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의 삼성인력개발원. ‘인재제일’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삼성그룹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삼성그룹에 입사한 직원, 승진한 직원뿐 아니라 그룹 최고경영자(CEO)도 1박 2일 합숙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력개발원에 모인다. 삼성그룹 창업부터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20주년 선언이후 바뀐 삼성 등이 전시돼 있으며 인력개발원 1층에는 OLED TV, UHD TV, 갤럭시S 시리즈 등 세계 일류 상품이 전시돼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 2월 모두 7차례에 걸쳐 3500명에 달하는 전체 계열사의 부사장, 전무, 상무를 대상으로 ‘마하 포럼(Mach Forum)’을 개최했다. 이번에 승진한 임원들은 대상에서 제외했으나 미국, 영국, 독일 등 해외 근무하는 임원들도 예외없이 참가해야 했다. 해외 지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이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히 귀국했다.
세미나는 1박 2일 동안 진행됐으며 오후에 외부 강사의 강의를 듣고 저녁땐 조를 나눠 마라톤 회의를 해서 이건희 회장이 제시한 ‘마하 경영’의 실천 방안을 논의했다. 합숙 마지막 날에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이 특강을 하며 정신 재무장을 독려했다.‘한계 돌파’를 추구하는 삼성이 외부 인사를 강연에 초청한 것은 이례적이다. 삼성 관계자는 “예전에는 임원 교육 때 내부 강사가 주로 초청됐으나 이번부터 외부 강사를 모시고 강의를 진행했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추구하는 삼성의 가치를 담아 진행했다”고 귀띔했다.
2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진행된 ‘마하 포럼’의 외부 초청 강연에 온 고위 임원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으며 “우리의 한계는 우리가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1박 2일 세미나의 주제는 ‘마하 경영’이다. 마하경영이란 지난 2006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정신이다. 전투기가 이륙 후 마하의 속도를 넘으려면 설계도는 물론이고 엔진, 부품, 소재를 모두 바꿔야하는 것처럼 삼성이 초일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마하경영’을 다시 제시했다. 이건희 회장의 올해 신년사는 지난해 신경영 20주년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나온 첫 메시지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고민의 시작 “최고 성과 낼 때 바꾸자”
이건희 회장의 2014년 신년사는 삼성그룹이 앞으로 추구하는 것과 임직원이 해야 할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이건희 회장은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 하드웨어적인 프로세스와 문화는 과감하게 버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도 떨쳐내자.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신경영 20년간 글로벌 1등이 된 사업도 있고, 제자리걸음인 사업도 있다. 선두 사업은 끊임없이 추격을 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은 시간이 없다. 산업의 흐름을 선도하는 사업구조의 혁신,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기술혁신, 글로벌 경영체제를 완성하는 시스템 혁신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불황기일수록 기회는 많아 남보다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자”고 주문했다.
이건희 회장이 ‘한계돌파’를 강조한 것에서부터 삼성의 고민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그룹은 명실상부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글로벌 정보기술(ICT) 업체가 됐다. 하지만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려한 것이다.
삼성그룹이 잘나가는 줄 알았는데 “또 바꾼다?”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 내부 분위기는 심상찮다. “언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나?”라고 말할 수준도 아니다. 삼성 내부에서는 “올해는 어떻게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내년부터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 경쟁사들이 변신에 실패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도 삼성에 위기감을 더해주고 있다.
소니, 노키아, 모토롤라, 블랙베리 등은 모두 삼성전자가 극복해야할 대상이거나 시장에서 즉각 경쟁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소니는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투기 등급, 정크본드)으로 내려갔으며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됐고 모토롤라는 구글에 매각됐다가 올해 초에는 중국의 PC제조업체 레노보에 다시 매각됐다. 블랙베리도 매각에 실패하고 재기를 노리고 있으나 쉽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반면 IBM은 1980년대 PC와 서버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대표적인 하드웨어 기업이었으나 이후 사업구조를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로의 대전환에 성공,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업으로 거듭났다. IBM은 이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서비스로의 변신을 통해 기업 가치 사슬을 높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삼성전자 수원, 기흥 사업장 곳곳에는 ‘소니 노키아의 사례를 보라’는 사내 방송이 흐른다. 지난 1월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전사 차원의 위기 극복 결의대회도 열었다. 한계돌파 결의대회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CE(가전)부문, IM(IT·모바일)부문 등 나눠서 개최했다. 권오현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외부에서 잠정실적 발표 후 삼성의 성장세가 꺾인 것인지, 호흡조절인지 등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있다”며 “다시 한 번 저력을 되찾아 우려를 불식시키고 힘을 북돋우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처음 ‘한계돌파 결의대회’를 개최한 것은 삼성전자와 그룹의 ‘한계돌파 선언’이 말에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잘나가는 삼성?
삼성전자는 지난해(2013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연간 매출액은 228조6900억원, 영업이익은 36조7900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기 때문. 지난해 3분기에는 분기 영업이익 10조1600억원을 기록, 분기 실적 최초로 10조원의 영업이익을 돌파하기도 했다. 휴대폰(무선사업부)이 최고 실적을 기록했고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패널 등의 실적도 좋았다. 2012년에 비해 2013년의 연간 매출은 지난 2012년 대비 14%, 영업이익은 27% 늘었다.
연 매출 200조원이 넘는 규모의 회사가 연 14% 성장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삼성전자’ 혼자만의 성과다. 삼성그룹 전자 계열사 및 금융 계열사, 중공업, 화학, 서비스, 호텔, 에버랜드 등 삼성그룹 전반으로 확대하면 규모는 엄청나다. 한 언론에서는 삼성그룹(20개 계열사)의 지난해 총매출액이 390조원을 돌파하며 한국 정부의 총수입(360조)보다 많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한 기업 매출이 국가 수입, 예산을 넘어선 경우는 지난 2006년의 노키아가 유일하다. 삼성그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집계한 수치는 아니지만 이와 근접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최고 실적’을 기록한 날에도 삼성그룹 및 삼성전자 최고위 임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2013년 4분기 실적이 예상에 비해 낮아서(영업이익 9조원대로 예측됐으나 실제로는 8조3000억원을 기록)가 아니었다. 이 같은 실적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더 큰 듯 했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사장은 “4분기에 신경영 20주년 기념 성과급을 지급해서 영업이익에는 손해를 봤다. 주주들의 불만도 많았다. 이는 털고 갈 것은 털어야 한다는 뜻도 있었고 시장의 기대를 낮출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쓰러지는 재벌 기업도 있는 등 경제 산업 사정이 녹록지 않음에도 최고 성과를 거두면서 ‘절대 1강’ 삼성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함께 ‘제왕적 삼성’에 대한 이미지도 큰 부담이다. ‘국가 예산보다 큰 삼성’이란 기사나 이미지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삼성그룹의 한 직원은 “성과급을 100% 정도 받았다고 하니 아버지가 넌 회사에서 그렇게 밖에 못하는 직원이냐고 질책하시더라. 고위 임원이나 최고경영자들이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다고 하니 모든 직원이 다 그런 줄 안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내 불균형
삼성그룹이 절대 강자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삼성 내 계열사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벌 1위는커녕 국내 1위도 힘든 삼성 계열사도 존재하며 삼성전자만큼의 성과급은 꿈도 못 꾸는 계열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삼성그룹 내부에 ‘삼성전자와 후자가 있다’는 말이 농담은 아니다.
실제로 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영업적자만 1조원을 기록하며 국내 10대 그룹 상장사 중 최악의 실적을 냈다. 삼성그룹 계열사가 모두 ‘최고’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최고실적(삼성전자)과 최저실적(삼성엔지니어링)이 동시에 있었던 셈이다. 삼성SDI와 삼성정밀화학도 200억원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삼성엔지니어링은 저가 수주에 따른 실적 악화에다 시공을 맡았던 삼성정밀화학 울산공장에서 물탱크 폭발 사고가 나는 등 악재가 잇따르자 경영진을 전격 교체하고 삼성전자 임직원을 배치, 내부 혁신에 나서는 등 긴급 정비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달 열린 ‘마하 포럼’ 때도 이 같은 분위기의 토론이 있었다. ‘최고 삼성’을 지향하지만 이는 삼성전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마하 경영을 다시 화두로 꺼낸 것이 삼성전자는 더 잘하고 그렇지 못한 계열사는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계산이 있었다”며 “삼성그룹 내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도 지금 삼성의 시급한 과제다”고 말했다.
2020년 400조원 매출 가능할까?
지금 삼성전자의 목표는 무엇일까? 글로벌 슈퍼 우량 기업? 스마트폰 10년 연속 1위? 브랜드 선호도 글로벌 1위?
삼성은 이 같은 목표를 구체적인 숫자로 가지고 있다. 오는 2020년까지 매출 4000억달러가 넘는 기업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 삼성전자는 지난 2009년 12월 창립 40주년을 맞아 ‘비전 2020’을 선포했는데 이 비전은 지금도 삼성전자의 최고경영자(CEO)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지난 3월 14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에게 나눠준 영업보고서 첫 페이지에도 ‘비전 2020’이 새겨져 있었을 정도다. 오는 2020년까지 6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 비전은 아직까지 유효하며 삼성전자가 가야할 뚜렷한 목표다.
‘비전 2020’은 오는 2020년 매출 4000억달러 달성으로 IT업계 압도적 1위, 글로벌 10대 기업으로의 도약, 브랜드가치 글로벌 톱5, 존경받는 기업 톱10, 친환경기업 글로벌 톱 수준(Top-Tier) 진입 등의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이오칩, 의료기기, U헬스, 태양전지 등 삶의 질 향상(Lifecare)분야 신사업을 적극 발굴하고 고객의 다변화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솔루션 사업을 확대해 나간다는 구체적 사업 방향을 제시했다.