝, 높이 20㎝ 정도다. 5만원권 기준으로 약 10억원 정도가 들어가는 크기다.
소형 서랍식 금고의 경우 임차보증금 20만원을 내고 연간 수수료 2만원을 지불하면 된다. 대형 금고는 임차보증금이 50만원, 연간수수료는 5만원 정도 받는 게 일반적이다. 서랍식 소형금고는 화폐나 증서를 주로 넣으며, 대형 금고에는 골드바 같은 귀금속, 실물자산을 넣어두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경우 대여금고는 대여 기간이 1년이며 1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하다. 보증금은 처음 사용할 때 예치한 뒤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다. 연간 사용료는 당초 생각보다 크게 비싸지는 않지만 대여금고를 사용하기 전에 은행직원과 상담을 거쳐야 하고 그때 개인의 거래 기록이나 신용도를 점검받는다.
일반 고객 중에서도 최근 대여금고를 사용하기 원하는 고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맞벌이 부부인 경우 집을 자주 비우게 되고 여름 휴가철이나 명절에 집을 비울 때도 “혹시 도둑이 들어와 귀중품을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떨구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여금고에 물건을 넣거나 꺼낼 때는 반드시 은행 직원이 입회한 상태에서 개봉하는 게 원칙이다. 금고 안에 든 물건은 고객 본인만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무슨 물건을 보관하는지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되며 대여금고에 범죄와 관련된 물건이 보관돼 있었다 하더라도 은행은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은행들은 대여금고도 업무상 보호예수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임대차이므로, 대여금고에서 금융기관의 책임은 금고의 보전에 있을 뿐 그 내용물까지는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최첨단 생체인식 대여금고 등장
현재 국내 시중은행들이 운영하는 대여금고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은행 직원과 고객이 열쇠 두 개를 나눠 가진 뒤 금고를 열 수 있는 방식과, 고객이 혼자서 비밀번호와 지문을 이용해 사용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대여금고는 은행 직원과 고객이 각각 하나씩 열쇠를 보유하는 방식이다. 대여금고를 열 때 고객이 출입부에 기록을 남기면 은행 직원이 보유한 열쇠로 대여금고실을 열어주고 자리를 피한다. 그러면 고객이 나머지 하나의 보유열쇠로 대여금고를 열고 귀중품을 넣거나 찾아간다. 은행 직원은 대여금고가 있는 곳까지 고객을 안내하고 금고를 열 때는 옆에서 지켜보지 않기 때문에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대부분 은행들은 고객들이 안심하고 대여금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대여금고 보관실에 CCTV를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은행 실내 곳곳에 배치돼 있는 CCTV가 은밀한 사적공간인 대여금고실에는 없는 것이다. 대여금고는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설립된 지 오래된 은행 지점에서는 이용하지 못하는 곳도 적지 않다. 또 은행 영업시간이 종료됐거나 휴일인 경우도 대여금고를 사용하지 못한다.
가장 일반적인 대여금고는 은행 직원과 고
객이 각각 하나씩 열쇠를 보유하는 방식이
다. 최근에는 금융과 IT(정보기술)를 결합
한 핀테크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맥과 지문
을 이용한 최첨단 생체인식 방식의 대여금
고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금융과 IT(정보기술)를 결합한 핀테크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맥과 지문을 이용한 최첨단 생체인식 방식의 대여금고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특히 모바일이나 인터넷 금융이 대세로 등장한 가운데 은행들의 일선 영업지점들은 이러한 대여금고를 앞세워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키려는 마케팅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BNK금융 산하 부산은행과 경남은행은 3년 전부터 추석명절이나 여름휴가 등 고객들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동안 영업지점에 설치한 대여금고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지원하는 ‘대여금고 마케팅’을 실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은행지점이 문을 연 지 오래된 지점은 대여금고 공간을 별도로 설치하기 위해 리노베이션 공사를 하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옮겨 가는 고객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온라인 뱅크와 다른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 수단이 필요하고 대여금고가 이를 충족시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여금고가 고객 자산가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최근에는 개인자산 보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반 고객 가운데도 대여금고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고객들이 대여금고를 이용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주거래 고객, 그중에서도 예금대출 실적이 뛰어난 우수고객이 되는 것이다. 은행마다 제각각 다른 고객 등급을 확인한 후 거래 기록이 누적되도록 환전·송금·예금, 신용카드 발행을 주거래 은행에 집중하는 것이 신용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주거래은행을 손쉽게 변경할 수 있는 계좌이동제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금융 소비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주거래 은행에 각종 거래를 집중시켜 신용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비밀보장 때문에 재산은닉 수단되기도
이처럼 사용빈도가 크게 늘어난 대여금고지만 아직도 그 이미지는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대여금고가 고액 자산가들의 재산 은닉 수단으로 자주 세간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액세금 체납자들의 대여금고를 조사해 귀금속, 고서, 외국화폐 등을 압류했다는 언론 보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3년 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미납추징금 환수 수사 때 검찰이 금융기관 압수수색을 통해 대여금고 7개를 확보하고 그 안에 있던 예금통장 50여 개와 귀금속 40여 점을 압수하기도 했다.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의 대여금고는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분산 유치했고, 2007년에는 신정아 씨가 이 지점에 대여금고를 개설하고 명의를 빌려준 것으로 밝혀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청와대 사이에 위치한 우리은행 효자동 지점은 과거 상업은행 시절부터 청와대 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권력형 비리에 자주 연관됐다는 오명을 받기도 했다. 특히 정치인이나 기업인, 연예인들 가운데는 예금이나 적금에 붙는 이자 수익을 아예 포기하고 대여금고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초저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금리 이득을 보는 것보다 아예 개인재산에 대한 비밀보장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여금고의 이미지는 뭉칫돈을 넣어두는 비자금 창구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여금고는 고객들의 사생활 보호라는 선의의 취지로 운영하고 있지만 해외 탈세나 자금도피 수단으로 사용되는 스위스의 비밀금고와 자주 비교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범죄와 연관 의심되면 사법당국 조사
그렇다고 대여금고가 영원불변한 자금도피 수단이 될 수는 없다. 대여금고를 이용할 때는 개인 신원과 비치 물건이 철저하게 보호받지만 일단 범죄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면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압수수색 영장을 받은 경찰이나 검찰은 고객 본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대여금고를 열어볼 수 있다. 대여금고를 압수수색할 경우 피의자가 어떤 은행에 어떤 물건을 보관했는지 특정하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고객들에 대한 사생활 보호를 더 강화하는 조치를 내려 주목을 끌었다. 공정위는 금융회사 불공정약관에 대한 시정조치를 통해 은행 사정에 의해 열람이 필요한 경우 고객의 요청이나 동의가 없더라도 금고를 임의로 열람할 수 있다는 조항을 수정했다. 금고의 파손 등 고객의 사전 동의 절차를 거치기 어려운 예외적인 경우라도 그 사유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적시하고 사후에 즉시 열람 사실을 알리도록 조치했다.
사생활 보호를 원하는 고객들이 존재하는 한 대여금고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또한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작은 공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도 계속 높아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